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소유로부터의 자유


칼 맑스에 의하면 인간을 가장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물질로서 ‘인간은 외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까지도 물질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또 다른 의미의 물질중심적인 미신에 우리 사회는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7·80년대를 통해 산업고도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물질중심적인 사고 방식과 삶의 양식에 깊이 중독됐던 것이다. 오늘날 IMF 한파로 말해지는 경제위기는 물질중심적 사고에 젖어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진 탓에 필연적으로 자초한 결과이다. 이번 경제위기를 참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과 물질을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습득함으로써 물질환경을 복원시켜야 한다. 물질환경이 복원돼야 근본적으로 이번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번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근원적인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만 ‘극복’을 모색한다면, 우리의 불행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 참된 유물론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확고한 유신론자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는 참되고 진정한 의미의 유물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꼬만큼 물질환경을 잘 인식하고 물질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물질 그대로 인정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우주만물의 본질을 잘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의 가치와 유익함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결코 물질에 사로잡히는 법이 없었다. 그는 물질을 즐기면서도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물질 안에서도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통찰하고 있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아씨시의 이 ‘가난을 사랑한 성인’으로부터 물질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배울 수만 있다면, ‘IMF 한파’라 불리는 이번 경제위기뿐만이 아닌 물질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차원에서 보면, 물질은 단순한 물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물질은 신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적 차원 이상의 존재이다. 물질은 신과의 관계에서는 신적인 차원을 지니고,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는 인격적 차원을 지닌다. 만일 물질에 신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이 실재한다면, 물질은 물질적 차원만으로는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물질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물질 세계가 갖고 있는 이와 같은 ‘세계와 차원’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놀라운 차원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우주만물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계 앞에서 오만방자할 수도 없고, 이를 감히 착취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모든 물질 세계, 즉 창조물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신비이다. 모든 창조물에는 창조자인 하느님의 영이 깃들어 있다. 모든 우주만물, 즉 창조계에 하느님의 영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창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창조물은 신적 차원을 지닌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신비(Misterion), 또는 성사(Sacramentum)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물질환경은 신적 차원으로 그 지위가 격상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질을 제 위치로 올바르게 되돌려 놓았을 때 우리는 물질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물질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부당하게 물질을 한 쪽에 쌓아두고 독점하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물질의 독점적 소유’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꼬는 창조물의 신적 차원을 깊이 통찰하였다. 그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신의 현존을 체험하였다. 그는 신의 현존을 중심으로 모든 우주 만물과 형제적 관계를 맺었다. 만물은 그에게 ‘형제성’을 지니기 때문에 물질은 그에게 오면 인격적 차원으로 드높여졌다. 프란치스꼬는 생명이 있는 생물은 물론이거니와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게도 ‘형제자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프란치스꼬, 삶의 전문가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프란치스꼬를 ‘제2의 그리스도’ 라 부르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문제를 간파하고 있었고,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이론과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한 ‘삶의 전문가’였다. 
프란치스꼬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소유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소유로부터 악이 잉태되고 죄가 발생하며, 인간의 온갖 형태의 고통이 유래’된다. 따라서 모든 죄악과 불행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유하지 않는 것, ‘소유없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생을 통해 ‘소유없음’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꼬가 그렇게도 철저하게 추구했던 ‘소유없음’의 신비적 차원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유없음, 즉 ‘무소유’야말로 참된 소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소유하는 길은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놀랍게도 진리의 세계에서는 소유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이 ‘소유없음’의 역설을 일컬어 ‘소유없음의 신비’, ‘가난의 신비’라 한다. 프란치스꼬가 말하는 ‘가난’은 이러한 차원의 ‘소유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는 이 ‘가난’에 자신의 전 존재를 용해시켰다.
프란치스꼬가 매료되었던 이 ‘가난의 신비’는 자연의 질서 안에서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그 한 예가 소금물이다. 한 접시의 물을 소금 결정체 하나에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소금 결정체 하나가 접시물에 녹음으로써 그 결정체는 접시물을 소금물로 변화시킨다. 소금 결정체 하나가 녹아 없어지지 않고 결정체 하나로 남아 있는 한, 접시물은 소금물로 변화되지 않는다. 소금 결정체가 녹아 없어져야 소금물이 된다. 이 때 소금 결정체는 외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소금의 본질은 완전하게 소금물 속에 보존된다. 소금 결정체 하나와 접시물 사이에 일어나는 이 자연의 진리는 ‘무소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소금 결정체가 녹아 없어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란치스꼬가 말하는 소금의 ‘가난’이고, 소금은 이 가난을 통해 물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된다. 물론 소금의 이 ‘소유’는 물을 주체적으로 소유하고자 함으로써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하지 않음’, 즉 ‘가난’으로써 수동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소유를 포기할 때, 수동적으로 전체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가난의 신비인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이러한 가난의 신비를 통해 온 우주의 주인이 되고 온 우주를 참으로 소유하게 된다. 온 우주를 소유하되, 우주를 종속시키거나 파괴시키지 않고 온 우주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다. 온 우주를 손상시키거나 고갈시키지 않으나, 온 우주가 지니고 있는 온갖 풍요를 마음껏 누린다. 우주를 훼손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주 만물을 그의 형제와 자매로 드높여준다. 그는 그 유명한 ‘태양의 노래’에서 태양을 ‘형님’이라 불렀고, 달과 별을 ‘누나’로, 땅을 ‘어머니’라 불렀다. 그에게 있어서 바람, 공기, 구름, 맑은 날씨는 누나였고, 뜨거운 불과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자매가 되었다. 무생물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러했으니, 생물에 대한 그의 태도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는 길을 가다가도 구더기를 발견하면 밟지 않고 피해갔으며, 잡초도 함부로 뽑아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전기 작가들은 온갖 피조물들이 그에게 순종했고, 새들은 그의 설교를 알아 들었으며, 사나운 늑대마저도 프란치스꼬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순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피조물과 맺은 인격적 관계를 소개하는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질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
프란치스꼬 만큼 우주 만물 안에 담겨 있는 좋음을 마음껏 누린 사람이 있을까? 물질의 좋음은 프란치스꼬 이상으로 즐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우주 만물과 물질의 좋음을 마음껏 누리고 즐긴, 참으로 즐길 줄 아는 탁월한 유물론자였다. 그 비결은 ‘소유없음’, ‘가난’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물질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삶의 전문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IMF 경제위기에 당분간 너나할 것 없이 고통을 겪어내야 한다. 이 고통이 단순한 물질적 고통이나 물리적 고통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물질 안에 담겨 있는 참된 가치를 깨닫고 물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경제위기의 근원적 극복은 정치경제적 차원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신적, 인격적 차원으로 물질과 관계를 맺지않는 한, 우리를 괴롭히는 경제문제는 늘 우리 곁을 도사리면서 또다른 불행을 낳게 될 것이다.  
물질의 어려움에 직면해서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참된 유물론자가 되는 것이고, 참된 유물론자가 되는 길은, 프란치스꼬가 삶 전체를 바친 실천궁행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소유하는, ‘무소유의 실천’일 것이다.


여기 가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마침내 우주만물을 진정으로 소유한 부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꼬, 하늘의 새조차 감동한 자연친화의 생애를 통해 
‘청빈이란 신의 축복’임을 일깨워 준 그는 오늘날 카톨릭의 성인이다. 
‘IMF 한파’에 잔뜩 옹송그린 오늘의 우리 사회가 이 가난한 성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고 바오로 / 작은형제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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