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 43] 여름날의 기억

 
내게 나이가 두 살 많은 언니가 있다.
 
요즘 건강이 나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얼굴 반이 굳어서 입에서 침이 흐르고 눈이 잘 감기지 않고 통증도 심한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편찮으셔 가족 누구도 언니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내 나이 6살 때, 언니를 처음 만났다.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형편 때문에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처음 언니를 만난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우리 집 첫째 딸인 줄 알고 살았던 나는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집으로 오던 날 보따리에 할아버지가 사주신 비싼 인형과 장난감이 들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정순이 엄마’에서 ‘윤경이 엄마’로 바꿔 부르는 게 몹시 화가 나 언니에게 심술을 부렸다. 인형 머리도 동강 자르고 언니 용돈도 훔쳐서 쌍쌍바도 사 먹었다. 예쁜 샌들 끈도 잘라 놓고 일기장도 훔쳐봤다.(한글을 몰라 그나마 다행) 
 
늘 조금 무심하게 대한 언니, 부처 반 토막 같은 언니, 내 언니라 좀 미안한 언니.
 
언니가 아프니까 옛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친구들이 고무줄놀이 못 한다고 날 따돌렸는데 언니만이 내게 유일한 고무줄 연습 상대가 되어 주었다. 검은 고무줄을 나무에 묶고 1단부터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고무줄을 묶으며 땀을 뻘뻘 흘리던 언니, 모래알이 들어간 내 샌들을 탈탈 털어주던 언니, 그때까지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은 언니.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에 지지 않으려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러주던 언니의 목덜미로 흐르던 찐득한 땀이 흘렀다.
 
아무리 연습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나의 고무줄 실력에 포기할 만도 한데 언니는 계속 같은 자리에 서서 노래를 불러줬다. 나를 위해 애쓰던 언니가 순간 가여웠다. 일요일 아침마다 보던 만화영화 ‘소공녀’처럼 가여워 보였다. 심술 맞은 꼬마의 변덕이었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은 진심으로 언니가 가여웠다.
 
딱 한 번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매미 울음에 묻혀 언니 귀에 닿지 않았던 그해 여름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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