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아래서] 흙이 숨쉬는 도시 _ 곽병찬



언제부턴가 나는 도시를 걸으며 이런 부질없는 꿈을 꾼다. 내가 걷는 이 길은 폭신한 흙길이다. 봄이면 길 구석구석 민들레 질경이 따위가 자라고, 가을이면 들국화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 여러 풀들이 자라니 가끔씩 지렁이 민달팽이가 기어다니고 무당벌레가 날아다닌다. 나는 그 살아 있는 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서로를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며, 이들과의 평화가 곧 나와 세상의 평화라는 간단한 사실을 되새긴다. 그러면 느림의 여유와 풍요 속에서 나는 속도와 효율성의 주술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인도나 뒷골목 이면도로를 살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도 한 뼘 밖에 남아 있지 않고, 남산 북한산의 모습은 실종돼버린 콘크리트 벽 속에서 나의 이 꿈은 더욱 간절하다. 빗물 한 방울 스미지 못하는 죽은 길을 걷다보면 사람은 자동차 같은 기계를 닮아갈 것이니 나의 꿈은 더욱 절실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덮여 있는 도시의 땅은 숨을 쉬지 못한다. 가로수가 더 많아지고, 도심 소공원이 여기저기 조성되고, 빌딩 옆엔 녹지를 꾸미도록 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도시가 숨을 쉬기엔 너무도 작다. 몸집은 산만 한데 숨구멍은 바늘구멍만 하다. 생명이 시드는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건강할 리 없다.

물도 마시지 못한다. 도시에 내리는 비는 땅을 적시지 못하며 땅속으로 스미지 못한다. 스미고 스며 지하 깊은 곳을 흐르지 못한다. 빗물은 대기와 지표면의 오염물질을 씻어내느라 오염을 피할 수 없지만 땅속 깊은 곳으로 스미는 동안 청정한 본래 모습으로 정화된다. 그러나 도시의 비는 내리는 즉시 하천으로 흘러든다. 오염된 그 물은 강으로 직행한다. 지하수는 오염되고 줄어들고, 강은 범람과 갈증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효율성과 속도와 경쟁이 최고의 덕목인 이 도시에서 흙길의 완전한 회복을 꿈꾸지는 않는다. 아주 오랫동안 포장도로를 걸으면서 나의 꿈은 현실에 맞춰 작아졌다. 사람이 걷는 길들이 최소한 빗물만이라도 스밀 수 있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빗물이 스미는 소재로 포장한다면, 풀들은 그 억센 생명력으로 틈틈이 푸른 이파리를 피워낼 것이다. 스미기만 한다면 땅도 살고, 지하수도 살아나고, 강은 범람하는 폭군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유현함을 되찾을 것이다.

설마 우리의 도시가 이 정도의 꿈마저 비현실적이라고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산도 있고, 사람도 있고, 기술도 있다. 특히 행정 편의에 따라 그냥 버려지는 예산도 숱하다.

11월이면 각 구청은 슬슬 인도를 까 뒤집고, 뒷골목을 파내기 시작한다. 망가진 인도의 타일을 교체하고, 이면도로의 포장을 정비하고, 상하수도 따위를 보수한다는 게 명분이다. 그러나 타일은 멀쩡하고, 정비된 이면도로는 두세 번씩 파내고 덮기를 되풀이한다. 시민들의 성화가 빗발치지만, 이 정도 성화에 눈 하나 깜짝할 대한민국 공무원이 아니다. 남는 예산을 이월시키면 다음 해 예산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에 책정된 예산을 무조건 써야 한다.

바로 그 예산을 활용하면 도시의 땅은 살아날 것이다. 서너 해 뒤 빗물이 스미고, 숨을 쉬고 그리하여 풀들이 자라고 벌레가 기어다니는 그런 인도와 뒷골목으로 바뀔 것이다.

월정사는 지난 봄 월정사-상원사 간 비포장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자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땅과 풀과 미생물을 살릴 수 있는 포장 소재를 쓴다면 동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단은 예산이 두세 배 더 든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공무원은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리 없으니,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곽병찬 chankb@hani.co.kr
본지 편집자문위원,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제작년월: 

환경단체 소식

사이트 소개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뉴스&월간 환경잡지 입니다.

청소년 보호 정책

구독

구독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