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사육중인 돼지
나는 공장 같은 농장에서 살고 있는 ‘돼지’다. 사람들은 나를 ‘비육돈’이라 칭하며 열심히 살을 찌운다. 그들의 눈에 나는 생명이 아닌 고깃덩어리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세상
나는 태어난 지 20일 만에 엄마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엄마의 품에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때도 엄마의 몸은 자유롭지 못했다. 분만틀에 갇힌 엄마는 젖먹이는 기계마냥 누워서 수유만 할 뿐 꼼짝하지 못했다. 나를 낳는 출산의 고통 전까지 엄마는 좌우로 몸도 돌릴 수 없는 스톨에 갇혀 앉았다 일어섰다만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감내했다. 하지만 되풀이 되는 출산 속에서 평생 신체를 옥죄고 있어야 하는 엄마와 동료들은 운명의 굴레를 어쩌지 못했다.
엄마는 인공수정으로 강제 임신되어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나와 생이별 뒤 또다시 인공수정 당하여 스톨에서 장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 모를 나의 동생들은 엄마와 20일 만에 생이별을 또다시 반복하겠지. 이런 일이 2년 반 지속되어 ‘생산률’이 떨어지게 되면 엄마 돼지들 역시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비육돈인 나 역시 엄마와 헤어진 뒤 주어진 생을 견디고 있다. 빨리 살을 찌우려 하는 인간의 목적에 충실히 부합하고자 사료를 먹고, 또 먹는다. 몸이 아파도 티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개체들은 비육돈으로서의 자격도 없는 것인지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하기 일쑤이니까.
모든 수컷 아기돼지들은 거세를 당한다. 그것도 비의료자로부터 마취 없이 말이다. 수태지에게 나는 냄새가 고기의 품질을 떨어뜨리며 소비자의 불만을 사기 때문이란다. 나 역시 거세를 당하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염증이라도 얻게 되면 도태되고 마는 현실을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돼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건강해야만 한다.
공장식 축산의 신체 훼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장 같은 농장의 사육환경에서 꾹꾹 억눌러진 습성은 동료들의 이상행동을 부르곤 한다.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돼지들은 동료 돼지들을 공격하고 상처 입혔다. 이는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출하될 돼지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미연에 ‘예방’하고자 인간들은 대단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다른 돼지들을 공격할 수 있다며) 어린 돼지들의 송곳니를 미리 뽑았고 (다른 돼지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며) 돼지의 꼬리를 어릴 때 미리 잘라냈다.
먹고 빨리 살찌우기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사육되는 돼지. 전체 농가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풍경이다
푸른 초원을 노니는 돼지들의 이미지는 실제 사육환경과 무관한 거짓이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들은 초지에 나가본 적도 없고, 평생 따뜻한 햇볕과 바람을 쐬어본 적도 없다. 어두운 축사 안에서는 몸집을 불리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구조다. 폐쇄형 축사 안에서 이동은 자유롭지 않고 더더구나 스톨처럼 몸에 꽉 끼는 감금틀에 갇혀 있는 극한의 경우라면 몸을 좌우로 돌릴 수조차 없다. 딱딱한 바닥은 몸을 뉘기에도 불편하며 좁은 공간은 분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비위생적 환경이다.
