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월호] 우종수,우두성씨 부자의 지리산 사랑

지리산의 사람들
우종수·우두성 씨 부자의 지리산 사랑 이야기
“이제 산으로 돌아가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월간환경운동 1997년 5월호]

◈ 조태진 / 본지 광주전남 주재기자

학병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던 한 조선인 애국학생이 일경을 피해 살던
금강산에서 산과 교감하는 법을 배우고 다시 지리산에 깃들어 살면서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어 내고 지리산 지키기에 평생을 쏟았다.
오늘날 남한 생태계의 보고로 살아남은 지리산에서는 그 산의
야생동물들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늙어 버린 청년의 아들이 뛰고 있다.
지리산을 지켜 가는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본으로 유학을 왔던 대개의 조선 유학생들은 학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본
군의 총알받이로 끌려가는 것을 거부했던 남원 출신의 청년 우종수는 동경의 대동
아전문대 사학과에 재학중이던 44년 2월초 1백30여명의 재일 유학생과 함께 일경
에 체포되었다.
신주꾸에 소재한 조선장학회관에 유학생들을 가둬 놓은 일경들은 보국의 기회를
주겠다며 징용행과 고향행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고향행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지도할 것이라 했고 일경의 말뜻을 그대로 믿을 수 없던
선생은 징용행을 선택했다.
징용을 선택한 30여명에겐 사흘간의 말미를 줄 테니 하숙집과 짐을 정리하고 모일
것을 명령했고 고향행을 선택한 학생들은 관부연락선에 태워 총독부에 인계할 것
이라며 그 자리에서 즉각 가두었다.
조선장학회관을 나온 선생은 곰곰이 생각했다. 징용으로 끌려갔다간 다시 살아서
돌아 올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탈출을 결심한 즉시 나흘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탈출구를 물색하기로 했다. 하숙집으로 돌아와 정리한 짐을 고향으로 부
치고 동경역으로 발을 옮겼다.
당시 상황은 지금처럼 돈만 내면 표를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징용에 끌려
갈 하루를 남겨 둔 사흘째 되는 날 어렵게 표를 구한 선생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다시 경부선 기차를 탔지만 도망 다니는 몸으로 고향을 갈 순
없었다. 서울로 향한 선생은 동경에서부터 활동했던 독립운동 지하조직 <조선민주
협동당>의 지도자인 김종백 선생을 찾아갔다.

일경에 쫓기는 애국청년을
품어 준 금강산
국제정세 흐름을 잘 알고 있던 김종백 선생은 조선유학생을 모아 놓고 “조선은
곧 해방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조국을 재건할 인재들을 보존하고 조국독립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백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조선민주협동당>의 청년 1백30여명은 경기도
포천 백운산에 아지트를 정하고 그 곳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자그만치 1백30여
명의 청장년들이 모이다 보니 잠자리와 먹을거리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 가
지가 아니였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조직원들을 분산시키는 대안
이 제시됐고 장소물색에 지방조직을 담당하고 있던 우 선생과 최 선생이란 분이
뽑혀 44년 5월에 강원도로 떠난다. 강원도에 도착하고 보니 철도공사를 하기 위한
벌목작업이 한창이어서 은신처로는 불가능했다. 다시 발길을 옮겨 금강산으로 향
했다.
금강산에는 미쯔비시가 운영하는 중석광산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는 중석을 제련해
포탄을 보급하는 대형 탄광으로 광부들만 2천5백여명에 달했다. 마침 이곳에는 친
구형이 덕대(광구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기에 친구형을 만나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자 이를 쾌히 응낙하였고 함께 왔던 조직원 최씨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일본이 전쟁에 불리해지는 낌새는 챘으나 45년에 일본이 망할 것이란 예측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깊은 산중의 은신처와 탄광과 같은 곳의
취업도 필요했던 협동당원들은 백운산 아지트에서 45년 1월 체포되고 만다.
조선민주협동당원들을 고문하여 우 선생의 거처를 알아낸, 경기도경 고등계 형사
들은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급파된다. 선생이 숨어 지내던 금강산 신
풍리 관할은 회양경찰서였다.
