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섭새강변에서 산길 따라 두 시간, 동강 65킬로미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어라연(魚羅淵)을 만난다. ‘물고기가 그물처럼 많은 연못’이란 뜻을 가진 물이 강 복판을 지난다. 어라연 일대는 급하게 내려오던 물살이 ‘U’자로 꺾이면서 잦아들면서 기암괴석과 소나무 숲이 어울린 주변 산세와 조화경을 이룬다.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어라연, 그때나 지금이나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뿐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다. 어라연까지 진입을 위해 산길 등산로를 새로 만든 것과 이 일대가 자연생태경관보전지역, 자연휴식지로 지정된 것을 빼면 변한 게 없다. 한겨울 동강 어라연은 짙은 쪽빛이다. 여름에 폭우를 머금은 동강이 석회암 성분 때문에 뿌연 빛이 감돌았다면, 겨울은 잡것을 뺀 순순한 동강 그대로의 빛을 보여준다.
이런 어라연이 수몰될 뻔했었다. 어라연에서 아래쪽으로 예전 떼꾼들의 애환이 담긴 전산옥 주막 터와 물살이 빠른 황새여울을 지나고 나면 절벽을 이룬 바위들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동강댐 예정지였다. 높이 98미터, 저수용량 7억 톤의 거대 댐은 영월과 평창 일부와 정선을 수몰시키는 엄청난 규모였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백지화를 선언하기 전까지, 동강댐은 우리나라 물 정책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허황된 논리로 남한 최대의 비경과 희귀 동식물, 수많은 역사문화, 자연사적 보물들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봐도 동강이 댐으로 막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불행하게도 동강댐 백지화 이후에도 댐 건설의 유령들은 이 나라 곳곳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다. 우리는 동강댐에서 무엇을 얻었고 또 마땅히 얻어야 했을 그 무엇을 더 얻지 못했는가?
50년대부터 시작된 동강댐 타령
동강댐 사례를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동강댐이 1990년 대홍수를 계기로 추진됐다고 밝히고 있다. 90년 중부지방을 몰아닥친 홍수는 193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가장 큰 강우량을 기록했다. 강원도 영월에도 홍수 피해가 발생했는데, 동강철교와 제천~영월 간 도로가 물에 잠겼으며, 저지대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월 19일 영월읍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읍내 건물 2층까지 물에 잠겼다.”라며 당시를 회상하면서 “제방이 낮았고, 펌프 시설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인재였다.”라고 말했다. 동강은 한강의 최상류 부근으로 국가하천이 아닌 지방하천이다. 통상 국가하천의 홍수 대비는 100~200년 빈도, 지방하천의 경우는 50~100년 빈도로 설계되는데, 영월읍에서는 90년 홍수 이후 100년 빈도로 제방을 보강했다. 이후 펌핑 시설을 3곳으로 늘리면서 영월읍내는 저지대임에도 더 이상의 홍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니 90년 대홍수보다 더 오랜 다른 기획이 동강을 두고 있었다고 봐야 옳다. 이것은 몇몇 자료들로 확인된다. 영월 동강에 댐 가능성이 처음으로 조사된 된 것은 1957년으로 영월읍 문산리를 중심으로 수력발전 조사가 있었고, 1962년에는 국토관리청 주관으로 수자원 기본조사가 있었으며, 1974년에는 건교부와 수자원공사가 공동으로 포장수력조사(잠재적 수력 발전량 조사)가 실시됐다. 이 시기 홍수방지, 전력 생산을 목적으로 높이 153미터의 댐 계획이 언급됐기도 했으며, 70년대 말에는 용수공급을 위한 24개의 다목적댐 중 하나로서 영월 동강에 댐 계획이 언급됐다. 이상으로 볼 때 동강댐은 90년 대홍수 이후의 기획이 아니라 동강댐 추진세력이 예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개발사업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는 우리나라 수자원 개발, 즉 댐 건설의 전성기였다. 1961년 하천법과 1996년 특정다목적댐법이 제정됐고, 1965년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1965~1975년)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인 댐 건설 시대가 열렸다. 1980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전의 폭발적인 댐 건설 열풍이 다소 주춤했던 시기로, 대형 댐보다는 중소규모의 댐 정책이 추진됐다. 대형 댐보다 수몰면적이 작아지기 때문에 경제성이 높다는 평가에서다. 이 시기 영월에서도 동강 본류와 지천에 소규모 댐들이 추진됐다. 1985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장으로 있었던 현대건설이 동강 본류인 영월읍 삼옥리에 수력발전 댐을 계획했고, 1988년에도 수력 타당성 조사가 있었다.
