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된 환경운동가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동대구역 광장은 뜨거웠다. 에어컨을 켠 택시에 탔지만, 차창 밖 아지랑이조차 일렁이는 대기를 보니 마음이 시든 파처럼 늘어졌다. 택시는 다소 사납게 달려 평리동으로 갔다. 서대구 평리, 산업화 이전에는 그저 논과 밭뿐이던 그 마을은 70년대를 거치며 노동자들이 몰려 사는 산업공단 배후 거주지가 되었다. 차가 동네로 들어선 뒤 시선은 좁은 길 양쪽으로 늘어선 4, 5층 연립과 주택들에 막혔다. 거듭해서 코너를 돌아가던 차가 정차하려 속도를 줄였다. 정갈한 흰색 본당과 부속건물들이 아담한 정원을 감싸 안은 성당이 보였다. 눈이 시원해졌다. 
 

그 웃음을 본 적 있다

 
박용성(바르나바) 신부는 적벽돌을 포도석으로 깐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땅이 뜨거워서 물을 좀 뿌리고 있었어요.” 눈과 입만 웃는 게 아니라 얼굴과 온몸을 다해 웃는 그와 손을 잡았다. “시장하시죠. 식사부터 하고 얘기는 천천히 해요!” 저 웃음을 기억한다. 2012년이었을 것이다. 그가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반대운동을 이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함께사는길>은 당시 통인동 한옥촌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무더위를 뚫고 오랜만에 상경한 그가 찾아왔다. 밥을 시킨 사이 열기가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 마당을 보더니, 수도전에 가 호스로 마당에 물을 뿌렸다. 그걸 보고 내가 씩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지금처럼 온몸으로!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상을 차렸는데 부실하지요?” 깻잎과 상추를 올리고, 도시락 반찬용 소시지를 볶아 냈다. 된장국도 보글보글 끓여 상을 미리 봐 놓았다. ‘아니 정말 진수성찬이야!’ 찬은 소박했지만 멀리서 온 인연을 기다리며 직접 음식을 준비해 차린 상에는 흔치 않은 진심도 찬으로 올라 있었다.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다. 사제관에서 점심을 먹고 ‘순례자의 집’으로 옮겨 앉았다. 애은성당이 이곳을 지나는 세상의 인연들에게 값없이 묵어갈 수 있도록 내준 공간이다. 
 
박 신부는 2019년 부제로 부임 직후 1971년 축성된 낡은 성당을 신도, 이웃 주민들과 함께 직접 리모델링했다. 애은성당은 70년대 이후 대구·경북 지역 산업선교의 중심지였는데 부설 ‘상록야학’과 노동자 자녀들을 가르치던 ‘상록유치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러 성당은 낡았고 교사로 쓰였던 건물도 낡았다. 성당의 변화는 박동신 주교(부산교구장, 애은성당은 부산교구 산하)가 애은성당의 담장을 허물면서 시작됐다. 이를 이어받아 부임한 박 신부(당시 부제)가 전면적인 성당 리모델링에 나섰다. 사제가 삽을 들어 땅을 파고 교우들이 벽돌을 이고 주민들은 시멘트를 갰다. 마을 전체가 성당 리모델링에 함께 했다. 소식을 듣고 예술가들도 힘을 보탰다. 이제 애은성당은 270평 대지 위에 ‘그림 같은’ 작은 본당이 있고 그 좌우에 또한 ‘그림 같은’ 작은 부속건물들이 170평의 마당을 향해 팔을 벌린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지역 명소가 됐다. 마을 공동체가 함께 일군 이 공간의 아름다움은 지난해 도시공간의 역사적 재생을 주제로 열린 <(사)여성과도시>와 영남일보 주최 ‘2020 美터상’의 대상으로 선정됐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공동체 정신이 돋보였다’는 게 대상 선정의 변이다. 
 
애은성당에 딸린 부속건물들은 모두 지역공동체를 위해 바쳐졌다. 길손들의 숙소인 ‘순례자의 집’, 예전 상록야학 건물에 들어선 마을 자율문화공간인 ‘카페 에버그린’,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하는 마을 부엌 ‘상록식당’, 지역 청소년들의 공부방인 ‘상록책방’, 과잉진료로 얼룩진 의료 현실을 개선하고 마을 주치의 병원을 세우기 위해 준비하는 ‘위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사무실 등이 모두 애은성당이 지역사회를 위해 운영하는 공간이다. 
 

환경운동가, 평화운동가 그리고 사제

 
박 신부는 2016년 1월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M.Div) 과정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친 그는 2019년 2월 졸업 직후 부제 서품을 받고 애은성당에 부임했다. 지난 6월 6일에는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성직 서품식에서 신부로 서품되었다. 
 
