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142] 나무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세상으로

자연과생태, 우종영 지음
 
어느 해인가 마당의 커다란 동백나무에 잔뜩 벌레가 생겼다. 수령이 오랜 동백이었던지라,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보다 이 집에서 오래 산 나무였던지라,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뚝심 있게 버티고 서 있는 어떤 존재라고만 생각했지, 병충해가 일고 나뭇잎이 시들고, 이내 그해 겨울에 꽃이 피지 않게 되는 그런 쓸쓸한 풍경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충격이었다. 커다란 동백이 앓게 된 병이 충격이었고, 병든 나무를 상상해 본 적 없는 나란 인간의 이기심이 충격이었다. 내게 동백은, 동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무들은 그저 어떤 풍경이거나 정물인데, 이렇게 얘기할 때 나의 풍경이나 정물에는 생명력 같은 걸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생로병사와는 무관한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동백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크게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동백의 생애에 무심하고 무관심한,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바깥으로만 나도는 가장 같은 부류다.
 
그러다가 올해, 유난히 꽃을 예쁘게 피운 동백에 감탄하는 중이다. 문득 지난해에는 어떠했나, 골몰해보았는데, 내가 참으로 잔인한 부류인 것이, 해가 들지 않는 자리에서 웃자란 동백을 탓하며 왜 꽃을 피우지 않느냐고 타박을 했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메모를 한 적도 있었고, 친구들에게 푸념도 한 탓에 증거는 차고 넘치는 정도다. 올해 유난히 아름답고 아찔하게 피어난 동백을 바라보며 거의 매일 감탄을 하는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에 어느 정도의 한심함이 어려 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는 와중이었으므로 『바림』 속의 유려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나는 조금 오래 허우적댔다. 1세대 나무의사라는 명칭부터 생경하였는데, 나무의사의 따뜻하고 집요한, 섬세하고 철학적인 관찰기록은 신비한 숲의 한 가운데로 가뿐하게 데려다 놓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시선. 
“친구를 사귀는 일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풍경이 말을 걸어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쁜 일상에서도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히 바라봐야 한다. 나무의 풍경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 아파 본 자의 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들어온다.” 
 
순진한 눈, 아파본 눈, 기다리는 눈. 그런 눈에 포착된 나무들은 또한 이런 가르침으로까지 나아간다. 
 
“만약 여러분 앞에 1,000년 된 나무가 있다면 대부분은 죽어 있고 올해나 작년에 태어난 세포들의 살아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과 동거하는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살아있는 것은 숨을 쉰다. 숨을 쉴 때마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만약에 나무의 모든 조직이 살아있다면 스스로 생산한 양분도 모자라 남의 것을 빼앗아 와야 할 것이다.”
 
죽은 나무와 살아있는 열매, 죽은 몸통과 새로 움트는 숨. 그러한 죽음과 생의 풍경이 나무에게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 어떠한 것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생존해간다는 사실을 『바림』을 읽기 전에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음을 고백해둔다. 나의 마당에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던 동백들 안에서 벌어졌던 생과 사 혹은 어떤 기다림과 결실은 그러므로 나는 끝내 알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용으로 나의 무심함을 견디는 동백의 진짜 내밀한 심경을 뒤늦게야 짐작만 할 밖에. 
 
“나무는 결핍이 있을 때 채우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휴식으로 바꾸며,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는 기회로 삼는다. 쫓기지도 허둥대지도 않으며 태연히 시간의 주인이 된다. 나무의 멈춤은 느림과 경계가 없다.”
 
바림이란,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감 먹인 붓을 대어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번짐이 필수다. 흐릿한데 그 안에서 깊이감을 살려낸다. 나무의사의 일은 그렇게 나무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세상으로 깊숙하게 번지는 그림쟁이의 일과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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