우리 돼지는 쉬는 자리와 분변 자리를 분명히 가리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환경에 가두어 놓고선 더러운 동물이라는 오명마저 덧씌우고 말았다. 인간들이 모르는 아니 외면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우리가 고도의 지능을 가진 호기심 많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몇 가지 동작을 교육하는 일이 가능하며 우리는 뛰어난 장기기억을 가지고 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과 같은 기능을 하는 코로 흙을 파헤치며 주변을 탐색하고, 더운 여름엔 진흙목욕으로 스스로 몸을 식히고, 동료 돼지들과 다양하게 어울리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돼지들 본연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그런 우리 돼지에게 탐색할 거리가 전무한, 무료하고 단조로운 환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다. 모든 것이 박탈된 공장식 축산 속 돼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다. ‘사료를 먹고 빨리 살을 찌우는 것’
살처분 당하거나 살해 당하거나
우리가 사는 농장은 외관상으로도 공장과 흡사하며 밖에서는 돼지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40년간 국내 돼지의 총 마리수는 급증했지만 돼지 농가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다. 농가당 사육 마리 수 증대로 대량사육이 일반화 되었다는 얘기다. 대량사육 체제에서 우리는 물건과 다름없다. 공장의 모든 것은 경제성에 입각하여 돌아가며 우리는 생명이 아니라 수익 창출에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프거나 상품성이 떨어지면 농장에서 즉시 도태된다. 공장식 축산의 사육환경은 경제성 면에서 인간의 관리적 편의를 위한 것이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결코 배려하지 않는다.

돼지는 태어나서 6개월 살다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열악한 시설에서 죽어나가는 일도 속출한다. 지난여름에도 많은 수의 농장동물들이 폭염으로 폐사했으며 이번 겨울 축사 화재사고로 벌써 적잖은 돼지들이 불에 타 죽었다. 축사의 화재사고는 피해액 정도가 보도될 뿐 스톨에 갇힌 채 까맣게 타들어가야 했던 돼지들의 소리 없는 비명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며 재발방지 대책 역시 나오지 않는다. 구제역과 같은 가축전염병 발병 소식은 우리에겐 재앙이다. 살처분 대상으로 지정되면 동물의 고통 최소화에 대한 관리감독 없이 생매장 된다. 엄마돼지와 아기돼지들은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함께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공장식 축산의 돈사를 탈출하여 몇 개월간 자유를 만끽하며 야생의 생존에 성공한 동료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인간들은 이 돼지를 가만 놔두지 않고 포획했고 마취총에 맞은 돼지는 결국 이동 중 사망했다.
얼마 전 동물보호단체가 고발한 아기돼지 망치살해 사건은 또 어떤가. 2만 마리 넘는 돼지들을 사육하는 대형농장에서 멀쩡한 수십 마리 아기돼지들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하여 동물을 비인도적으로 ‘도태’ 시키는 영상을 본 시민들은 그것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이러한 돼지의 도태가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 또한 믿지 못할 것이다. 영상 속에서는 한 번의 가격으로 죽지 못한 돼지들 수십 마리가 쓰러져 피를 흘리며 집단으로 고통 속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해당 농장은 과거 어미돼지에게 투자해 수익을 보게 해주겠다며 사람들을 속인 ‘도나도나’ 사기 사건과 직접 연루된 농장으로 현재까지 채권단의 분쟁에 휘말려 있다. 쉽게 큰 수익을 낼 수 있기에 농장을 넘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불쌍한 우리들의 진짜 삶은 아무의 안중에도 없다.
돼지답게 살고 싶다
태어나서 도축장에 가기까지는 고작 6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도축장에서 도살되는 돼지들 또한 따지고 보면 ‘어린’ 돼지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도 알까. 이렇게 죽어가는 돼지들이 대한민국에서 연간 1600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을.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남짓 됐을 때 나는 이 축사를 거쳐 간 동료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축장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고 나의 육신은 소위 ‘맛있는’ 고기가 되어 부위별로 조각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돼지라는 한 생명으로서 마주하기보다 마트와 고깃집 같은 최종 소비처에서 고기로 마주할 것이다. 나의 생명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소비’되겠지.
오직 증체율과 생산율로서 인간에게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돈생이지만 나는 그래도 살고 싶다. 그리고 산다면 ‘제대로’ 살고 싶다. 온 몸을 옥죄는 불편함과 답답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이 극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어서 멈추고 잠시라도 생명으로서 본연의 삶을 누리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돼지들은 인간의 착취에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가축이기 이전에 본연의 습성과 욕구를 가지며 생각할 줄 아는 지각력 있는 생명체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도 말 못하는 돼지들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아니 순간순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면 좋겠다. 공장식 축산이 99퍼센트인 대한민국에서.
