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 말 못하는 것들의 이름으로

말 못하는 것들의 이름으로



지구
새해에는 지구보다 큰 눈으로 하나뿐인 지구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지구가 나이고
내가 지구이며 지구에 속한 모든 것들의 나이가 46억살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누가 나이를 묻
거든 올해 46억살이 되었다고 말하세요.


바람
새해에는 나를 발전에 마구 써 주시기 바랍니다. 풍력발전기를 많이 세워서 나도 쓸모가 있고 무
궁한 힘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나를 사용해도 사용료는 없습니다. 공
짭니다. 햇볕이 공짜이고 달빛이 공짜이듯이 나도 공짭니다.


지렁이
나는 이무기가 아닙니다. 용이 될 생각도 없어요. 나는 땅에서 지렁이로 살아갈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흙이 좀 많았으면 해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나가는 건 우리에게 자살이나 마찬가
지니까요.


도요새
우리도 새이지만 새들이 하늘에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발 붙일 곳이 없어요. 발 없는 새
라면 몰라도 발이 있는 한 우리도 발 닿을 곳이 있어야 하죠. 그리고 걸어다니면서 뭘 먹어야 우
리도 삽니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지면 우리는 새만금 갯벌에 내려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딴 데
로 가야겠죠. 새들을 추방하지 않는 나라로 갈 겁니다. 그렇지만 새만금 갯벌은 정든 곳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곳이죠. 2만명 정도의 어민들도 간척사
업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 그들도 우리 도요새의 슬픔을 알겠네요. 더 이상 방조
제 건설 따위는 집어치웠으면 좋겠어요. 쌀이 남아 돌아서 걱정인데, 농지 확보를 위해 간척 사
업을 한다고 하니 그 해괴한 논리를 우리 도요새인들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어새
도요새라는 출판사에서 우리 저어새에 관한 조그만 책이 나왔다는 걸 우리 저어새들은 모두 알
고 있습니다.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 부리는 숟가락처럼 생겼고, 세상에 숟가락은 무수히 널
려 있지만 우리 저어새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어 이제 700마리 정도 남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서해에서 알을 낳고 새끼들을 잘 키워 멸종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데, 사람들의 배려가 필요합니
다. 우리 저어새는 부리가 숟가락처럼 생겼지만 숟가락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숟가락은 알
을 낳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을 낳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어새 알에서는 어김없이 저어새가
나옵니다. 이건 놀라움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저어새 알에서 저어새가 그침없이 나올 수 있도록
저어새를 사랑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지구에 700마리 정도지만, 앞으로 7천마리, 아니 7만
마리로 불어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수달
경상북도 봉화에 사는 박원수라는 아저씨는 우리 수달들이 슬프면 따라서 우는 사람입니다. 사람
의 몸을 받았지만 우리 수달 보호를 위해 살고 계시는 분이죠. 새해에 수달을 대표해서 아름다
운 연하장 같은 걸 하나 보내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그냥 말로 대신합니다. 박원수 아저씨, 고맙
습니다. 우리 수달들이 대대로 아저씨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반달가슴곰
우리 가족은 아마도 저주받은 모양입니다. 가슴의 반달 무늬가 저주의 문양처럼 생각될 때도 있
어요. 밀렵꾼들은 돈에 눈이 멀어 우리를 잡으려고 쫓아다니고, 또 보신에 눈 먼 사람들은 우
리 가족의 쓸개와 발바닥을 먹으려 하니 사람이 무서워서 어디 살겠습니까. 지리산 깊은 곳에 은
둔하다시피 살고 있지만 마음이 늘 안 놓여요. 하늘이시여, 새해에는 곰을 숭상하던 이 민족이
우리를 보살필 수 있도록 이 땅에 선한 기운을 두루 내려주소서.


쉬리
우리는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쉬리예요. 쉬리지만 우리는 영화관이 아니라 동강에 사는 쉬리죠.
동강댐 건설 계획이 백지화 되어서 한때 좋아했는데, 요즘은 좀 괴롭습니다. 우리 친구 어름치들
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알 낳기도 힘들어졌고, 어디로 떠났으면 싶은데 마땅히 갈 곳도 없는 형
편이죠. 사람들은 사람밖에 모르는 존재들 같아요. 관광지 개발이다 도로 확장이다 해서 동강의
목을 서서히 조르고 있는데 참 어리석은 일이지요. 동강이 죽은 다음에 죽은 강을 보러 누가 오
겠습니까. 새해에는 동강 유역을 생태보전지구로 지정해서 사람들 발길이 뜸해졌으면 좋겠네요.
동강은 영화관이 아니니까요. 영화관은 사람이 북적거려야 살지만, 동강은 북적거리면 무너집니
다. 생태계가 와르르 무너져요.