1990년대 댐 정책은 필연적인 부작용을 양산했다. 댐이 갖고 있는 기본적 속성으로 인해 피해가 확산되자 90년대 들어 주민들의 저항도 본격화 됐다. 댐이 전력, 용수 확보 등 다목적 효과도 있지만, 교통 불편, 기상변화 등으로 생활에 큰 불편을 겪게 됐던 것이다. 이를 두고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대형 댐 정책은 박정희의 파괴적 물 정책을 대표 한다고 지적한다. 대형 댐은 대중을 제외한 소수만의 과학주의, 국가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지탱가능한 지역의 지식을 부정하고 지역주민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반과학적이면서 반민주적이라 꼬집는 것이다.
더욱이 90년대 초반은 전국에서 수질오염 문제가 발생했다. 수도권 식수 중금속 파동(1989년), 낙동강 페놀 사건(1991년), 낙동강 벤젠, 톨루엔 검출 사건(1994년) 외에도 물고기 떼죽음, 악취 사건 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새로운 물 정책, 즉 댐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강화됐다. 사실 이미 댐이 들어설 만한 적지에는 대부분 댐이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나라에는 댐이 많다. 현재 국제대형댐위원회(ICOLD)에 등록된 대형 댐 수만 680여 개가 되고, 크고 작은 댐까지 1만8000여 개에 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처럼, 댐을 개발하고자 하는 세력은 여전히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강에 세우려 했다. 그것이 설사 천혜의 비경을 지니면서 천연기념물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 지역이라 할지라도 댐 건설로 연결된 그들의 사익 카르텔은 홍수 방지, 물 부족을 강조하면서 밀어붙이는 형국이 됐다. 이것이 바로 동강댐 추진의 실질적 배경이다.
토건세력의 동강댐 추진과 시민 저항
동강댐은 1990년 10월 홍수조절용 댐으로 검토되다가 1991년 5월 용수공급 목적을 더해 다목적댐으로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반영되면서 추진됐다. 이어 1992년 6월 2000년대 수자원 계획을 확정하면서 동강에 댐 계획이 공고히 됐다. 당시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가 내세웠던 논리는 ‘물 부족’이었다. 1993년 3월 한국수자원공사(이하 수공)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물 사용 수요가 급증해 2011년에는 수자원 고갈현상마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검토된 동강댐은 1억 톤 미만의 중규모였으나, 이후 물 부족 전망과 가뭄 및 홍수 방지 목적이 더해지면서 어느새 팔당댐 저수용량(2억4000만 톤)의 3배가 넘는 7억6000만 톤짜리 대형 댐으로 확장됐다. 건교부와 수공 등은 동강댐으로도 모자라 전국의 28개의 댐이 필수적이란 입장이었다. 1995년 홍수 이후에는 전국에 40~50곳의 댐 건설을 추진하려는 구상도 밝히기도 했으며, 1996년에는 다목적댐을 추가로 34개(당시 9개)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됐다. 이는 물 부족 논리와 홍수 방지를 핑계로 1960~1980년대 토건세력이 호황을 누렸던 댐 건설 전성기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환경인식 상승에 따른 댐에 대한 정서적 거부와 댐 건설에 따른 피해 사례가 전파되면서, 토건세력이 박정희 시대처럼 무조건 댐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사실상 쉽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이 ‘댐 건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댐 지원법)’이었다. 1997년 8월 건교부는 국회에 ‘댐 지원법’을 제출했는데, 환경영향평가를 빼면서 댐 건설 절차를 간소화하고, 수몰주민을 대상으로 조기에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환경연합은 관련 법률안에 대해 1997년 10월 국회에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지방자치시대의 기본이념인 참여민주주의 정신에 역행”한다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지역에 무분별하게 댐을 건설하여 국토의 생태계파괴와 지자체의 자치권과 지역주민의 생존권을 심각히 침해할 것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시기부터 전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은 댐 반대 운동에 나서 같은 해 11월 ‘무분별한 댐 건설 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동강 지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동강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대한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고 여름 바캉스 추천지로 언론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후 1992년부터는 동강이 래프팅 명소로 소개되면서 알려졌고, 때 묻지 않은 자연에 대한 오지탐험지로도 각광을 받게 됐다. 이어 동강 변에 있는 천연기념물 260호인 백룡동굴이 수몰위기에 처한 사연이 소개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강의 비경은 환경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1990년대 후반 환경연합에서 동강댐 반대 활동을 전개했던 김혜정 시민방사능감시센터 운영위원장은 “동강을 다녀오기만 하면, 동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만큼 동강이 지닌 뛰어난 경관에 사람들이 감탄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환경연합이 본격적으로 동강댐 백지화운동을 펼쳤던 1997년, 1998년에는 ‘동강댐 반대’보다 ‘동강을 지키자’라는 구도를 만들어 갔다는 것이 김혜정 위원장의 설명이다.
