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한반도 산신을 찾아서

영화 『대호』에 등장하는 산신, 호랑이

 

백두산에서 힘차게 내려 뻗은 산줄기들이 태백산에서 갈라져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연이어진 낙동정맥 산줄기. 끝없이 탁 트인 푸른 하늘 아래 수십만 평에 이르는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루는 영남알프스 신불산 산자락에서 1944년 어느 날 산에서 숯을 굽던 이 모 영감이 설치한 올가미에 호랑이 한 마리가 걸려죽었다.  

당시 고기가 귀한 시절이라 남몰래 멧돼지나 노루를 잡기 위해 설치한 올무에 호랑이가 걸려 죽어있는 것을 본 이 모 영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사냥꾼도 아닌 숯을 굽는 영감이 고기 맛을 보고 싶어 설치한 올가미에 다른 동물도 아닌 동물의 왕 ‘호랑이’가 걸려 죽는 것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광복을 한 해 앞둔 때였지만 서슬 시퍼런 일본순사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두려움에 잡힌 숯쟁이영감은 입을 꼭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 하나둘씩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일본경찰에게까지 알려져 출두명령이 떨어졌다. 동네 장정 네 사람이 석남사 신작로까지 쩔쩔매며 운반한 호랑이를 트럭에 옮겨 싣고 주재소에 간 이 모 영감은 조사를 받고 다행히 아무 탈 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당시 주재소 앞마당에는 호랑이를 구경하고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거적에 덮여있는 호랑이를 직접 목격한 강창회(86세)와 김정두(88세)의 목격담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마치 그날처럼 매우 기억이 생생하다. 강 씨는 “죽은 호랑이가 벌떡 일어날 것 같아 담력 약한 사람은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고 하며, 김 씨는 “호랑이 눈썹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감기가 안 온다 해서 눈썹을 뽑아 늘 지갑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주재소로 운반된 호랑이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상은 기행작가 배성동씨가 저술한 영남알프스 : 하늘억새길, 둘레길 (2014년, 울주군)의 내용에서 발췌하여 편집 인용한 것이다.

 

올가미에 잡힌 호랑이와 표범

경남 합천 가야산자락 매화산에서 잡은 표범(1960년대) 사진제공 한상훈 

 

그해 신불산 골짜기에서는 또 한 마리의 멸종위기 포유동물이 잡혔다. 이번에는 표범이다. 사진 제공자는 영남 알프스 일대에서 대대로 사냥을 해온 포수 집안의 김덕동(80세) 포수다. 부친 김재한(1893년생)은 일본에서 ‘무라다총’을 들여와 언양에서 유일하게 총포소지 허가를 받은 인물로 이 표범을 지서에 신고한 당사자다. 표범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사진은 당시 울산군 상북주재소 순사가 주재소 앞에서 기념촬영해 준 것이라고 한다. 사진 속 표범 역시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올가미에 의해 잡혔고, 최초 발견자는 상북면 궁근정에 살았던 이수업이라고 한다. 호랑이와 표범이 같은 해 같은 산줄기에서 올가미에 의해 잡힌 것이다. 

광복 이후 15년이 지난 1960년 12월 22일 신불산 인근 가지산 산기슭에서 암컷 표범 한 마리가 올가미에 의해 잡혔다. 잡은 이는 가지산 아래 살티마을에 거주하던 정우영(69세)의 부친(1928~2012)으로 가지산을 중심으로 노루와 멧돼지를 잡으려 거의 매일 다녔으며, 범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18개월 동안 쫓아다닌 후에 잡았다고 한다. 당시 22살의 청년으로 군을 갓 제대한 정우영은 부친의 요청에 의해 함께 산에 올라가 표범 사체를 발견하고 지게에 메고 산을 내려왔으며, 꼬리길이가 몸길이와 비슷하며 전체는 약 3미터에 이르고 무게는 35~40킬로그램 나갔다고 하였다.  

표범 사체 발견 이틀 전에 부친은 산에 올라가 바위 사이에 설치한 올가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뒤를 쫓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아들 정우영에게 도움을 청해 올가미를 설치한 자리에서 1.5킬로미터 이동한 산기슭에 엎드려 있는 표범을 발견하였고,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 부친이 굵은 나무로 두 차례 몸을 쳐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아 죽은 것을 확인하고 겨우 접근하였다고 한다. 이 표범은 이후 부산에 거주하던 최정윤 포수를 통해 당시 금액으로 40만 원에 팔았다고 했다.  

암컷 표범을 잡은 이후 집 주위로 수컷으로 보이는 표범이 한 달 내내 출현하여 밤에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고도 말했다. 이 내용은 배성동 작가의 도움을 받아 지난 1월 15일 언양에서 정우영 씨와 만나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다. 당시 잡은 표범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야생동물 수난사

 

신불산. 불과 50년 전만 해도 호랑이와 포범이 살았다 ⓒ함께사는길 이성수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 마리의 호랑이와 수백 마리의 표범이 백두산에서 땅 끝 해남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일본 강점기(1910~1945) 36년 동안 100여 마리의 호랑이와 최소 700마리 이상의 표범이 포획되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한 해 수십 마리의 호랑이와 100여 마리의 표범이 잡혔지만, 말기에 들어서는 1~2마리의 호랑이와 10마리 미만의 표범이 잡힐 정도로 그 수는 격감하였다.  

그 당시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이 절멸직전에 처해 있었다고 가늠할 수 있다. 물론 호랑이와 표범, 늑대 등의 중대형 육식포유류에 의한 인명피해도 심각하였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7일자 신문보도에 의하면 1921년 한 해에만 호랑이와 늑대 등의 야생동물에 의한 사상자가 169명에 달했다고 소개되고 있다. 당시 한반도는 야생동물과 사람들 사이에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80년대 초까지 표범이 전국 각지에서 포획되고 목격되지만 관련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호랑이도 국지적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목격사례가 있지만 공식적인 생존 자료는 없다. 이제 호랑이와 표범은 영영 우리 산야에서 사라진 것일까? 

 

호랑이와 표범이 사는 땅

최근 서울 등 대도시 산림에 멧돼지가 빈번하게 출현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여 언론에서 연일 위험성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작년 말에는 등산객 2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는 사고도 발생하였다. 호랑이와 표범 등 멧돼지를 포식하는 야생동물이 사라져서 문제라고 하는 생태전문가들도 있다. 

도심에 출몰하는 멧돼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 원인은 21세기 들어 대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의 급격한 도시화와 도로 등의 건설로 인한 서식지 면적 감소와 생태통로의 단편화, 도시 주변에서 연중 실시되는 유해야생동물 포획에 의해 그린벨트 등 도시 녹지 산림 안전지역으로 변모한 도심에 들어와 살고 있는 멧돼지가 증가하면서 발생한 새로운 토건개발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서울의 북한산 인접 종로구와 은평구의 공원경계 주택가 인접 녹지대에는 2~3일 간격으로 멧돼지가 출몰하고 있다. 멧돼지도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표범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믿는 이들이 더러 있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글에 처음 소개한 배성동 기행작가도 영남알프스에서 10여 년 동안 표범에 관한 기록을 쫓아 현장을 다니면서 표범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미 사라졌다고 단념하거나, 포기하면 우리 강토의 자연과 야생동물에게는 더 이상 생존의 미래가 없다. 

 

글 | 한상훈 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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