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대를 위하여] 깊은 밤 밥을 먹다가

깊은 밤 밥을 먹다가


박현철 편집 주간 parkhc@kfem.or.kr


퇴근이 늦었다. 찬 새벽 부풀어 오른 달을 보며 언덕길 걸어 연립주택 꼭대기층 계단을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끝 세워 올랐다. 어째서 현관문을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로 해서 잠든 아이 깰까 염려하도록 문을 냈는가, 주인집의 무신경에 사소한 억울함이 울대를 치지만 더 급한 건 통증처럼 밀려드는 허기다. 식구 모두 잠든 밤 등 켜기 편치 않아 더듬거리며 냉장고를 연다. 작년 김장김치는 아주 조금 남았는데 이제 그 마지막 한 통에 담긴 김치는 꺼낼 때부터 시다.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보온밥솥에 오래 담겨 누룽지처럼 딱딱해진 밥을 긁어 비빈다. 부엌 창밖으로 밤이 낮처럼 희다. 밥 한 술 떠 넣을 때 아이가 잠결에 부르는 것 같다. 방문을 열어 본다. 한겨울에도 살아남는 요즘 모기들 탓에 아직도 걷지 못한 모기장 안에 아이가 이불 다 차내고 제 어미 곁에서 큰 대자로 잔다. 다시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것은 검박한 평화인가, 부유한 슬픔인가? 

일상은 섞어찌개와도 같다. 시대는 진보이거나 퇴보이거나 한 방향은 아니다. 우리 사는 시대의 일상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머물러 안주하려는 힘이 뒤엉킨 시공이다. 뒤엉켜 섞였으므로 미래를 키우는 거름으로 발효할 수 있지만, 자칫 썩어 부패할 수도 있다. 그러한 시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세대는,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잘 발효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다음, ‘이 다음’이 가능하다. 자기를 바꿔 변화하지 못하면 독소를 내뿜으며 죽는다. 부패다. 부패의 독은 당대가 아니라 미래의 세대를 죽인다. 오직 발효된 거름만이 생명을 기른다. 당장 좋다고 화학비료를 논밭에 들이부었던 때가 있었다. 땅이 딱딱하게 죽어가기 시작한 지 오래 지나서야 우리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풀과 똥으로 거름 삼기 시작했다. 그들이 밭에 준 건 거름이 된 자기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그 농부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사회적 진화로서 변화를 선택하고 그러한 변화를 위해 자기를 삭여 발효하는 존재가 부모된 존재여야 한다. 자식 기르는 부모가 당장 벌이 좋다고 자식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 기르는 땅에 화학물질을 뿌리고, 그 땅에 물을 주는 江을 시멘트로 바르지는 못한다. 그건 발효가 아니라 부패의 자세다. 독을 키워 미구에 새끼를 죽이는 자세. 

달그락 달그락 물 조금 받아 아크릴 수세미로 그릇을 닦는다. 밥솥 옆에 쌀 씻어 담근 그릇 보인다. 흰 쌀에 좁쌀도 조금, 콩도 조금. 아침이면 흰 김을 내며 쌀이 익어 밥이 될 것이다. 그 밥을 잠 깬 아이가 새처럼 조잘거리며 쪼아 먹을 것이다. 내가 깊이 숨을 들이 쉬고 가슴을 펴본 것은 그 밥 기를 거름 되리라 그런 기도, 다짐이었다. 휘이잉 길게 바람이 와서 거실 창문에 부딪혀 울다 간다. 우리 시대가 발효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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