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71] 우리 안 우리 밖에서 서로를 보다

[에코텍스트 71] 우리 안 우리 밖에서 서로를 보다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ppilir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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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림 글, 이유정 그림,

1만2000원


바람처럼 초원을 달리는 동물, 치타. 

네가 젖먹이동물 가운데 가장 빠르다며?

한 시간에 백 킬로미터 속도로 달릴 수 있다니, 멋지다.


글쎄, 난 잘 모르겠어. 그렇게 달려 보지 못했거든. 

『서로를 보다』의 도입은 달려보지 못한 치타에서 시작한다. 치타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다. 좌절당한 다른 동물들의 이야기가 어이진다. 치타로 시작한 이 책의 마지막 동물은 사람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가장 크게 좌절당한, 아니 스스로를 좌절시킨 동물은 인간인 셈이다. 

아이들에게 권하는 대부분의 그림책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보다』 역시 쉽고 단순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읽기에 쉽고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렇지만 그 역도 읽기에 쉽지만 그렇게 살기엔 쉽지 않으며 텍스트화된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메시지가 실어 나르는 철학적 질문은 무겁다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권하는 동시에 어른들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초원을 내달리는 치타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과 철창 안에 갇힌 치타의 드라마를 각각 생각해 보았다. 

어느 쪽을 상상하는 게 더 쉬운 일일까.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네가 젖먹이동물 가운데 가장 빠르다며?”, “글쎄, 난 잘 모르겠어. 그렇게 달려보지 못했거든.” 질문과 대답 사이의 그 공백을 메우는 일 정도는 떠맡아야 한다. 달리는 것을 본성으로 삼는 존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버리는 종류의 가혹한 드라마. 혹은 더 이상은 바바리양이 뛰어넘을 바위산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상상, 어두운 밤 날갯짓 소리도 없이 먹이를 사냥하던 올빼미가 어찌하여 고요히 주저앉아 있는지에 대한 고찰 같은 것도 좋다. 

초원을 빠르게 가르던 치타가 결국에는 자기의 야생성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 갇히고 결국에는 본래의 질주본능마저 망각했음을 고백하기까지 그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고백하는 자 치타가 아니라 포기하게 만든 자 인간이다. 바위산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바바리양은 그저 속수무책이었을 게다. 날지 못하는 쇠홍학, 나무 대신에 쇠창살을 타는 긴팔원숭이, 파도를 타지 못하고 재롱을 연마하는 돌고래의 사연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조금씩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만, 결국 이렇게 수렴된다. 


바람처럼 달리지도, 해처럼 솟아오르지도

산 위로 바다 위로 뛰어오르지도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동물, 인간. 


너희 사람들은 아주 똑똑하다고 들었어.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이랑 

자연을 파괴하는 능력

모두 뛰어나다고. 


동물들이 서로를 본다. 


우리 안에서, 우리 밖에서. 


아이와 함께 읽어야 할 게 분명한 이 책은 마지막 표지를 덮을 때까지 부모를 난감하게 만든다. 우선 인간이 누리는 자유로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 것인가. 초원을 질주하는 치타보다 인간이 어떻게 더 자유로운지, 그 자유롭고 똑똑한 인간이 자기가 이해한 것을 왜 또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 파괴의 결과물들로 들어선 것들이 무엇들인지 일러주어야 한다. 동물원에서 게으르게 배를 깔고 누워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 사자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어른들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자연에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불필요한 것들이 재앙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어야 한다. 이해하는 능력과 파괴하는 능력이 공히 뛰어나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 비극을 들려주고, 그 비극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일이, 부모와 아이가 함께 자라는 풍경이 될 것이다. 

본문의 맨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건 콘도르다. 잉카 말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뜻하는 콘도르.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다. 그것을 상상하는 일이 곧 『서로를 보다』에 대한 진짜 책읽기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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