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35] 뜨거워서 아픈 지구의 기록

뜨거워서 아픈 지구.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뜨거워서 아픈 지역'을 두루 다닌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뜨거워서 아프다는 저 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뜨거워서 아픈 그 구체적인 통증도 짐작해 보았다. 지구온난화를 근심하는 여타의 책들이 그러하듯 『북극곰은 걷고 싶다』에도 역시 수치와 그래프가 등장하지만, 뜨거워서 아프다는 표현은 그 어떤 그래프보다 더 근육을 뻐근하게 만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딱 그 만큼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곰은 걷고 싶다』를 북극곰부터 펭귄 그리고 명태를 뒤쫓는 여행서! 로 읽든, 환경서적으로 읽든 한 가지는 변함없다. 불우하고 불안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술이라는 점, 그러므로 뭐가 됐든 불편한 팩트들과의 조우일 수밖에 없다는 점. 

현재의 온난화 속도로 추정해보건대, 최종시한은 2050년 무렵이다. 그 무렵이면 북극곰이 이제 멸종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멸종하는 것들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증언이다. 살아 있는 것들이 그렇게 생존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반면, 새롭게 도래하는 풍요로움과 영화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캐나다 처칠 시장 마이크 스펜스의 말대로 “다음 경제 호황은 캐나다 북극권에서 일어날” 수도 있겠다. 이 지역에 대자본이 몰려드는 것 역시 그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닌가. 현재 속도대로 온난화가 진행되기만 한다면 일 년에 고작 넉 달 부동기를 기록하는 허드슨만은 여덟 달에서 열 달까지도 얼지 않을 수 있다. 북극곰의 생존에는 위협적이지만 러시아와 캐나다를 잇는 북서항로의 중간 기지이자 미국과 캐나다 중부의 거대한 항구가 되도록 주문 받은 ‘아크틱 브리지’의 성공에는 절대적인 호조건이다. 북극곰의 수도 처칠이 무역항의 새로운 거점이 되는 상황의 손익계산서는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 
슬프지만 진실인 어떤 얘기가 있다. 이를 테면, 알래스카는 유전 개발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믿음이 알래스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진짜처럼 떠돈다는 것. 알래스카의 존재 가치가 유전에 있다는 것은 미국정부가 그 땅을 사들이는 순간부터 제대로 공식화되었는데, 실제로 알래스카에서도 유전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이 상당하다고 한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는 풍요로움을, 북극 생태계에는 소멸과 파괴로 드러날 것이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이 북극곰이거나 북극고래만이 아니라, 투발루와 같은 하나의 섬, 하나의 나라일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투발루로 검색을 해보면, 연관검색어로는 지구온난화가 등록돼 있고, 투발루를 다루는 대부분의 웹문서들은 이제 곧 사라질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위기든 과장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정도를 걷어내고 보아도 투발루를 말할 때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을 제외하고 그 완벽한 아름다움과 완벽한 평화로움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위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에 대한 거짓이고 왜곡이 된다. 

뉴질랜드가 투발루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기후문제 때문이 아니지만, 투발루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떠나는 대부분의 이유는 투발루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래의 투발루는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환경의 위기를 말할 때, 그 어떤 비유도 그저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묘사가 된다. 미래 없는 투발루도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기후 난민’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삶은 기후 재난에 어떤 개입도 한 적이 없으나, 치명적인 책임을 떠안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그들의 삶으로 취급 받고 있다. 기후 난민은 그저 사회! 적 개념일 뿐, 투발루를 떠난 그들은 이주노동자이거나 불법체류자의 현실을 산다. “투발루는 현재 속도대로라면 이번 세기 안에 살기가 불가능한 산호더미가 되고 만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투발루 정부는 국토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비운의 날이 해제할 수 없는 시한폭탄처럼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비운의 그날이 지나면 투발루 국민들은 국적 없는 디아스포라로 세계를 떠돌고 말 것인가.”

쉴 곳 없는 북극곰, 살 곳 없는 투발루 사람들뿐인가. 더 이상 고성 명태축제에는 고성에서 건져 올린 명태가 등장하지 않는다. 부산의 냉동창고에서 운반돼 해동된 것들, 그러니까 러시아산이거나 일본산 명태들이 고성 명태축제의 술자리에 오른다. 2000년대 초반부터 명태는 오호츠크 해 연안에서 남향회귀하지 않고 있다. 봄뿐 아니라 가을에도 자라는 소나무, 해가 갈수록 꽃을 일찍 터뜨리는 벚나무, 꽃샘추위가 사라져 번식력이 좋아진 비둘기들, 경기도 남양주에서 열리는 열대과일 구아바…. 사라지는 것들과 계절을 거스르는 것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북극곰은 걷고 싶다』는 북극곰에서 시작해 명태 이야기로 끝을 낸다. 이 여행 혹은 이 환경보고서는 선동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화법이 걷고 싶은 북극곰과 살고 싶은 투발루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하게 고심하게 만든다. 그 고심은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도시의 삶을 포기할 수도, 자본주의 질서에 꼿꼿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의 고심들은 한 조각 얼음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북극곰과 닮기도 했다. 모두들 뜨거워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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