섬진강
우리 흐름을 댐 건설로 막는다고 하던데.....글쎄요, 사람으로 치자면 혈관을 막아버리는 일 아
닙니까? 그리고 백년도 못 사는 사람들이 수명이 없이 흘러온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수자
원공사 사람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물을 주물러서 돈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요. 아시죠? 시
화호를 죽여놓고도 돈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씀이 없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수자원공사가 아
무 일도 안 했으면 좋겠네요. 그게 우리 소망입니다.



광우병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순한 짐승인데, 광우병만 생각하면 뿔이 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입니다. 우리 소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미쳐서 죽었습니까. 우리는 미치고 싶지 않
습니다. 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전혀 미치고 싶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미
친 소가 한 마리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밍크
내 가죽을 벗겨서 모피를 만드세요. 나는 피 흘리는 알몸으로 모피 패션쇼를 구경할 테니까요.



鰐魚
환경호르몬 얘긴데요, 민망한 얘기지만 우리 악어들의 생식기에 문제가 크게 생겼습니다. 그게
너무 작아진 거예요. 고둥들의 경우엔 성이 이상해지기도 했다지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자수가 크게 감소하는 추세라고 하더군요. 우리 악어들은 일회용 컵라면을 먹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소각장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악어
다운 생식기를 되찾아서 악어답게 살아야 하겠지요. 새해에는 환경호르몬에 대한 노이로제에서
벗어나 물가에서 게으른 낮잠을 실컷 자는 게 우리 꿈이랍니다.


고래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랍니다. 포유류죠.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젖먹이동물입니다. 고래사냥인가
하는 노래가 한국에 있다는데, 우리에겐 무서운 노래죠.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들이 제일 무섭습
니다. 일본인들은 생선회를 세계에 퍼뜨리기도 했지만, 우리 고래 잡는 데에도 무척 열을 올리거
든요. 우리는 생선이 될 수도 없고 생선회로 팔릴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는 젖먹이동물이거든요. 그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고래들이 뭍으로 돌아
가 살 때도 있을 거라는 걸 기대해 주세요. 우리는 한때 땅에서 살았었거든요. 그러니 바다에서
다시 뭍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때 인간과 고래가 서로 친하게 땅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지하수
땅 속의 물을 끌어내서 파는 물장수들이 있는데, 장사는 그렇다치고, 지금 땅 속이 심각합니다.
하늘에서 땅 속까지 이렇게 오염이 되어서야 자기정화의 장소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
리 물도 자정능력을 살려나가야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맑은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
이 되고 싶지 독약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 귀 담아 들어주세요. 새해에는 우리 맑아집시
다.


황소개구리
저희 황소개구리들은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실
수로 한국의 산하에 퍼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마치 우리에게 무슨 큰 죄가 있는 것처럼 군인들까
지 동원해 무슨 황소개구리 섬멸 작전처럼 마구 죽이고 때려잡는 것은 지나친 애국심이고 옹졸
한 텃세라고 생각합니다. 황소개구리에 무슨 나라가 있겠습니까. 그저 서식환경이 좋으면 불어나
기도 하고 안 좋으면 줄어들 따름이지요. 아무튼 저희 황소개구리들의 처지도 깊이 이해해 주시
기 바랍니다. 그리고 늪이나 저수지 같은 곳에서 저희 울음 소리를 들으시거든 돌멩이를 던지거
나 가래침을 뱉지 마시고 저희도 한국에 귀화한 양서류 정도로 어여삐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여치
구멍에 조그마한 공 넣는 놀이--골프를 위해 너무 많은 산들이 뭉개졌어요. 그리고 내가 갉아먹
을 풀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농약 친 잔디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골프는 사하라 사막 같은
데 가서 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복제 양
나는 불길해요. 복제된 머리 없는 개구리들, 유전자조작으로 터미네이터처럼 덩치가 커졌으나 여
전히 머리 없는 개구리들이 사막으로 펄쩍펄쩍 뛰어가는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이 내 새해의 소망
입니다.


다람쥐
강원도 고성에 사는 다람쥐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전을 통해 제가 개구리를 먹는
장면을 보고 어떻게 초식인 다람쥐가 개구리를 먹을 수 있냐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 듯한
데, 고성에 산불이 난 뒤로 배고픈 제가 개구리를 먹게 된 것이지 본래 개구리를 즐겨 먹는 것
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도토리나 밤알을 먹지 개구리나 두꺼
비 같은 양서류는 절대 먹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 산불을 내지 마시고, 불조심을 하
시고, 가을에는 도토리나 밤알을 다 주워가지 마시고 제가 먹을 것도 좀 남겨 두시기 바랍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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