회양경찰서 직원으로서 우 선생과 친하게 지내던 조선인 순사 이씨는 즉각 신풍리
주재소에서 60리 떨어진 참샘이로 달려와 경기도경 형사가 온다는 정보를 제공했
다. 우 선생은 백운산 동지들이 생각났다. 다급해진 선생은 광산화약고를 지키며
살림을 사는 한씨네 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한씨에게 자신이 징용을 피해 도망
다니는 학병이란 처지를 설명하고 몸을 감추었다.
우 선생을 놓쳐 독이 오른 형사들이 다음날 아침, 2천여명의 광원을 풀어 금강산
일대를 샅샅이 뒤질 것이라는 소식을 가져온 한씨가 겁먹은 얼굴로 살벌한 분위기
를 전해 주었다. 금강산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고등계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참
샘이 찻점을 지나야 했다. 한씨 집을 나선 선생은 등골이 서린 긴장감으로 참샘이
찻점을 지나치는데 하필이면 찻점에서 기르던 개가 꼬리를 치며 선생에게 다가오
는 것이였다. 손짓으로 개를 불러 쓰다듬어 안은 채 식은 땀에 흠뻑 젖어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구사일생이었다.
선생은 다시 외금강, 거진, 동해안으로 빠져나와 진부령을 지나 백담사 반대편 미
시령을 넘어 연하동 골짜기 산판에 들어가 그해 겨울을 지냈다. 그리고 8월 19일
에 해방사실을 금강산 신대리에서 알게 되어 9월 20일경 3.8선을 넘어 철원을 거
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와 동지들의 소식을 들어보니, 그토록 존경하던 김종백 선생 등 협동
당 동지 3명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더구나 조국해방의 뜻을
새기며 운명을 같이했던 동지들은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도 전에 좌로 우로 나뉘어
져 뿔뿔이 갈라선 상태였다.

지리산에 이정표를 달아 주다
선생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신간회 사건으로 7년의 옥고를 치른 당숙
우일모 씨가 ‘혼란스런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교육사업을 해보자’는 권유에 따
라 당숙과 함께 대성고를 세우기 위해 대전에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교육사업은
6,25가 터지면서 무산되고 선생 또한 난리를 피해 처가인 구례로 내려온다.
“금강산은 산이 아니라 예술품일세.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산일 뿐 아니라 세계
에서도 비교할 산이 없을 정도로 명산이야. 서구라파 사람들이 장차 미래의 관광
지 즉, 인류에게 평화와 꿈과 희망을 심어 줄 관광지를 선정하면서 협곡은 그랜드
캐년, 폭포는 브라질의 이구와수 폭포, 산으로는 금강산을 꼽았네.”
금강산에서 애국청년의 뜨거운 삶을 살았던 선생은, 조국의 비참한 현실 덕분에
명산의 품에 안겨 2년여를 살았다. 그리고, 또 동족의 비극으로 인해 민족의 영산
인 지리산 자락에 안겨 평생을 살게 된다.
서산대사가 말하기를 “지리산은 장엄한 반면 수려함이 적고, 금강산은 수려한 반
면 장엄함이 적다”라고 아쉬워 했다던가, 장엄한 지리산의 품안인 구례로 내려온
선생은 51년부터 58년까지 7년간을 구례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54년 지리산 토벌작전이 끝난 다음해인 55년 <지리산악회>의 모태인 <연화반>
(然樺班 - 자연을 뜻하는 고어)을 10여명의 구례중 선생을 주축으로 하여 결성한
다. 57년에는 지리산 종주등반으로 천왕봉을 올랐으나 처참한 역사로 인한 흔적이
남은 산중에서 사람의 뼈와 짐승 뼈를 발견하기도 하고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사람
구경은 할 수 없었고, 산악지도도 등산로도 없었다.
60년대를 맞은 연화반 회원들은 산악지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리산 약도 2천매
를 작성하여 등산객에게 무료로 나누어주고 등산로를 개발하면서 이정표 달기를
시도한다. 전쟁난리를 겪은 당시는 물자가 귀한 때라 자전거 뒷바퀴에 달린 철을
자르고 펴서, 페인트 칠을 입혀 글씨를 쓴 이정표는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에게 생
명의 이정표가 된다.
