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환경 피해자들의 목소리 “NO MORE VICTIMS”

지난 10월 28~30일 제17회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대회 마지막 날 아시아 각지에서 온 환경 및 직업성 피해자들은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피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캠페인을 열고 ‘기업 살인’을 멈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사는길 이성수
 
ANROEV(Asian Network for the Rights of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Victims)는 아시아 직업환경피해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라는 명칭의 단체입니다. 지난 1993년 각각 수백 명의 산재피해자들이 희생된 태국의 케이더 완구 공장(Kader Toy Factory) 화재, 그리고 중국의 질리 인형 공장(Zhili Doll Factory) 화재를 겪으면서, 아시아 각국에서 비슷한 조건에 처한 산재피해자들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첫 모임이 지난 1999년 중국 마카오에서 있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모임의 성격이 산재피해자뿐만 아니라 직업병과 환경병 피해자들을 아우르는 대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네트워크 결성 20주년을 맞아 17번째 대회를 지난 10월 서울에서 열었습니다. 
 
일본에서 온 시노부 사카모토 씨. 올해 63세인 그는 태어날 때부터 미나마타병을 앓아온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다. 1972년 스웨덴에서 열린 스톡홀롬 유엔인간환경회의에 참석해 수은중독의 위험성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2013년 유엔수은협약이 제정될 때도 국제회의에 참석해 온몸으로 증언했다. 2019년 ANROEV에 참석한 그는 다시 한 번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알렸다  ⓒ2019 ANROEV 준비사무국
 
ANROEV는 공장 창문과 비상구 등이 닫힌 상태에서 화재에 희생된 노동자들을 기리면서 시작되었지만, 이 같은 전형적인 산재를 비롯하여 진폐, 중금속 중독, 이황화탄소 중독 등의 직업병, 그리고 일본 미나마타와 인도 보팔에서 발생한 환경재해 등은 그 배경이 산업 활동에서 비롯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발생하는 피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위험들은 18세기 산업혁명 이래 이미 잘 알려진 위험들임에도 단순히 사업주의 조치나 정부의 선처에 기대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똑같은 형태의 재해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지적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1995년 삼풍 붕괴 사고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에서는 라나 플라자 건물이 붕괴하면서 무려 1000명이 넘는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일하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한혜경 씨 ⓒ함께사는길 이성수
 
한편 뻔히 알 수 있더라도 당사자가 나서지 않는 한, 이렇게 반복되는 위험의 재발을 방지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설사 잘 몰랐던 위험들이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그 위험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은 피해 당사자 자신들입니다. 결국 피해자 내지는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산재, 직업병, 그리고 환경재해와 환경병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ANROEV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은 ANROEV의 취지를 이어받아 서울에서 개최된 2019년 대회에서는, 피해자들이 단순히 피해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피해의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을 지목하는 역할, 피해의 대안을 강구하는데 있어 피해자가 살아가야 하는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그 구체적 대책을 검토하는 역할, 그리고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도 적극적으로 사회와 연대하고 삶을 만들어 나가는 역할 등을 포함하여, 임파워된 피해자 내지는 피해를 극복한 생존자로서의 역할들을 담당할 수 있도록, 어떻게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정리하고자 하였습니다.
 
석면암 피해자 일본 다나카 가나미 ⓒ2019 ANROEV 준비사무국
 
2019년 서울대회 개회식에서는 최근 한국에서 목격되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제기하는 ‘김용균 재단’,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그리고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미나마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다른 여러 산재, 직업병, 그리고 환경병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회 정리 세션에서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임파워된 생존자로서의 역할을 담기 위해,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는 재해와 그로 인한 사망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살인에 기여한 근본원인들을 밝히고 그 책임을 제대로 물어야 한다는 점,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생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적극적 역할이 주어져야 하며, 그를 위한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 등에 대한 논의를 2019년 대회의 “서울 선언”으로 담도록 하였습니다. 
 
 
국내외 참가자들이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를 찾아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항의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함께사는길 이성수
 
그러나 이러한 피해자들의 권리는 그들만의 주장으로 그들만의 목소리로서만 담아질 수 없습니다. 실제 ANROEV 2019에서 다루었던, 이주노동의 문제, 과로사의 문제, 대기오염의 문제, 공단주변 지역의 문제, 그리고 생활용품 오염의 문제 등은 단순히 직업과 환경 중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주에 따른 국적, 벤처라고 하는 특수기업, 나이에 따라 그 민감성이 다른 세대, 공단 지정 등 님비현상을 제기할 수 있/없는 사회경제적 지위, 그리고 공식적인 알권리 없이는 위험물질을 판단할 수 없는 교육 등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느 시점, 어느 곳에 살던 누구나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국적, 종사산업, 세대, 계급, 그리고 교육 등에 따른 인권 훼손의 문제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 같이 연대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피해는 기술과 위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차별의 문제이며, 연대가 없는 한 그 사회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ANROEV 네트워크의 교훈입니다. 
 
글 /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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