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엄한로는 지독한 술꾼이다.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술을 떠올리곤 했다. 그 다음에 그의 선량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나 또한 그가 유명한 술꾼이라는 이야기를 그를 만나기 전부터 들어서 그와 처음 술을 하게 되었을 때, 감개가 무량하기까지 했다. 7년쯤 전,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감개가 무량했던 까닭은 나 또한 술이라면 주선(酒仙)의 경지까지는 몰라도, 청탁불문에 두주불사였기 때문이다. 역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걸풍의, 박씨 성을 가진 시인 한 사람이 그때 합석했던 것 같다.
술에 대한 이야기, 일하고 있는 잡지에 관한 이야기, 술 먹다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어떤 편집장 이야기, 모두들 아는 사람들 이야기, 간혹은 셋 중에서 한 사람만 아는 이야기…… 따위로 주거니받거니 했다. 그러면서 술집을 옮기기를 서너 차례, 마침내 새벽녘에는 형편없이 유치한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제꼈던 것 같다. 
“높은 산은 높고, 낮은 산은 낮다아.”
“낮은 산은 낮고, 높은 산은 높다아.”
그렇게 엄한로와 된통 한 차례 술을 마신 이래, 세월과 함께 하는 일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그의 소식만 간간히 들었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이튿날 저물녘쯤 정신이 좀 들어서 지난 밤의 그의 술버릇을 생각해보니, 아주 깨끗한 사람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상급의 술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것은 만취해서 술집을 옮길 때, 그가 자꾸만 차도로 나가려고 했다는 점과 간신히 차를 잡아탄 뒤에는 자꾸만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했다는 점이 떠올랐다. 그 점은 정말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술버릇이었다. 언젠가 만나면 엄한로에게도 그 이야기를 힘 주어 강조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리고 세월이 막 흘러서 광화문의 한 횡단보도에서 박시인을 만난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래 잘 지내쇼?”
“이런 아이엠에프 시대에 잘 지낼 리가 있겠소.”
“술은 여전하구먼요.”
“나라가 부도가 날 지경인데 나같은 술꾼이야 술이나 마시지 뭐하겠소.”
“그래도 그러면 되겠소?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야지요.”
“남들이 호경기일 때에도 난 불경기였고, 남들이 불경기일 때도 난 여전히 불경기니 어떻게 생각하면 내 처지가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 모르겠소. 하여지간에 세상은 으시시한 화택(火宅)이라는 말이 실감나오……. 그래 최형은 어떻소?”
“아이엠에프야 금붙이도 모아서 되수출하는 국민들이니 어쨌거나 극복하겠지요. 문제는 극복 이후지요. 몇 년 후 이 떡을 칠 시대를 지난 뒤에 다시 흥청망청 아이엠에프 이전처럼 산다면 증말 가망이 없는 나라가 아니겠소. 난 되레 그게 걱정되오.”
“맞는 말이오. 그간 우리 모두 미쳤었지요. 드립다 만들어대고 드립다 버려대고, 정신없이 잘난 척하고 살아들 왔죠. 우리 이런 시든 상추 같은 이야기들 그만 하고 어데 가서 한 잔 더 걸칩시다.”
시인은 함경도가 고향인 부친의 억양을 흉내내고 있었다.
박시인과 나는 근처의 똥그랑땡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똥그랑땡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간장에 양파를 안주삼아 서둘러 소주잔을 나누었다. 여전히 이야기는 아이엠에프 한파에 이웃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나라 망치고도 책임지는 놈은 한 놈도 없고, 금리가 높아져 가진 녀석들은 뒤에서 소리죽여 웃는다면서요? 스벌놈의 세상”
“열심히 일한 내가 왜 감봉을 당해야 한단 말이오?”
“이 친구 감봉겉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 엄동설한에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어쩌구 하는 ‘IMF 푸념들’이 똥그랑땡 집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푸념이 아니라 어떤 소리들은 절규처럼 들렸다. 어떤 술꾼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기도 했다.
“엄한로 그 친군 좀 봤소? 여전히 술에 빠져 사는지?”
화제를 돌릴 겸 박시인과 오래 전에 함께 마셨던 엄한로 이야기를 꺼냈다. 엄한로 이름이 나오자 침울하게 있던 박시인이 갑자기 이상한 벌레에 물린 사람처럼 큰소리로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우하하. 엄한로, 그 친구 말이오?”
워낙 박시인이 발작적으로 웃어제끼자 술을 마시던 사람들 모두 일제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목구멍에 소주를 털어넣던 사람은 소주잔을 소리나게 급하게 탁자에 떨군 뒤에 우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라 꼴이 그지꼴이 됐다고 이 친구가 새해부텀 술을 끊었다지 않겠소. 그래 술 끊기로 작심한 날, 결혼한 지 15년만에 처음으로 술을 안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지 뭐겠소.”
“우와 세상에 우째 그런 일이?”
“우하핫! 그러니 엄한로 집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소. 결혼한 이래 단 하루도 술을 안 마신 날이 없던 사람이 말이오. 그래서 너무나 놀라고 감격스러워서 엄한로 집사람이 술상을 차려줬다지 뭐요.”
“쿠쿠쿡…….”
“술 끊으려고 맨정신으로 들어왔더니 이번엔 마누라가 방해하네, 그렇담 내일부터 끊어야지, 어쩌구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던 엄한로이 나중엔 취하지 않았겠소. 술을 자꾸 달라고 했겠지요.”
“하마……, 그렇겠지요.”
“우하핫, 이 친구, 나중엔 많이 취한 모양이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선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더니, 비틀비틀 하면서 넥타이를 매지 않았겠소!”
“아니 웬 넥타이를? 아내가 술상을 차려줬다면서요?”
“내 얘길 마저 들어보라니깐요……. 그래, 아내가 물었겠죠. 아니 당신 이 밤중에 웬 넥타이에요? 하고 말이오. 그러자 우리 술꾼 엄한로가 뭐라 한 줄 아오?”
“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제 그만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답디다. 우헤헤헷!”
박시인이 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나도 박시인만큼 웃었지만, 엄한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IMF 시대의 술꾼들도 소리내서 쿡쿡쿡, 웃은 일은 참 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작가 최성각은 강릉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창작집 『잠자는 불』 엽편소설집 『택시드라이버』를 펴냈다. 폐기물문제와 관련된 시민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생명환경분과장,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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