당시만 해도 지리산을 등반하기 위해선 경찰서의 입산허가증이 필요했고, 외지에
서 온 산악인들은 등산지도 등과 함께 연화반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 <지리산악
회>는 등산로를 최초로 내기 시작하면서 피아골, 뱀사골, 칠성계곡, 한신계곡 등을
등산코스로 개발하기도 하였다.

남벌 막기 위해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67년 설악제를 다녀온 <연화반> 회원들은 명칭을 <지리산악회>로 바꾸고 본격적
인 자연보호운동을 시작하면서 군인들의 마구잡이 벌목과 부딪치기 시작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이라 불리울 정도로 세도가 막강했던 서남지구 전투
사령관 신상묵 장군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마천지역 국유림 수백만주를 베어
내는 횡포를 저질렀는데 아예, 산에 제재소까지 지어 놓고 가구 등에 사용하기 쉬
운 잣나무와 전나무를 무수히 베어 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지리산이 벌거숭이로 변할 것을 우려한 선생은 산악인이었던
서울대 이숭녕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또 이숭녕 박사는 경무대를 방문하여 신
상묵 장군의 도벌을 지적하고 이를 즉각 중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도벌은
중지되었다.
또 68년경에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중앙정보부의 힘을 얻은 퇴역 장성이 하
루에 GMC 트럭 30대 ~ 50대 가량의 무단 벌목한 나무를 싣고 사라지곤 했다. 권
력의 힘에 의해 지리산이 민둥산이 되어감을 안타까워 하던 선생은, 이화여대의
김현규 교수로부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함부로 벌목할 수 없다는 조언을 듣는
다.
국립공원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 <지리산악회> 회원은 지리산을 지키기
위해 국립공원유치 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구례군민을 모아 놓고 관광개발의 필요
성과 자연보호의 절박성을 강조하는 등 노력을 다한 결과 구례군민이 참여하는〈
국립공원 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구민의 열화같은 지지와 성원은 당시 1만2천
가구 가운데 극빈 세대 2천가구를 뺀 1만가구가 각 호당 10원씩 각출하는 모금운
동이 펼쳐져 10만원(현재 화폐환산가치 1천만원 가량)의 활동비가 모아졌다. 군민,
반장, 면장, 군수에 이르기까지 혼연일치된 결과물이었다.
또 두번째 모금운동에서는 20원씩을 거출하면서 끈질긴 노력 끝에 67년 3월에 「
국립공원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67년 11월에 국내 제1호로 지리산이 국립공원
으로 지정 받았다. 지정에 따라 1백20여명의 교수와 학자들이 동원되어 식물 등 8
개 분야에 걸쳐 생태계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보다 힘이 앞선 시대였다. 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나 어떤 퇴역장성
이 천은사 쪽 나무를 베어먹기 위해 중앙정보부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불법을 합
법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몇 백만채의 벌목허가가 아무런 하자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개탄한 우 선생은 <지리산악회>의 명의로 정부에 고발장을 접수
시켰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음에도 이런 일이 저질러져선 안된다며 부당성을 지적한 고발
장은 결국, 도지사의 결재만 남았던 벌목허가를 취소시키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우 선생에 의해 벌목허가가 취소된 것을 안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선생을 방문하여
협박을 한다. 당시 선생은 공화당 구례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까닭에 위기를
넘긴다. 또, 박정희 군정이 치산녹화를 강조하던 때라 곤욕을 치르지는 않게 되었
고, 그때 지켜 낸 소나무들은 지금 노송으로 건재하여 지리산의 바람과 구름과 함
께 살고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노고단에 통신중대 2개중대가 상주하면서 벌목이 횡행한다.
나라가 형편없을 때였지만 군인들의 연료를 못 대줄 정도는 아니였으나, 위에서부
터 아래까지 온통 썩은 판이라 연료는 팔아먹고 베어 낸 나무로 연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급품을 싣고 온 군용차량들이 돌아가면서 술값용으로 나
무를 한차씩 싣고 나가기를 2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아무리 군인의 힘을 위세를 떨칠 때였지만 지리산을 제 살처럼 아끼던 우 선생은
노고단 산장관리인이던 함태식 씨에게 보급차량이 오면 연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급차량이 다니는 곳의 검문을 맡았던 광의지서를 방문하여 “만약 도벌
차량을 잡지 않으면 당신들을 고발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때 베어 낸
나무를 한 차 싣고 버젓이 달려오던 보급차량을 잡아 경찰서로 넘겼다. 그러자 며
칠 후 도벌차량 부대의 최고 상관인 준장이 대령과 중령을 대동하고 선생에게 찾
아와 사죄를 하게 된다. 선생은 고발 취소조건으로 벌목을 중지한다는 약속을 받
아 냈고 군인들의 무분별한 벌목행위는 중단되었다.

