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벵듸를 아시나요

녹산장 벵듸 전경.벵듸는 제주만의 독특한 자원이다

 

한라산과 오름, 곶자왈의 공통점은 화산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오름은 독립화산체의 용암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곳이고 곶자왈은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만들어낸 화산암반 위의 숲이다. 벵듸는 주로 중산간(해발 200~600미터 지대)에 있는 오름과 오름 사이에 분포하고 있는 들판을 말한다. 즉, 오름의 용암이 분출해 땅위로 흐르면서 만들어진 들판이라는 얘기다. 물론, 저지대의 경우에도 벵듸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벵듸는 화산섬의 특성상, 용암대지 위에 생긴 들판이라는 점은 확실할 것이다.  

아직 학술적으로는 정립되지 않았지만 제주환경연합에서 정의한 벵듸란 이렇다. ‘주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그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비교적 넓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고 잡풀만 우거진 거친 들판’이다. 이처럼 벵듸와 관련된 마을 이름은 평대리, 도평동, 월평동(제주시, 서귀포시 2곳) 등 총 4곳에 이르며 벵듸가 들어간 지명도 180곳이나 존재한다. 

 

위로는 습지 아래에는 동굴이 흐르는 벵듸 

벵듸안에는 습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벵듸는 오름, 곶자왈과 함께 제주도의 독특한 지형과 경관을 형성하는 주요자원이다. 그런데 그림 작품 속의 여백과도 같은 벵듸의 특성 때문에 그 중요성은 간과돼왔다. 그림에 여백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벵듸는 제주도라는 독특한 풍경 속에서 초록색 여백의 기능을 하고 있다.  

벵듸는 해안저지대의 마을과 한라산을 잇는 주요한 생태축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제주인들에게는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제주목장사의 주요 무대이다. 벵듸의 또 하나의 특징은 땅 아래로는 동굴이, 땅위로는 습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간 지역의 대표적 벵듸인 어림비, 수산평, 녹산장은 파호이호이용암이 흐르면서 굳어진 벵듸의 지질적 특성상 내륙 습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올해 제주환경연합에서는 벵듸조사 회원소모임을 구성해서 위 3개의 벵듸 내 습지를 조사했었다. 그 결과 이곳에서만 새롭게 최소 40여 개의 내륙습지를 발견했다. 이중 습지 4곳에서 환경부 멸종위기종인 순채와 전주물꼬리풀을 발견했다.  

그리고 벵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땅 아래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이다. 수산평의 수산굴(4675미터), 어림비의 빌레못굴(9020미터)은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의 용암동굴이다. 특히, 수산평은 수산굴 뿐 아니라 여러 개의 동굴이 미로처럼 휘감겨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규모의 동굴이 벵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벵듸의 지질학적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이곳에 대한 개발을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되는지 반증한다.

 

우리나라 목마장의 역사가 시작된 벵듸, 수산평 

수산평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장이 시작된 곳이다

 

수산평은 제주도 최대의 벵듸로서 우리나라 목마장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제주가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렬왕 2년(1276년)에 몽골에서 말 160필과 말 전문가인 목호들이 탐라국에 들어온다. 이때 수산평 일대에 마목장(馬牧場)인 탐라목장을 건설한 것이 우리나라 목마장의 기원이다. 그 이후 100년간 탐라목장이 지속되면서 몽골식 목축방식이 제주도 전역으로 전파된다. 조선시대 때는 국영목장인 10소장에 포함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하도공돔목장 등 마을공동목장들로 변화된다. 마을공동목장은 한때 많게는 116곳이나 있었다.  

이처럼 수산평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목마장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이 말들이 먹을 수 있는 풀이 많은 드넓은 초원인데다가 목을 축일 수 있는 습지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목장인 셈이다.  

이처럼 주로 벵듸 위에 위치한 마을공동목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소를 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공유지를 통해 목축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목축과 농업을 통해 마을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마을공동목장은 제주도민들의 협동 문화가 녹아있다. 최근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협동조합인 셈이다. 