실제 ‘동강을 지키자’라는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동강 트레킹과 래프팅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골칫거리가 될 정도로 호응을 크게 얻었다. 언론들도 수몰될 위기에 처한 동강 관련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전문가, 국회의원, 문화예술인 등 사회각계 인사들의 동강 지키기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98년 1월을 기점으로 언론에서는 정부의 ‘영월댐’이란 표현 대신, 환경단체들의 ‘동강댐’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김혜정 위원장은 “영월댐이라고 하면 동강을 34개의 댐 지역 중 하나뿐이라고 좌시하는 프레임에 가두는 호칭”이라면서 “언론이 동강댐이라 표현한 것은 환경단체의 동강 지키기 프레임이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했다. 환경연합의 동강 지키기 뗏목 캠페인과 거리 서명운동 역시 큰 호응을 얻었다. 1999년 광화문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받았던 환경연합 최준호 국장은 “조선일보 김대중 논설위원(현 고문)도 서명에 참가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1999년 3월에 방영된 KBS 『환경스페셜』 ‘동강’편은 국민 여론을 동강댐 반대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오로지 동강의 비오리, 수달 및 자연 경관을 담았던 이 방송은 자연다큐로는 드물게 재방송이 편성되는 등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동강댐 관련 TV 토론에 출연했었던 김혜정 위원장은 “원래 토론이 끝난 후 시민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데, 동강댐 반대 여론이 80퍼센트가 넘어서 방송 관계자들이 정책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를 발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동강댐 백지화, 시민운동의 승리
동강에 대한 여론의 호응은 지역주민들과 자치단체들을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에 동참하게 만든 계기도 됐다. 국민 여론이 반대로 나서도 건교부와 수공 등은 동강댐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강댐 백지화가 곧 댐 건설 정책 전체의 중단을 초래할 상황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건교부가 제시한 동강댐 추진 주요 논리는 홍수 예방과 수도권 물 부족 해결에 동강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를 동원해 유엔이 한국을 물 부족국가로 분류했다고 선전하는 모양새가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 추진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동강댐이 갖고 있었던 기본적 문제점 중에는 이 지역이 석회암지대여서 수많은 동굴이 산재해 있고, 인근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등 댐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수자원공사가 제출한 환경영향평가도 부실했다. 환경연합의 조사를 통해 동강에 400여 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있음이 밝혀졌음에도 수공 조사에서는 30여 개뿐으로 기록됐고, 희귀종 등에 대해서도 누락되는 등 부실해 환경부마저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평가서’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물 수요 예측도 과장된 것이 확인됐다. 실제로 2011년 ‘물 부족 대란’이 있을 것이란 예측은 동강댐이 없었어도 생기지 않았다. 당시 건교부와 수공은 우리 국민이 1인당 하루 권장사용량의 2배가 넘는 398리터를 사용해 영국, 일본보다 2~4배 높다며, 이를 근거로 용수 부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1인당 급수량(수돗물 급수인구/수돗물 생산량)이지 실제 사용량은 아니었다. 물이 공급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는데, 96년 한 해 서울에서 누수된 물만 해도 6억4000만 톤으로 동강댐 저수용량과 맞먹는 상황이었다. 당시 환경연합은 성명서를 통해 “수도관 누수관리는 제쳐두고 댐 건설을 통해 공급부터 하겠다는 것은 밑 빠진 독은 고칠 생각을 않고 퍼부을 물만 늘려놓고 보자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동강댐은 2000년 3월 민관공동조사단의 조사를 바탕으로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백지화 선언이 나왔다. 환경연합은 즉각 환영 입장을 밝히면서 △동강댐 백지화는 시민운동의 승리 △동강댐 백지화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공생해야 한다는 환경의식이 확산되고 시민 스스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실천을 했기 때문에 가능 △동강댐 백지화는 사후처리 위주의 환경정책이 사전예방으로 전환될 가능성 제시 △동강댐 백지화는 공급위주의 자원정책을 수요관리 위주에서 재검토하는 사례 등으로 동강댐 백지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여기에 덧붙여 김혜정 위원장은 “시민 참여형 포지티브 운동으로서의 성공적 운동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동강댐 백지화 이후 생태계 보전 지역 확대와 지역의 경관,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생태관광 개념으로서 지역주민 소득 증대 등 정책 제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쉽다.”라고 지적했다.
