베를린에서 겨울 나기

베를린에서 겨울 나기

 

글·사진 정유진 『함께사는길』 베를린 거주 독자 jungyj@kfem.or.kr 

 

독일인들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사색의 대가일 것이다. 일 년의 절반 이상을, 노루 꼬리만큼 짧은 낮 시간과 이틀이 멀다하고 내리는 빗속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몸통에 이끼를 두르고, 날씨에 이미 적응한 꽃들은 뼛속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에 맹렬히 저항한다. 오후 3시 반이면 어두워지는 터라 하루 일과도 짧기 그지없다. 일없이 자전거에 기름칠을 하던지 책을 읽는 수밖에. 좀 더 건전하게는 우주적 추위에 맞서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우중산책을 하는 정도.


이곳의 겨울은 한국과는 달리 습하다.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한국인들은 ‘뼈에 사무치는 추위’라 부른다. 독일인들 역시 이 우중충한 겨울을 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따뜻한 물을 플라스틱 주머니에 넣어 이부자리와 몸을 덥히고, 침대 위에는 양모 시트를 덧대어 깐다. 외출할 때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내의에 모자, 장갑에 털 장화까지 신고, 슈퍼마켓에서는 색다른 보온용품이 선보인다. 앙고라 털 달린 복대와 두 팔만 끼어 옷처럼 입는 어깨 보온대, 판초우의처럼 입었다가 덮을 수 있는 캐시미어 이불, 발을 위한 신발 모양의 보온용구 등. 성탄절을 기다리며 한 달 넘게 크리스마스 시장을 열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봄과 함께 꿈처럼 다가올 부활절 휴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문화 역시, 이들 조상이 찾아낸 궁극의 겨울나기 지혜일지도 모른다.


겨울밤, 그러나 아껴서 생활하기
나는 둘째 아이를 이곳에서 낳았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비타민제를 처방받았다. 햇빛이 적어 관절 성장에 이상이 올 수 있으니 생후 일 년간은 날마다 먹어줘야 한단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아이들은 창백하게 웃자라는 듯하고 어른들은 드문 태양 대신 화려한 꽃을 정성껏 가꾼다. 맑은 해가 나타나면 넋 놓고 해바라기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넓은 잔디밭에 모여 평화롭게 여가를 즐기고 있는 익숙한 풍광은 사실 지독한 날씨 때문에 생긴 눈물겨운 한풀이가 아닐까). 동지부터 춘분까지를 공식적인 겨울로 치는데, 우리 가족은 9월부터 시작되는 가을부터 월동 채비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일 년의 반이 겨울인 셈이다. 이곳에서 다섯 번째 겨울을 맞는 나도 이제 바닥 난방의 위대함과 대중목욕탕의 발랄함에 대해서는 깨칠 때가 되었다.


온돌 대신 라디에이터 열풍에 기대어 겨울을 나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되었다. 별다른 각오 없이 이곳에서 맞은 첫 겨울, 둘째의 출산까지 겹친 터라 라디에이터가 주는 훈훈함을 2개월 여간 풍족히 누렸다. 바깥 날씨는 혹독해도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고, 그럭저럭 타국에서 산후조리 한 셈 치자 했다. 봄에 날아온 요금 고지서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건비가 비싼 탓인지 독일은 전기, 물, 난방 사용량을 일 년에 단 한 차례 계량한다. 엄청난 요금 폭탄을 맞았다. 에너지 절약 훈련이 안 된 가정으로서는 풍비박산 나기 좋은 연말정산임에 틀림없다. 나의 경우, 두 차례 뒤통수를 맞고 나서는 그릇에 남아 있는 세제거품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지독한 기후에서 살아남는 방법
기본 물가가 높은 경제대국이어서일까. 독일의 전기요금, 물값, 난방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그러다보니 이와 관련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 “독일식으로 할까, 한국식으로 할까?”
독일 생활 십 년이 넘은 한국인 친구가 설거지를 돕는다면서 묻는 말이다. 한국식이란 물을 구태여 아끼지 않으면서 그릇의 위생에만 최대한 신경 쓰는 방식을 말하고, 독일식이란 집주인 눈치 봐가면서 물을 최대한 덜 쓰고 세제가 조금 남아 있어도 마른행주로 쓱 닦아낼 수 있는 용기를 이른다. 독일식 설거지 방법을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개수대 구멍을 막아 더운 물을 가득 채우고 세제를 푼다. 그릇을 몽땅 집어넣었다가 하나씩 꺼내면서 수세미로 닦는다. 모든 접시를 한 번 닦은 후, 이 물은 버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 비누칠 된 그릇을 다시 담갔다 뺀다. 그리고 마른행주로 닦아주면 끝.