 

테우리의 고향, 벵듸와 마을공동목장이 위험하다 

바다에 잠녀(해녀)가 있다면 중산간 초지대(벵듸와 마을공동목장)에는 테우리가 있다. 제주가 낳은 소설가, 현기영의 명작 ‘마지막 테우리’는 마을공동목장의 테우리를 통해 제주 현대사의 비극을 그린 단편소설이다. 젊은 시절에 테우리로 일하던 주인공 고순만은 4.3 때 마을공동목장에서 사람들과 소들이 학살당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테우리를 하던 주인공은 마을공동목장이 대기업에 팔리고 골프장으로 망가지는 것을 쓸쓸히 지켜본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테우리의 맥은 끊겨가고 있다.  

테우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곧 마을공동목장과 벵듸가 사라져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주도 축산업의 몰락과 동시에 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목축문화의 소멸을 반증한다. 1939년에는 116곳이나 있었던 마을공동목장이 2014년도에는 57개소로 줄었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축산업의 쇠퇴와 조합원들의 고령화로 마을공동목장을 매각하려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매수하려는 곳들은 국내 대기업들과 중국자본이 많다. 매입 후에는 골프장이나 대형리조트를 만들려는 계획이 있다. 벵듸에 위치한 마을공동목장이 개발되면 곧 벵듸가 사라지는 것이다. 

제주도 서쪽의 어림비 벵듸 지역은 중산간지대에서 난개발이 가장 심한 지역이다. 이 일대는 제주도내에서도 골프장과 대형리조트 밀집도가 매우 높다. 어림비만해도 북쪽 일부분을 에버리스 골프장과 엘리시안 골프장이 잠식해 버린 상황이다. 어림비 주변의 개발은 더욱 심각하다. 캐슬렉스제주골프장, 타미우스 골프장,아덴힐 리조트 등이 들어서있고 앞으로도 추가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벵듸가 넓게 펼쳐져있는 곳인데다가 해안지대의 조망이 좋고 주변에 오름과 한라산의 숲자락이 있어 골프장으로서 매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을공동목장은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유산이다

 

그리고 더 큰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 벵듸가 있다. 수산평이다. 1990년 정부의 ‘제주권 신국제공항 개발 타당성 조사 계획’ 발표 이후 25년 만에 제2공항 건설이 최근 확정됐다. 500만 제곱미터(약 150만 평) 부지에 사업비 4조1000억 원을 들여 3.2킬로미터의 남북 활주로 1본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연간 수송능력은 현 제주국제공항 2000만 명보다 많은 2500만 명이다. 공항 부지의 면적이 500만 제곱미터이지만 도로개설 등 공항 관련 인프라시설을 합치면 성산읍을 포함한 제주도 동쪽 일대가 공항 개발 사업으로 들썩일 것이다. 제2의 제주도 개발시대가 올지 모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제2공항에서 서쪽으로 약 5킬로미터 범위 안에 있는 수산평의 미래다. 제2공항 계획이 발표되기도 전에 토지투기세력들이 수산리의 수많은 토지를 매입했다. 앞으로 수산평이 집중적인 개발과 부동산투기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산평 지역을 포함한 동쪽 중산간 지대는 벵듸와 오름, 곶자왈, 습지, 마을공동목장, 밭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갖고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의 바람이 덜 미친 곳이다. 달력 사진에 등장하는 오름들도 이 동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제주도내에서도 제주도만의 자연적 특성을 잘 간직한 곳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제2공항 건설이 시작될 경우, 수산평을 포함한 동쪽 중산간 지대는 개발의 광풍이 불어 닥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절대보전지역인 오름을 빼고는 생태계 등급이 낮은 벵듸의 특성상 개발승인이 될 가능성이 높고 지가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10년 이내에 수산평의 원시적인 초원과 구좌읍 지경의 아름다운 오름 군락 풍경이 사라지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제주도의 또 하나의 보물, 벵듸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글 · 사진 | 양수남 제주환경운동연합 대안사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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