지리산 십경을 아십니까
“지리산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찌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몇 마디 말로 배울 수 있겠는가만 평생을 지리산에 바
친 우종수 선생이기에 우문을 드렸더니 선생은 노화상처럼 웃으신다. 그리고 천천
히 지리산의 십경을 일러주신다.
훈풍과 더불어 남쪽바다에서 운무가 파도처럼 밀려와, 수려장엄한 노고단 중턱 산
허리를 감돌아 흐르면 연연히 운해만리 구름바다를 이루고 저 멀리 운평선상에 높
은 봉만 점점 섬이 되어 다도해의 절경을 이루는 ‘노고운해(老姑雲海)’를 선생
은 지리산 십경(十景) 중에 첫번째로 꼽았다. 또 가을이 오면 울창한 수림의 바다
를 오색단풍으로 곱게 수놓아 산과 계곡과 사람마저 붉게 물들이는’피아골 단풍
’을 두번째로 꼽았다.
세번째로 꼽은 ‘반야낙조(般若落照)’에 대해선 “서녘하늘 끝 오색구름밭에 휘
황찬란한 황금빛 오로라의 극광을 발산하며 대오체념 하듯 회색빛 저녁노을 속에
고요히 사라져가는 반야봉 낙조의 그 처연한 모습이라” 평하면서 감탄했고, 네번
째로 꼽은 ‘벽소명월(碧宵明月)’에 대해선 “벱실령 산정 위에 정이 어린 달이
뜨면, 공산명월은 마치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푸르고, 밀립의 월광은 유
기(幽氣)마저 감돌아 더욱 현묘한 유택의 경지로 이끄는 태고처럼 고요한 벽소령
달밤의 정적!”이라면서 적막강산의 운취를 돋구어 준다고 했다.
다섯번째는 해발 1천6백m의 황량한 고원의 눈부신 5월의 태양 아래 수만그루에서
피는 철쭉꽃의 ‘세석철쭉’을 꼽았고, 여섯번째로는 장엄단안에서 비류직하 삼천
척 쏟아지는 비폭 줄기엔 냉엄한 오색의 무지개 백옥같은 비수에 서리고, 협곡을
진동하는 폭음의 위압에 심혼이 얼어붙어 간장이 싸늘해지는 ‘불일폭포’의 장관
을 꼽았다.
일곱째로는 “세석에서 천왕봉으로 힘차게 뻗어 나간 지리산 크고 높은 산줄기,
고색창연 이끼 낀 기암괴석 사이사이엔 향기 높은 온갖 기화묘초가 철따라 만발하
고, 산새들도 소림 노수 가지에서 한가로이 노래하는 ‘연하봉 선경(烟霞峰 仙境)
’이 무아오도의 경지에 이끈다 했으며, 여덟번째로, 장엄한 원색의 거대한 태양이
진홍빛 극광을 눈부시게 발하며 위대한 탄생을 고하는 웅위장엄한 해발 1천9백
15m의 ‘천왕봉 일출’을 오직, 경이와 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고 평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급류가 절벽을 뚫고 장장 20km에 달하는 깊은 협곡을
이루며 임천강으로 용류하는 남한의 삼대계곡 중의 하나인 ‘칠선계곡’을 아홉번
째로, 진안, 장수에서 수원을 이루고 흐르는 섬진강은 기름진 남녘땅 열두 골들의
아름다운 산야를 곱게 누비며, 지리산 서남으로 감돌아 겨레의 애환을 청류에 싣
고, 남해바다 그리며 머나먼 삼백리 하동포구를 향하여 줄기차게 흐르는 ‘섬진청
류(蟾津淸流)’를 열번째로 꼽았다.
십승지를 손꼽아 일러주고 선생의 눈길은 다시 지리산으로 향한다. 그 눈길 닿는
거기, 말없이 지리산이 서 있다.