2008년 11월 국토해양부(이하 국토부)는 동강댐 예정지였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거운리 일대를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으로 꼽았다. 수달, 어름치, 원앙,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과 동강할미꽃 등 미기록 종 등이 살고 있는 청정 생태분포지라는 것이 선정이유다. 10여 년 전 국토부의 전신인 건교부는 이런 사실을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변신이 진심은 아니라는 사실을 국토부는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국토부는 지금도 지리산의 명승지, 용담계곡을 수몰시키는 댐을 추진하고 있고, 청정생태가 보존된 양양 장파천에도 댐을 추진한다. 이런 식으로 전국 각지에 14개 댐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강인들 아름답지 않은가. 그곳에 깃든 수많은 생명과 역사, 문화가 없는 곳이 또 어디 있는가. 허황된 논리로 댐 건설을 추진하는 유령들의 정책은 동강의 포효하는 물줄기 앞에서 포말로 사라져야 마땅하다.
글•사진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섭새강변에서 산길 따라 두 시간, 동강 65킬로미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어라연(魚羅淵)을 만난다. ‘물고기가 그물처럼 많은 연못’이란 뜻을 가진 물이 강 복판을 지난다. 어라연 일대는 급하게 내려오던 물살이 ‘U’자로 꺾이면서 잦아들면서 기암괴석과 소나무 숲이 어울린 주변 산세와 조화경을 이룬다.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어라연, 그때나 지금이나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뿐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다. 어라연까지 진입을 위해 산길 등산로를 새로 만든 것과 이 일대가 자연생태경관보전지역, 자연휴식지로 지정된 것을 빼면 변한 게 없다. 한겨울 동강 어라연은 짙은 쪽빛이다. 여름에 폭우를 머금은 동강이 석회암 성분 때문에 뿌연 빛이 감돌았다면, 겨울은 잡것을 뺀 순순한 동강 그대로의 빛을 보여준다.
이런 어라연이 수몰될 뻔했었다. 어라연에서 아래쪽으로 예전 떼꾼들의 애환이 담긴 전산옥 주막 터와 물살이 빠른 황새여울을 지나고 나면 절벽을 이룬 바위들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동강댐 예정지였다. 높이 98미터, 저수용량 7억 톤의 거대 댐은 영월과 평창 일부와 정선을 수몰시키는 엄청난 규모였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백지화를 선언하기 전까지, 동강댐은 우리나라 물 정책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허황된 논리로 남한 최대의 비경과 희귀 동식물, 수많은 역사문화, 자연사적 보물들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봐도 동강이 댐으로 막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불행하게도 동강댐 백지화 이후에도 댐 건설의 유령들은 이 나라 곳곳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다. 우리는 동강댐에서 무엇을 얻었고 또 마땅히 얻어야 했을 그 무엇을 더 얻지 못했는가?