* 공장식 축산 체제 하에서 돼지의 생명을 가감 없이 소비하고 폐기처분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기반성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 우리가 만약 돼지로 태어난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을까.
글 | 김현지 <동물권행동 카라> 정책팀장
사진제공 | 동물권행동 카라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사육중인 돼지
나는 공장 같은 농장에서 살고 있는 ‘돼지’다. 사람들은 나를 ‘비육돈’이라 칭하며 열심히 살을 찌운다. 그들의 눈에 나는 생명이 아닌 고깃덩어리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세상
나는 태어난 지 20일 만에 엄마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엄마의 품에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때도 엄마의 몸은 자유롭지 못했다. 분만틀에 갇힌 엄마는 젖먹이는 기계마냥 누워서 수유만 할 뿐 꼼짝하지 못했다. 나를 낳는 출산의 고통 전까지 엄마는 좌우로 몸도 돌릴 수 없는 스톨에 갇혀 앉았다 일어섰다만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감내했다. 하지만 되풀이 되는 출산 속에서 평생 신체를 옥죄고 있어야 하는 엄마와 동료들은 운명의 굴레를 어쩌지 못했다.
엄마는 인공수정으로 강제 임신되어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나와 생이별 뒤 또다시 인공수정 당하여 스톨에서 장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 모를 나의 동생들은 엄마와 20일 만에 생이별을 또다시 반복하겠지. 이런 일이 2년 반 지속되어 ‘생산률’이 떨어지게 되면 엄마 돼지들 역시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비육돈인 나 역시 엄마와 헤어진 뒤 주어진 생을 견디고 있다. 빨리 살을 찌우려 하는 인간의 목적에 충실히 부합하고자 사료를 먹고, 또 먹는다. 몸이 아파도 티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개체들은 비육돈으로서의 자격도 없는 것인지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하기 일쑤이니까.
모든 수컷 아기돼지들은 거세를 당한다. 그것도 비의료자로부터 마취 없이 말이다. 수태지에게 나는 냄새가 고기의 품질을 떨어뜨리며 소비자의 불만을 사기 때문이란다. 나 역시 거세를 당하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염증이라도 얻게 되면 도태되고 마는 현실을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돼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건강해야만 한다.
공장식 축산의 신체 훼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장 같은 농장의 사육환경에서 꾹꾹 억눌러진 습성은 동료들의 이상행동을 부르곤 한다.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돼지들은 동료 돼지들을 공격하고 상처 입혔다. 이는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출하될 돼지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미연에 ‘예방’하고자 인간들은 대단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다른 돼지들을 공격할 수 있다며) 어린 돼지들의 송곳니를 미리 뽑았고 (다른 돼지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며) 돼지의 꼬리를 어릴 때 미리 잘라냈다.
먹고 빨리 살찌우기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사육되는 돼지. 전체 농가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풍경이다
우리 돼지는 쉬는 자리와 분변 자리를 분명히 가리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환경에 가두어 놓고선 더러운 동물이라는 오명마저 덧씌우고 말았다. 인간들이 모르는 아니 외면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우리가 고도의 지능을 가진 호기심 많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몇 가지 동작을 교육하는 일이 가능하며 우리는 뛰어난 장기기억을 가지고 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과 같은 기능을 하는 코로 흙을 파헤치며 주변을 탐색하고, 더운 여름엔 진흙목욕으로 스스로 몸을 식히고, 동료 돼지들과 다양하게 어울리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돼지들 본연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그런 우리 돼지에게 탐색할 거리가 전무한, 무료하고 단조로운 환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다. 모든 것이 박탈된 공장식 축산 속 돼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다. ‘사료를 먹고 빨리 살을 찌우는 것’
살처분 당하거나 살해 당하거나
우리가 사는 농장은 외관상으로도 공장과 흡사하며 밖에서는 돼지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40년간 국내 돼지의 총 마리수는 급증했지만 돼지 농가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다. 농가당 사육 마리 수 증대로 대량사육이 일반화 되었다는 얘기다. 대량사육 체제에서 우리는 물건과 다름없다. 공장의 모든 것은 경제성에 입각하여 돌아가며 우리는 생명이 아니라 수익 창출에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프거나 상품성이 떨어지면 농장에서 즉시 도태된다. 공장식 축산의 사육환경은 경제성 면에서 인간의 관리적 편의를 위한 것이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결코 배려하지 않는다.