뜨거운 지리산 사랑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남원이 고향인 선생의 연세는 이른 일곱, 금강산의 수려함에 취해 젊은 날을 보냈
고 지리산의 장엄함에 묻혀 한 생애를 살았다. 그리고,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못
잊어 지난 92년에 『금강산 가이드』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선생은 지난 80년 10월 13일 강화도 마니산에서 열린 전국산악인대회에서 우리나
라에서 8번째로 산악인공로상을 받았고 95년에는 구례군민상을 받았다. 산과 함께
살아온 사랑을 어찌 상으로 값하랴만 자신의 인생을 탓하지 않는 것만도 고맙다고
말한다.
우 선생은 67년부터 95년까지 자그만치 30여년을 <지리산악회> 회장에 장기집권
(?) 하면서 쏟은 지리산 사랑을 이제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이젠 몸도 여의치
않아서 산을 오르지는 못하고 소일거리로 감나무 농장을 10년째 가꾸면서 옛 추억
을 되새길 뿐이다. 이름 없는 산정벌판을 다니면서 선생이 지어 준 ‘연하천’, ‘
연하굴’, ‘삼도봉’, ‘총각샘’, ‘노루목’, ‘덕평봉’, ‘법계사 천황샘’, ‘
임걸샘’ 등의 이름과 지리산 설화들을 떠 올려 본다.
또, 63년경 지리산 허리를 자른 듯이 뚫린 군작전도로가 마음 아프게 가슴에 남고,
등산하던 중학생이 얼어죽은 것을 계기로, 조난지에서 희생당한 산악인의 영혼을
빌어 주며 노고단에서 임걸령 쪽으로 가는 능선에 세운 비목령도 생각난다.
“그래, 산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되지…”
우종수 선생이 연로하여 더 이상 지리산에 오르지 못하게 된 대신, 선생의 둘째
아들인 우두성(45) 씨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고 있다. 우두성
씨는 <지리산생태보존협의회>의 회장이다.
지난 93년 결성된 <지리산생태보존협의회>는 밀렵꾼에 의해 멸종돼 가는 반달가
슴곰을 비롯하여 지리산 야생 동물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올가미 제거
작업 등을 해내면서 자연스럽게 출발했다. 93년에는 구례군청과 함께 꿩방사, 새집
달아주기 운동을 전개했다. 현재 회원들은 70여명인데 지리산을 날고 기는 이들
회원들은 주로 수렵인, 고로쇠 채취인, 약초 채취인 등 모두 지리산과 운명을 같이
해 온 사람들이다.
사냥꾼에서 생태보존 운동가로 변신한 우두성 회장, 지난 80년부터 취미 삼아 사
냥을 시작하면서 꿩, 노루, 멧돼지 사냥을 즐겼으나 밀렵이 너무 성행하는 것을 보
고 이러다간 지리산 생태계가 멸종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또한,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배운 지리산에 대한 사랑이 발동되어 운동가로 변신했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살아 있다
“지리산은 국내 유일하게 인간이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
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러한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생태보호지역’으로 지정되
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손은 미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보존협의회는 야생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지리산 야생동물 보호운동을 전개하면서 야생동물의 이동통로
와 밀렵군의 현황파악 등의 정보수집으로 광범위한 지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겠
다고 한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반달곰살리기 운동을 전개하던 3개월간, 우두성 회장을 비
롯한 회원들은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배설물 등을 통해 반달가슴곰의 생
존가능성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활동비 3천여만원은 우회장 주머니에서 지출되
었다고 회원이 귀띔한다. 그러나, 우회장은 지리산에서 지은 신세를 갚았다고 훌훌
털며 이야기 한다.
<지리산생태보존협의회>를 세계 수준의 자연생태계 보호운동단체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우두성씨, 그래서 자연보호운동의 역사에 나름대로 자취를 남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따라 배우면서 지리산에서 한 평생을 다하고자 한
다.
“아버님은 지리산의 등산로 등을 만들면서 산의 정면을 보았다면 저는 감춰진 측
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리산의 깊은 내면인 계곡, 골짜기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내력을 찾아보며 아버지가 살아왔듯이 저 또한 지리산에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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