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 65] 독자들에게

 
강연 때마다 가장 힘든 건 강연자료 즉 ppt 파일을 만드는 거다. 프로그램 다루는 것도 미숙하고 때마다 같은 자료를 쓰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강박 때문에 매번 끙끙댄다.
 
쌓여있는 강연자료를 들춰본다. 강연의 특성상 밑도 끝도 없는 잘난 척과 확신에 찬 말투 때문에 끝나면 부끄러움이 한 바가지였다. 책을 세상에 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속 편할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라 시작한 강연이었는데, 돌아보니 책임감 말고 다른 것도 있었다. 푸념과 넋두리 어디쯤 희망 비슷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도 사니까, 당신들도 힘내시라고. 뭐 그런 다독임. 
 
독자들에게 줄 편지를 썼다. 곧 있을 강연 자리에서 읽을 예정이다. ppt 같은 익숙하지 않은 자료보다 마음 편하다. 이 편지가 다독임이 되어주길 바란다.
 
가끔 독자들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되돌려줄 수 없는 걸 너무 많이 받았구나.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주어진 시간을 부정하던 사람에서, 가는 날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모두 덕분이라고.
동네 책방에서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실체를 느낄 수 없었던 독자들.
유명한 작가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그런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쓸데없는 각오를 다지면서, 그림책이라는 산을 높이가 아니라 부피와 온도로 체감하는 요즘입니다. 
중국집 유리문에 중국식 냉면을 개시한다는 메모와 다가올 여름에는 글을 쓰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비스듬히 기운 걸 느낍니다.
자폐가 있는 딸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이어줄 그림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바람에 나도 모르게 약속이란 걸 해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출판사 계약서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서명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시작이 있어 오늘 다시 산책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그냥 가만히 앉아 꾸물거리는 벌레를 보는 게 좋았습니다. 나는 한참 들여다본 것 같은데 벌레들은 '고작'에 해당하는 짧은 거리를 이동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고작 얼마간의 거리와 거리를 지나 끝내 목표지점에 다다르는 작은 생명체의 노력이 기특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온 생을 걸고 전력을 다해 꿈틀거리는 벌레를 보느라, 나는 '찰나'가 짧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의 일부이자 전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건강 때문에 직접 독자를 만나는 일이 어려워졌지만, 책으로 아쉬우면 달래봅니다.
이제 막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달리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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