 
집집마다 물 아끼는 요령도 다양하다. 애벌설거지를 따뜻한 물로 하되 본설거지는 찬물로만 하거나, 따뜻한 물은 지역난방으로 공급되는 온수 대신 전기주전자로 끓여서 사용한다든지. 가끔씩 상상을 초월하는 이 절약 세계에는 어쨌거나 공통된 전제가 있는데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흐르는 물에 헹굴라 치면 그릇 한 개씩을 들고 수돗물을 틀었다 다시 잽싸게 잠가야 한다), 그리고 세제 찌꺼기는 사람이 먹어도 괜찮다는 것 이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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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복으로 완전 무장하고 겨울 베를린 거리 산책 나선 아이들(오른쪽이 필자의 딸) ]


2. “물 좀 아껴 써라.”
이곳에 정착한 교민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과 물, 전기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처럼 실내에서 반팔 입고 겨울을 나려면 엄청난 비용 지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한 철 난방비로 백만 원 이상은 족히 나올 것이다. 특히나 물 사용을 둘러싼 갈등이 많다. 설거지고 샤워고 도대체가 물을 아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깔끔한 한국 친지를 손님으로 맞이했다면 방문 말미엔 아마도 그이를 대하는 집주인의 자세가 그 전 같지 않으리라.

 

3. “요금이 비싸져야 정상이지.”
첫해를 보낸 후, 전기회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연료비 상승, 재생가능에너지 비중 증가로 전기요금 단가를 무려 6퍼센트 올리겠다는 것. 이듬해 6퍼센트를 또다시 올린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대한 집 근처 고집불통 잔소리꾼 노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국제유가가 치솟고 석유가 고갈되어 가고 있는데 전기요금이 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하지 않느냐고, 핵에너지가 싸다고 하지만 체르노빌을 보라고, 핵에너지는 절대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따끔하게 충고한다. 너의 아이들 세대를 위해 전기 아껴 쓰라고. 사실 이 할아버지의 이토록 유식한 답변에 적잖이 당황했다. 평소엔 교양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이었는데 그는 이미 국제정세나 에너지 경제 구조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자생력을 키워라
이들에게서 체득한 삶의 지혜 중 하나는 ‘자생력’에 관한 것이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웬만해서는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는다. 감기에 대한 처방은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물과 차를 충분히 마시라는 것이 전부다. 이런 형편이니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 가봐야 한 방에 똑 떨어지는 약을 처방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를 충분히 마시면 고약한 감기도 며칠 만에 지나가는 치유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과 차로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쓴다. 콧물이 나면 소금물을 콧속에 넣고, 기침이 나면 샐비어 사탕을 먹거나 기침 주스(담쟁이덩굴 잎사귀 진액)를 마시는 등.   


사실 물값, 에너지값 비싼 것도 항생제 처방과 같은 꼴이 아닐까. 우리나라처럼 에너지 빈국인 독일(70퍼센트 이상의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한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물이나 에너지 소비를 줄이든지, 외국으로부터 수입을 꾸준히 늘리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하는 순간 에너지를 수입하는 나라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지난 2007년 러시아가 독일로의 천연가스 수출 중단을 검토했을 때, 난방 없는 겨울이 될까봐 독일 전역이 들썩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뉴스는 정부에서 물값, 전기요금 등 공공 서비스 요금의 인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시민들이 반발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동과 같은 산유국이라면 모르겠지만 에너지의 97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하면서, 물 부족하다며 댐을 더 짓겠다고 하면서 요금 오른다고 푸념만 한다.

 

겨울을 맞는 자세
독일인들은 아껴 쓰고, 다시 쓰는 것이 체화되어 있고 그것은 거의 태양에 관한 그리움의 유전자와 동일하게 몸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그들의 오래된 창고에 가면 나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체험을 하게 된다. 연장과 저장식품, 청소도구, 언젠가는 쓰일지 모르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어김없이 기름칠 되어 가지런한 모습에서 삶에 대한 경건함과 한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의 엄격함을 본다고 하면 과장일까.


또다시 무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내복 꺼내 입고 두꺼운 이불 덥고 근근이 견뎌내는 수밖에. 난방비 때문에 집안에서도 긴 옷을 껴입고 있어야 하지만, 안과 밖의 온도차가 크지 않아서인지 큰 병치레는 없다. 베를린에서는 이렇게 궁상맞게, 그러나 자생력을 바탕으로 겨울을 난다.


사흘 만에 해가 났다. 해가 숨기 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창가에서 놀려야 하리라.

 

녹색 기술의 발달, 세계 선도

값비싼 물값, 전기값이 독일 산업을 세계 일류로 만들고 있다. 이런 모순된 표현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사실이다. 독일제 식기 세척기, 드럼 세탁기는 물과 전기를 조금 사용하면서도 세척력이 뛰어나다. 독일은 겨울철 난방비 절약을 위해 전국적으로 건축물 에너지 효율화 개선사업이 한창인데, 창호 단열에 사용되는 2중창 3중창은 독일제품을 최고로 친단다. 새로운 녹색 산업을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다는 시스템 에어컨은 겨울철 난방까지 전기로 한다는데 전기요금 폭탄을 두려워하는 독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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