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140] 우리는 왜 박쥐를 싫어하고 판다를 좋아할까

 
“소년은, 황혼녘이면 박쥐 떼가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는 산골, 산골 중의 산골에서 자랐다.”
 
이것은 최근에 다른 원고에서 내가 쓴 문장이다. 애초에 이 문장은 ‘소년은 산골 마을 출신이다’였다. 이 소년을 캐릭터화 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적 조건들은 이런 거였다. 유년 시절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괴기할 것, 초자연적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분위기일 것! 그래서 동원된 것이 바로 박쥐였다. 박쥐를 “가죽 날개 달린 쥐새끼”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어느 부분이 오류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도 비슷하다. “박쥐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믿었고, 사람의 머리에 의도적으로 들러붙어 피를 빨아 먹고 광견병을 옮기는 사악한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오해의 동물원』 때문에 나는 새로운 문장으로 고쳐 써야 한다. 문장 하나를 고치는 일은 실상 별 게 아닌데, 박쥐에 대한 만연한 오해까지를 모두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해가 깊다. 그 오해의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오래되었고, 대륙을 막론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까지 하다. 우선 박쥐는 앞을 매우 잘 보며(앞을 보지 못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전체 박쥐 중에서 불과 3종만이 뱀파이어의 피를 타고 났고(날아다니는 해로운 야생동물이자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오해도 만연하다), 해충을 잡아먹고, 바나나나 아보카도, 용설란 등의 열대 식물의 주요 꽃가루 전달자이며, 인간보다 세 배나 뛰어난 색채감각을 소유한 박쥐도 있고, 정밀한 반향 위치 측정 시스템을 갖춘 동물이다. 그러니까 박쥐의 눈을 파내거나 귀에 시멘트를 들이 부은 인간의 잔혹사를 반성적인 태도로 기억하기로 하자. 
 
억울한 동물이 있는 만큼, 유난히 더 사랑받는 동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테면, 판다. 현대 외교 무대의 깜짝 게스트로 등극하기도 했으며, 중국 관광산업의 역군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판다는, 알려진 것과 달리 (다른 동물들에게도 같은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충분히 거칠고 폭력적이다. 그렇지만 책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판다가 가진 이미지는 결코 더러워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판다가 해가 없고 무력한 존재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귀여움의 힘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정치의 선두 주자로 여우같은 곰이라고 말이다. 
 
귀여워 죽을 것 같아서 사랑받는 또 다른 사례로 펭귄만한 게 또 없다. “판다에서도 그랬듯이, 펭귄의 불안정하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마치 갓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를 돌봐주고 싶다는 내재된 열망을 자극했다. 더불어 벼랑 끝에서 인고의 시간을 버티는 근성과 어릿광대처럼 타고난 신체적 희극성은 얼마든지 의인화되어 스타덤에 오를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귀여운 생명체의 감동적인 ‘휴머니티’를 잘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의 가족주의적 가치관에 부합했던 다큐멘터리 『펭귄: 위대한 모험』의 전설은 말하자면, 펭귄에게로 나아가기보다는 펭귄이라는 깃발을 뒤흔드는 인간 욕망의 어떤 기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인간의 어떤 관찰과 기록은 동물사가 아니라 인간사를 박제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는 점을 조금은 차가운 태도로 돌아보기로 하자. 판다는 그냥 판다고, 펭귄은 그냥 펭귄이다!
 
“진화는 논리도 없고 설명한 단서조차 없는, 말도 안 되게 이상한 생물을 빚어냄으로써 훌륭한 장난을 친다. 새가 되고 싶은 박쥐, 물고기가 되고 싶은 펭귄처럼 말이다. (…) 동물은 자신의 비밀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저자 루시 쿡의 이 이야기가, 뱀장어는 진흙에서 자연발생했다고 주장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꼼꼼한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길 바랄 따름이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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