돼지는 태어나서 6개월 살다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열악한 시설에서 죽어나가는 일도 속출한다. 지난여름에도 많은 수의 농장동물들이 폭염으로 폐사했으며 이번 겨울 축사 화재사고로 벌써 적잖은 돼지들이 불에 타 죽었다. 축사의 화재사고는 피해액 정도가 보도될 뿐 스톨에 갇힌 채 까맣게 타들어가야 했던 돼지들의 소리 없는 비명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며 재발방지 대책 역시 나오지 않는다. 구제역과 같은 가축전염병 발병 소식은 우리에겐 재앙이다. 살처분 대상으로 지정되면 동물의 고통 최소화에 대한 관리감독 없이 생매장 된다. 엄마돼지와 아기돼지들은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함께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공장식 축산의 돈사를 탈출하여 몇 개월간 자유를 만끽하며 야생의 생존에 성공한 동료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인간들은 이 돼지를 가만 놔두지 않고 포획했고 마취총에 맞은 돼지는 결국 이동 중 사망했다.
얼마 전 동물보호단체가 고발한 아기돼지 망치살해 사건은 또 어떤가. 2만 마리 넘는 돼지들을 사육하는 대형농장에서 멀쩡한 수십 마리 아기돼지들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하여 동물을 비인도적으로 ‘도태’ 시키는 영상을 본 시민들은 그것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이러한 돼지의 도태가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 또한 믿지 못할 것이다. 영상 속에서는 한 번의 가격으로 죽지 못한 돼지들 수십 마리가 쓰러져 피를 흘리며 집단으로 고통 속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해당 농장은 과거 어미돼지에게 투자해 수익을 보게 해주겠다며 사람들을 속인 ‘도나도나’ 사기 사건과 직접 연루된 농장으로 현재까지 채권단의 분쟁에 휘말려 있다. 쉽게 큰 수익을 낼 수 있기에 농장을 넘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불쌍한 우리들의 진짜 삶은 아무의 안중에도 없다.
돼지답게 살고 싶다
태어나서 도축장에 가기까지는 고작 6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도축장에서 도살되는 돼지들 또한 따지고 보면 ‘어린’ 돼지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도 알까. 이렇게 죽어가는 돼지들이 대한민국에서 연간 1600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을.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남짓 됐을 때 나는 이 축사를 거쳐 간 동료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축장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고 나의 육신은 소위 ‘맛있는’ 고기가 되어 부위별로 조각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돼지라는 한 생명으로서 마주하기보다 마트와 고깃집 같은 최종 소비처에서 고기로 마주할 것이다. 나의 생명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소비’되겠지.
오직 증체율과 생산율로서 인간에게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돈생이지만 나는 그래도 살고 싶다. 그리고 산다면 ‘제대로’ 살고 싶다. 온 몸을 옥죄는 불편함과 답답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이 극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어서 멈추고 잠시라도 생명으로서 본연의 삶을 누리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돼지들은 인간의 착취에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가축이기 이전에 본연의 습성과 욕구를 가지며 생각할 줄 아는 지각력 있는 생명체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도 말 못하는 돼지들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아니 순간순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면 좋겠다. 공장식 축산이 99퍼센트인 대한민국에서.
* 공장식 축산 체제 하에서 돼지의 생명을 가감 없이 소비하고 폐기처분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기반성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 우리가 만약 돼지로 태어난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을까.
글 | 김현지 <동물권행동 카라>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