50년대부터 시작된 동강댐 타령
동강댐 사례를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동강댐이 1990년 대홍수를 계기로 추진됐다고 밝히고 있다. 90년 중부지방을 몰아닥친 홍수는 193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가장 큰 강우량을 기록했다. 강원도 영월에도 홍수 피해가 발생했는데, 동강철교와 제천~영월 간 도로가 물에 잠겼으며, 저지대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월 19일 영월읍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읍내 건물 2층까지 물에 잠겼다.”라며 당시를 회상하면서 “제방이 낮았고, 펌프 시설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인재였다.”라고 말했다. 동강은 한강의 최상류 부근으로 국가하천이 아닌 지방하천이다. 통상 국가하천의 홍수 대비는 100~200년 빈도, 지방하천의 경우는 50~100년 빈도로 설계되는데, 영월읍에서는 90년 홍수 이후 100년 빈도로 제방을 보강했다. 이후 펌핑 시설을 3곳으로 늘리면서 영월읍내는 저지대임에도 더 이상의 홍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니 90년 대홍수보다 더 오랜 다른 기획이 동강을 두고 있었다고 봐야 옳다. 이것은 몇몇 자료들로 확인된다. 영월 동강에 댐 가능성이 처음으로 조사된 된 것은 1957년으로 영월읍 문산리를 중심으로 수력발전 조사가 있었고, 1962년에는 국토관리청 주관으로 수자원 기본조사가 있었으며, 1974년에는 건교부와 수자원공사가 공동으로 포장수력조사(잠재적 수력 발전량 조사)가 실시됐다. 이 시기 홍수방지, 전력 생산을 목적으로 높이 153미터의 댐 계획이 언급됐기도 했으며, 70년대 말에는 용수공급을 위한 24개의 다목적댐 중 하나로서 영월 동강에 댐 계획이 언급됐다. 이상으로 볼 때 동강댐은 90년 대홍수 이후의 기획이 아니라 동강댐 추진세력이 예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개발사업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는 우리나라 수자원 개발, 즉 댐 건설의 전성기였다. 1961년 하천법과 1996년 특정다목적댐법이 제정됐고, 1965년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1965~1975년)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인 댐 건설 시대가 열렸다. 1980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전의 폭발적인 댐 건설 열풍이 다소 주춤했던 시기로, 대형 댐보다는 중소규모의 댐 정책이 추진됐다. 대형 댐보다 수몰면적이 작아지기 때문에 경제성이 높다는 평가에서다. 이 시기 영월에서도 동강 본류와 지천에 소규모 댐들이 추진됐다. 1985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장으로 있었던 현대건설이 동강 본류인 영월읍 삼옥리에 수력발전 댐을 계획했고, 1988년에도 수력 타당성 조사가 있었다.
1990년대 댐 정책은 필연적인 부작용을 양산했다. 댐이 갖고 있는 기본적 속성으로 인해 피해가 확산되자 90년대 들어 주민들의 저항도 본격화 됐다. 댐이 전력, 용수 확보 등 다목적 효과도 있지만, 교통 불편, 기상변화 등으로 생활에 큰 불편을 겪게 됐던 것이다. 이를 두고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대형 댐 정책은 박정희의 파괴적 물 정책을 대표 한다고 지적한다. 대형 댐은 대중을 제외한 소수만의 과학주의, 국가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지탱가능한 지역의 지식을 부정하고 지역주민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반과학적이면서 반민주적이라 꼬집는 것이다.
더욱이 90년대 초반은 전국에서 수질오염 문제가 발생했다. 수도권 식수 중금속 파동(1989년), 낙동강 페놀 사건(1991년), 낙동강 벤젠, 톨루엔 검출 사건(1994년) 외에도 물고기 떼죽음, 악취 사건 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새로운 물 정책, 즉 댐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강화됐다. 사실 이미 댐이 들어설 만한 적지에는 대부분 댐이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나라에는 댐이 많다. 현재 국제대형댐위원회(ICOLD)에 등록된 대형 댐 수만 680여 개가 되고, 크고 작은 댐까지 1만8000여 개에 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처럼, 댐을 개발하고자 하는 세력은 여전히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강에 세우려 했다. 그것이 설사 천혜의 비경을 지니면서 천연기념물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 지역이라 할지라도 댐 건설로 연결된 그들의 사익 카르텔은 홍수 방지, 물 부족을 강조하면서 밀어붙이는 형국이 됐다. 이것이 바로 동강댐 추진의 실질적 배경이다.
