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회화나무 故 김태영을 추모하며

 

# 엄마

 
일제시대, 일곱 살 어린 소녀는 노동자였다. 공부가 하고 싶었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말 공장에 들어가 생계를 도와야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소녀는 틈나는 대로 한글과 한자를 익히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열여덟에 결혼해 첫 딸을 낳았다. 시댁도 살림이 어려웠다. 결혼 후에도 공장을 계속 다니며 시댁과 친정까지 돌봐야 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녀는 부모 손을 놓친 어린 남매를 입양했다. 더 어려운 이들을 향해 내미는 손길을 가진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녀는 입양한 자식들을 부처님 가르침대로 키웠다. ‘남에게 해 되는 짓은 하지 말고 살아라, 남의 목숨도 내 것만큼 귀히 여기고 살아라’ 가르쳤다.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 
 
“얘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르친다. 내 머리 속엔 그거밖엔 없었어. 애들 둘을 다 대학꺼정 보냈지. 태영이도 임상병리 2년 나오고 미생물학 4년 마치고 태완이도 법대 나오고. 애들 가르친 거는 내가 소원을 풀었어. 가르치느라 공장 다니고 장사도 이런 거 저런 거 안 해본 거 없이 다 했지.”
 
 

# 딸

 
태영, 그녀가 가슴으로 낳은 딸은 어머니에게 배웠을 것이다. 생명을 귀히 여기고, 나와 무관한 인연이라도 마음에 품어 전심으로 돕는 것, 아니 자신을 바쳐 베푸는 삶을. 태영은 성장해 임상병리사가 되었다. 태영은 성실하고 존경받는 직장인이었고 자신을 입양해 헌신적으로 키우고 가르친 어머니에게는 효성 지극한 딸이었다. 
 
“태영이가 어찌나 사근사근한지 인정이 많아. 워낙 사교성도 좋고 싹싹해서 그 애 밉다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 참 영리하고 따뜻하고 친구들한테도 그렇고 이웃사람들한테도 그렇고 하나 버릴 게 없는 아이였어. 늘 베풀기만 했지.”
 
태영은 어머니에게 배운 부처의 가르침을 방생을 통해 실천했다. “방생은 원래 한 달에 한 번 하면 된다고 하던데 동생은 매일 했어요. 집 앞에 바다가 있거든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광안리 해수욕장도 있고요. 꽤 오래도록 방생을 그렇게 하는지 몰랐어요.”
 
처음엔 엄마와 오빠 모르게 방생을 했다. 엄마가 알게 된 것은 동네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나도 모르게 방생을 해왔더라고. 여기 동네사람들이 보니까 딸내미가 자꾸 바다에 나가드라 이카는기라, 그래 알았지.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방생하러 가더라고. 아무리 말려도 그걸 기어이 하러가. 그래야 지 마음이 편하다고. 시장에서 물고기를 사갖고 바다에 풀어 주고 왔는데 나중에는 온 데 다니며 방생을 했지. 그러다 감포 앞바다까지 가서… 거서 방생하다가 파도에 휩쓸렸어. 아침에 다녀온다 하고 나가갖곤 간단 말 한마디 못하고 갔어. 내가 그 애 갈 때 말 한마디 못 듣고 보낸 게….”
 
태영은 급여의 많은 부분을 방생에 썼다. 태영의 방생은 독특했다. 자주 절에 다녔지만 절에서 한 달에 한 번 행사용으로 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방생도 산업이 된 시대에 태영은 업자들에게 방생용 물고기를 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수족관에 갇힌 우럭, 농어, 돔, 병어, 쥐치, 광어처럼 사람 입에 산채로 썰려 들어가는 바닷물고기들을 샀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놓아주었다. 
 
태영은 그런 방생이 진짜 방생이라고 믿었다. 입의 즐거움을 위해 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 태영은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대를 실천했다. 
 
“몬하게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와 그라는지 내는 알 수가 없어.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하라고 내버려뒀어.”
 
오빠도 동생의 방생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이 소중한 거라고 하고, 생명을 살리는 게 큰 공덕 쌓는 거라고도 하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동생이 방생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 갑작스런 죽음

 
2014년 2월 13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태영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불국사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인사였다. 태영은 돌아오지 못했다. 
 
“작년에 눈이 많이 왔잖아요. 그날 파도가 되게 높이 쳤더라고요. 혼자 나가 방생하다가 파도에 휩쓸렸나 봐요. 경찰에서 연락이 와서 알았어요.”
 
“태영이가 다른 말은 다 잘 들어도 그거 하나는 엄마 말을 안 들었어. 절에 간다고 나갔는데. 근데 그 날씨에 거기까지 가서 방생을 했다니 어째 그랬단 말이고!”
 
상상해본다. 그날 태영은 불국사에 들렀다가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감포행 버스를 탔을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즐비한 횟집의 물고기들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산소공급기에 의존한 채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물고기들이 태영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고기들을 놓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하나의 관계망 안에서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한쪽이 불행하면 나머지도 불행하다는 것을 태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물고기를 사 들고 바다로 향했을 것이다.
 
태영은 휘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생명을 놓아주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놓쳐버렸다. 태영다운 죽음이었다. 태영은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다가 삶을 마감했다.
 
 

# 기부, 거룩한!

 
태영의 사후, 보험회사에서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당신의 딸이, 당신의 여동생이 거액의 사망보험을 들었다고. 그 보험금은 가족이 아니라 종교단체와 환경단체에 기부되도록 고인이 지정해두었다고. 가난한 가족들은 태영만큼 거룩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 딸의 결정을 존중한 것이다. 단체들에 기부된 기부금은 총 3억. 환경운동연합에 태영은 1억원을 기부했다.
 
“처음엔 저도 의아했어요. 종교단체에 기부한 거는 그런가 보다 했거든요. 근데 환경운동연합은 뭐할라꼬 저길 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동생이 환경운동연합이 이런저런 환경 지키는 일을 많이 하는 데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아 그래서 환경연합에 기부를 했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는 태영이의 기부로 그런 환경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딸이 기부한 단체니까 “그저 믿는다!”고 했다. 딸의 기부가 값지게 쓰일 수 있도록 잘 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 추정 그리고 추모

 
환경운동연합의 회원도 아니었고 어떤 환경사안에 참여해 활동한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환경운동연합을 특정해 후원했을까? 태영은 생전에 오라비에게 환경운동연합이 해인사 골프장 반대운동을 열심히 하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해인사에 자주 갔던 그녀가 92년부터 시작되어 약 10년이나 지속되었던 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을 목격했을 것이다.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이끌어내며 전국적으로 알려내고 그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책위의 중심에 환경운동연합이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고리다. 비록 추정이지만 어머니에게 배운 육화된 불교 철학과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환경운동연합이 태영과 만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태영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한 의연한 생활인이 자신의 삶의 철학에 충실하게 살다가 자신의 실천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단체로 환경운동연합을 선택했다. 우리는 그 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뜻이 ‘세상의 버려진 생명을 지키고 살리라!’는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환경을 살려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그녀의 유산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 앞에 회화나무로 우뚝 선 고 김태영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김은숙 환경운동연합 시민참여팀 간사 kes4858@kfem.or.kr ,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사진제공 고 김태영 유족

 

제작년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