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170] 비극을 비극으로 덮어버린

 
주말에는 벚꽃을 보러 갈 생각이다. 이제 어떤 계절도 이상하지 않은 계절이 없고, 지난계절은 예상도 못한 한파와 폭설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고도 어쨌든 봄은 오고 있고, 꽃이 핀다. 속도를 보아하니 주말이 지나면 곧장 낙화 시즌으로 뒤바뀔 것 같다. 서울보다 몇 주 빠르지만 아무튼 제주의 벚꽃 스케줄은 이렇다. 지난해와 비교해 보건대, 한 주쯤 당겨진 것 같다. 그리고 지난해에도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올해 벚꽃이 일찍 피네! 봄이 점점 빨리 와서, 빨리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를 테면, 그걸 봄의 자살이라고 해야 할까. 
 
“녹지 않는 눈이 내린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7년째 겨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계절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뜻이다. 녹지 않으므로 그 눈은 소각해야만 한다. 방부제인 실리카겔을 꼭 닮은 눈이다. 센터에서 눈을 소각하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을 하는 중에 주인공 모루는 이모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모를 찾기 위한 단서는 오로지 ‘스노볼’ 뿐. 소설 속의 세상은 이상한 디스토피아다. 온통 흰 눈이 쌓여 있어서 아름답지만 “예쁘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의식도 갖고 있다. “거리의 온갖 쓰레기들, 테이크아웃 컵과 깨진 유리 조각, 담배꽁초, 죽은 시궁쥐, 제대로 닦이지 않은 일회용기 따위도 전부 눈 아래 묻혔다. 더러운 것은 눈송이가 다 감춰 버렸으므로, 거리는 언뜻 평화로워 보였다. 태우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눈 결정체는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일렁이는 물비늘처럼 이쪽저쪽으로 반짝였다.” 말하자면 비극을 비극으로 덮어버린 거다. 
 
그런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터무니없지 않다. 7년 동안 눈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이전에 없던 낯선 노동을 하는 것은 소설의 일. 벌써 두 해째 마스크를 생필품으로 비축해두고, 만남보다는 격리와 분리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현실의 일. 어느 쪽이 더 비극인지 겨룰 이유가 없다. 눈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방독면과 방호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의 시대는 그리 먼 곳에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사라진 이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 모루가 친구 이월과 함께 이모를 찾아나서는 행선지가 불분명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정말 네 이모가 언젠가 돌아온다면, 이 세상에 아직 있다면 말이야. 달리다 보면 마주치지 않을까? 나는 도저히,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이제 못하겠어.” 이 여행은 탈주가 아니다. 세계로부터의 탈주라기보다는 세계 속으로의 질주이다.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에서 또 다른 불확실성으로의 진입이다.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성 말이다. 재난이 일상이 되는 세상에서는 재난만큼 공평하게 불안하고 무서운 게 없다. 모두에게 닥친 재난은 커다란 불만 없이 오늘을 견디게 한다. 대신에 다른 내일을 꿈꾸는 일도 손쉽게 포기하고 만다. 함께 주저앉은 누군가를 일으켜 달리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용기에 대한 화답을 우리는 연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말에는 벚꽃을 보러 갈 생각이다. 아름다운 것은 어쨌든 아름답다. 화사한 꽃무더기 아래에서,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볼 생각이다. 자살하는 계절들 속에서도 어쨌든 우리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어떻게든 함께 달리면서 더 많은 계절을 연명하기를 꿈이라도 꾸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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