토건세력의 동강댐 추진과 시민 저항
동강댐은 1990년 10월 홍수조절용 댐으로 검토되다가 1991년 5월 용수공급 목적을 더해 다목적댐으로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반영되면서 추진됐다. 이어 1992년 6월 2000년대 수자원 계획을 확정하면서 동강에 댐 계획이 공고히 됐다. 당시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가 내세웠던 논리는 ‘물 부족’이었다. 1993년 3월 한국수자원공사(이하 수공)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물 사용 수요가 급증해 2011년에는 수자원 고갈현상마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검토된 동강댐은 1억 톤 미만의 중규모였으나, 이후 물 부족 전망과 가뭄 및 홍수 방지 목적이 더해지면서 어느새 팔당댐 저수용량(2억4000만 톤)의 3배가 넘는 7억6000만 톤짜리 대형 댐으로 확장됐다. 건교부와 수공 등은 동강댐으로도 모자라 전국의 28개의 댐이 필수적이란 입장이었다. 1995년 홍수 이후에는 전국에 40~50곳의 댐 건설을 추진하려는 구상도 밝히기도 했으며, 1996년에는 다목적댐을 추가로 34개(당시 9개)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됐다. 이는 물 부족 논리와 홍수 방지를 핑계로 1960~1980년대 토건세력이 호황을 누렸던 댐 건설 전성기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환경인식 상승에 따른 댐에 대한 정서적 거부와 댐 건설에 따른 피해 사례가 전파되면서, 토건세력이 박정희 시대처럼 무조건 댐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사실상 쉽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이 ‘댐 건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댐 지원법)’이었다. 1997년 8월 건교부는 국회에 ‘댐 지원법’을 제출했는데, 환경영향평가를 빼면서 댐 건설 절차를 간소화하고, 수몰주민을 대상으로 조기에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환경연합은 관련 법률안에 대해 1997년 10월 국회에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지방자치시대의 기본이념인 참여민주주의 정신에 역행”한다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지역에 무분별하게 댐을 건설하여 국토의 생태계파괴와 지자체의 자치권과 지역주민의 생존권을 심각히 침해할 것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시기부터 전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은 댐 반대 운동에 나서 같은 해 11월 ‘무분별한 댐 건설 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동강 지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동강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대한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고 여름 바캉스 추천지로 언론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후 1992년부터는 동강이 래프팅 명소로 소개되면서 알려졌고, 때 묻지 않은 자연에 대한 오지탐험지로도 각광을 받게 됐다. 이어 동강 변에 있는 천연기념물 260호인 백룡동굴이 수몰위기에 처한 사연이 소개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강의 비경은 환경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1990년대 후반 환경연합에서 동강댐 반대 활동을 전개했던 김혜정 시민방사능감시센터 운영위원장은 “동강을 다녀오기만 하면, 동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만큼 동강이 지닌 뛰어난 경관에 사람들이 감탄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환경연합이 본격적으로 동강댐 백지화운동을 펼쳤던 1997년, 1998년에는 ‘동강댐 반대’보다 ‘동강을 지키자’라는 구도를 만들어 갔다는 것이 김혜정 위원장의 설명이다.
