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148] 사찰숲은 그렇게 지켜진다

 
사찰이 울울창창한 숲의 깊숙한 곳 어디에 있다는 건, 불교가 산으로 가게 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게, 이미 엄청나게 마음의 위안이 된다. 절을 드나드는 일에 불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가릴 이유는 없다. 명산대찰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어서 이름난 산과 숲에 사찰이 없는 곳이 없으므로, 우리는 절에 가는 것과 숲에 가는 것을 애써 분리할 이유가 없다. 숲의 나이는 세대 따위에 예사로 넘어서고 시대도 가뿐하게 건넌다. 천년의 역사 앞에서 세대나 시대는 우스갯소리가 될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사찰숲은 존재 그 자체로 ‘수행’ 혹은 거의 모든 종류의 정신적인 행위를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다.
 
『송광사 사찰숲』의 저자이자 이른바 숲 박사 전영우는 국내 유일의 사찰 산림기록인 ‘조계산송광사사고’의 ‘산림부’를 통해서 조선시대 국가지정 산림의 지정과 관리와 운영 과정을 밝히고, 산림부의 가치 및 이를 만든 스님들의 혜안에 주목했다. 가람(절)이 천년을 지속하는 동안 시대별 산림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꼼꼼하게 살폈고, 조선시대 산림 정책들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특히 조선 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 광복 전후, 1960년대 그리고 현재로 이어지는 시대별 산림 관리의 역사는 흥미롭게 읽힌다. 이를 테면, 송광사 사찰숲 면적이 조금 줄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장안리 일대를 동국대에 무상양여했기 때문이고, 이후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주암댐 공사를 하면서 사찰숲 일부가 수몰된 탓도 있다. 울울창창 사찰숲은 고요하게 제 존재를 뽐내기만 하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매우 소란한 역사까지도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광복 이후에도 송광사의 산림은 변화가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한 공비들의 준동으로 사찰 산림의 일부가 작전상 제거되기도 했고,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도벌과 산판 사업으로 벌채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979년의 주암호 준공으로 몇몇 필지의 사찰 산림은 수몰되었고, 또 조계산 도립공원의 지정으로 대부분의 사찰숲이 공원 구역에 편입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송광사 소나무 숲이 솔잎흑파리에 의한 극심한 피해를 받기도 했다.” 
 
숲의 피해는 사회의 번성과 거의 같이 오기 마련이다. 송광사의 산림을 매년 땔감과 건축재로 소비한 양이 생장한 양보다 많아진 시기는 19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인구 증가와 산림자원 고갈 등의 문제로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600년 이상 송광사 산림이 감당해오던 공급 능력에 빨간 불이 들어왔던 것이다. 숲을 숲으로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옛날처럼’ 사는 거다. 이를 테면, 나무에 관하여 엄격할 것! 송광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산림을 관리하는 인원이 사찰을 운영하는 인원과 비슷할 만큼 산림 관리에 최선을 다했던 경험이 있고, 1960년대에는 도벌을 막고, 산불을 진화하고, 암장을 막으려고 스님들이 일상적으로 순산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숲은 그렇게 지켜진다. 
 
『송광사 사찰숲』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숲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읽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가 숲에 대해서 표현한 이런 정도의 알뜰함의 의미를 기억해둔다면, 숲의 이야기이든 나아가서는 환경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든 오래도록 아껴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산림 자원은 적절히 관리하면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광물자원이나 화석자원 등은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재생되지 않지만 수목은 벌채 후 나무를 심고 적정하게 육성하면 몇 십 년 후에는 다시 그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일정액의 원금(산림)을 은행(산)에 저축(자라게) 해두고 발생되는 이자(한 해의 생산량) 범위 내에서 사용(벌채하여 이용)하면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산림을 재생가능 자원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따지고 보면 숲에 대한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 그 자체 대한 은유인 모양이다. 그것은 숲에서 태어났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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