 
성직 과정을 밟기 전의 그는 환경운동가였다. 2007년 12월 서해에서 삼성 허베이스피리트 호가  원유 유출사고를 냈던 당시까지 그는 ‘아름다운가게’에서 5년 동안 자원순환활동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역사상 최악의 해양오염사고가 발생하자 태안지역으로 달려간 130만이 넘는 자원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 현장에서, 해안 기름 제거 캠페인을 펼치던 환경운동연합과 인연을 맺고 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환경운동연합 중앙사무처와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회원팀장으로서 ‘4대강사업 반대운동’ 현장에서 회원참여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활동을 펼쳤고 ‘환경연합 1만 회원확대캠페인’ 팀장으로 활동했다. 2009년에는 희망제작소 활동가로 이직해 2년간 ‘완주마을공동체사업’을 진행했다. 
 
그가 제주 ‘강정’을 만나 평화운동가로 나선 건 2011년 도법스님이 좌장으로 있는 <생명평화결사>의 순례팀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다. 2011년 3월 1일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현장이었던 제주 강정마을에서 생명평화순례를 마친 순례단이 뭍으로 돌아갔다. 그는 강정에 남기를 택했다. 그해 봄부터 마을공동체가 갈가리 찢기고 자연유산인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는 이듬해 봄을 거쳐 강정에 세워진 평화운동가들과 주민들의 공동체가 경찰에 침탈당하는 2015년 말까지 그는 강정에 거주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강정마을 평화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강정 순례자의 집’ 운영을 맡아 강정마을을 돕기 위해 오가는 이들을 먹이고 재웠다. 경찰에 두들겨 맞고 끌려갔다 풀려나와 다시 해군기지 건설을 막는 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일을 5년 동안 되풀이하면서 그는 현장의 싸움꾼으로 유명해졌다. 
 
2015년 12월 24일도 그런 날 가운데 하루였다.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자가 됐고 경찰은 강정 평화공동체를 ‘이젠 너희를 지켜줄 정치적 배경도 없다!’는 노골적인 태도로 침탈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저녁, 그는 주민과 동료들을 구타하는 경찰들을 패느라 아픈 손을 털며 제주 시내로 목적도 없이 나갔다. 가슴 가득한 분노를 풀 길 없어 무작정 걷던 그의 눈에 대한성공회 제주성당의 풍경이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어…!” 하고 신음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누구보다 든든한 강정 평화공동체의 벗들인 제주성당 교우들과 사제가 함께 어우러져 성탄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시작해 환경운동, 평화운동까지 타인과 세상을 위한 싸움에 몸을 던져 활동하면서 강퍅해져야 했던 그의 내면이 ‘세상을 위한 싸움과 성탄 전야 기쁨의 공존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풍경 앞에서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아, 이런 것이 회복이고 사랑이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나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나는 성직자가 돼야겠구나!”
 
성직자가 되겠다는 그에게 신부님들이 물었다. “성직을 평화운동의 수단으로 삼을 생각인가?” 경고를 담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그는 전북 김제의 지평선이 있는 고향마을을 떠올렸다. 그를 업고 어둠 깊은 새벽길을 걸어 새벽예배를 보러 다니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새삼 자신이 모태 신앙인임을 자각한 그는 질문을 한 신부님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답했다. ‘제게 성직은 소명이지 수단이 아니며 평화를 위한 활동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 모두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삶과 평화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디딤돌로 쓰소서

 
“늘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를 삶과 평화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디딤돌로 써주세요!” 
 
지난 7월 7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감사성찬례를 집전하는 박용성신부 Ⓒ애은성당
 
강정마을 주민공동체가 해군기지를 둘러싼 찬반 분열로 갈등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그의 사목활동 목표는 ‘지역공동체가 일상의 평화와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마을공동체가 해체돼 거주군락으로 전락한 오늘 우리 시대의 마을들이 사랑의 율법 안에서 일상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돕기 위해 그는 먼저 애은성당을 지역사회 소통과 상호부조의 공간으로 재축성했다. 이제 그 공간에는 성당 교우들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 다른 종교 목회자들, 지역 사회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지역의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 그는 자기 세례명 그대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바르나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초 박 신부는 강정마을에 가서 성찬례를 집전했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 천주교 신부님들도 참석한 마을예배에서 그는 ‘아시아의 평화와 일상의 회복’을 주제로 강론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강정은 그에게 십자가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제주에 ‘아시아 평화공동체 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그의 일생의 비전은 강정을 우리 시대 십자가에서 평화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소원이자 소임이다. 돌아가는 길, 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은 그에게 환경연합 회원과 활동가들에게 전할 말을 물었다. 그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말로 화답했다. ‘아멘.’
 
“환경연합에서 활동하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깊어지는 생태감수성의 개화를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올바른 관계성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활동가들입니다.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합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사진 / 이성수 기자 yegam@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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