실제 ‘동강을 지키자’라는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동강 트레킹과 래프팅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골칫거리가 될 정도로 호응을 크게 얻었다. 언론들도 수몰될 위기에 처한 동강 관련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전문가, 국회의원, 문화예술인 등 사회각계 인사들의 동강 지키기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98년 1월을 기점으로 언론에서는 정부의 ‘영월댐’이란 표현 대신, 환경단체들의 ‘동강댐’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김혜정 위원장은 “영월댐이라고 하면 동강을 34개의 댐 지역 중 하나뿐이라고 좌시하는 프레임에 가두는 호칭”이라면서 “언론이 동강댐이라 표현한 것은 환경단체의 동강 지키기 프레임이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했다. 환경연합의 동강 지키기 뗏목 캠페인과 거리 서명운동 역시 큰 호응을 얻었다. 1999년 광화문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받았던 환경연합 최준호 국장은 “조선일보 김대중 논설위원(현 고문)도 서명에 참가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1999년 3월에 방영된 KBS 『환경스페셜』 ‘동강’편은 국민 여론을 동강댐 반대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오로지 동강의 비오리, 수달 및 자연 경관을 담았던 이 방송은 자연다큐로는 드물게 재방송이 편성되는 등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동강댐 관련 TV 토론에 출연했었던 김혜정 위원장은 “원래 토론이 끝난 후 시민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데, 동강댐 반대 여론이 80퍼센트가 넘어서 방송 관계자들이 정책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를 발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동강댐 백지화, 시민운동의 승리
동강에 대한 여론의 호응은 지역주민들과 자치단체들을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에 동참하게 만든 계기도 됐다. 국민 여론이 반대로 나서도 건교부와 수공 등은 동강댐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강댐 백지화가 곧 댐 건설 정책 전체의 중단을 초래할 상황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건교부가 제시한 동강댐 추진 주요 논리는 홍수 예방과 수도권 물 부족 해결에 동강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를 동원해 유엔이 한국을 물 부족국가로 분류했다고 선전하는 모양새가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 추진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동강댐이 갖고 있었던 기본적 문제점 중에는 이 지역이 석회암지대여서 수많은 동굴이 산재해 있고, 인근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등 댐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수자원공사가 제출한 환경영향평가도 부실했다. 환경연합의 조사를 통해 동강에 400여 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있음이 밝혀졌음에도 수공 조사에서는 30여 개뿐으로 기록됐고, 희귀종 등에 대해서도 누락되는 등 부실해 환경부마저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평가서’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물 수요 예측도 과장된 것이 확인됐다. 실제로 2011년 ‘물 부족 대란’이 있을 것이란 예측은 동강댐이 없었어도 생기지 않았다. 당시 건교부와 수공은 우리 국민이 1인당 하루 권장사용량의 2배가 넘는 398리터를 사용해 영국, 일본보다 2~4배 높다며, 이를 근거로 용수 부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1인당 급수량(수돗물 급수인구/수돗물 생산량)이지 실제 사용량은 아니었다. 물이 공급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는데, 96년 한 해 서울에서 누수된 물만 해도 6억4000만 톤으로 동강댐 저수용량과 맞먹는 상황이었다. 당시 환경연합은 성명서를 통해 “수도관 누수관리는 제쳐두고 댐 건설을 통해 공급부터 하겠다는 것은 밑 빠진 독은 고칠 생각을 않고 퍼부을 물만 늘려놓고 보자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동강댐은 2000년 3월 민관공동조사단의 조사를 바탕으로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백지화 선언이 나왔다. 환경연합은 즉각 환영 입장을 밝히면서 △동강댐 백지화는 시민운동의 승리 △동강댐 백지화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공생해야 한다는 환경의식이 확산되고 시민 스스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실천을 했기 때문에 가능 △동강댐 백지화는 사후처리 위주의 환경정책이 사전예방으로 전환될 가능성 제시 △동강댐 백지화는 공급위주의 자원정책을 수요관리 위주에서 재검토하는 사례 등으로 동강댐 백지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여기에 덧붙여 김혜정 위원장은 “시민 참여형 포지티브 운동으로서의 성공적 운동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동강댐 백지화 이후 생태계 보전 지역 확대와 지역의 경관,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생태관광 개념으로서 지역주민 소득 증대 등 정책 제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쉽다.”라고 지적했다.
2008년 11월 국토해양부(이하 국토부)는 동강댐 예정지였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거운리 일대를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으로 꼽았다. 수달, 어름치, 원앙,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과 동강할미꽃 등 미기록 종 등이 살고 있는 청정 생태분포지라는 것이 선정이유다. 10여 년 전 국토부의 전신인 건교부는 이런 사실을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변신이 진심은 아니라는 사실을 국토부는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국토부는 지금도 지리산의 명승지, 용담계곡을 수몰시키는 댐을 추진하고 있고, 청정생태가 보존된 양양 장파천에도 댐을 추진한다. 이런 식으로 전국 각지에 14개 댐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강인들 아름답지 않은가. 그곳에 깃든 수많은 생명과 역사, 문화가 없는 곳이 또 어디 있는가. 허황된 논리로 댐 건설을 추진하는 유령들의 정책은 동강의 포효하는 물줄기 앞에서 포말로 사라져야 마땅하다.
글•사진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