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핵폐기장 건설 현장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일본의 대표적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는 핵발전소를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고 칭했다. 일본에서 맨션이란 고급 아파트를 일컫는 표현이다. 겉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정작 화장실이 없어 분뇨가 쌓여가는 모습이 핵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핵발전소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화장실 없는 맨션
1950년대 핵무기에 사용되던 핵분열 기술을 이용해 발전소를 만들면서 당시 과학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면 핵폐기물, 특히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할 방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심지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서 끊임없이 사용하게 될 ‘핵연료 싸이클’도 조만간 완성되어 전기요금이 너무 싸서 ‘전기계량기가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유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대표적인 고준위핵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분할 기술은 아직도 개발 중이다. 핀란드에 세계 최초의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장이 건설되고 있으나 10만 년 이상 보관해야 하는 고준위핵폐기물의 특성상, 윤리성, 안전성, 신뢰성뿐만 아니라, 미래 후손들에게 위험성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0만 년간 처분장이 잘 버틸 수있을지도 쟁점이지만, 10만 년 뒤에 지구 상에 살고 있을 생명체(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에게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라는 어려운 문제까지 나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논의 시작한 핀란드
핀란드의 경우,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 논의를 1983년부터 시작했다. 핀란드는 이전에 일부 핵폐기물을 당시 소련에 위탁 처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제정된 핵발전법(Nuclear Power Act)은 핀란드에서 발생한 핵폐기물을 핀란드 내에서 처분한다는 원칙을 명시했다.
이와 함께 미래 세대를 보호하고, 이들에게 전가할 의무를 줄이는 것, 핵폐기장에 대한 정보를 미래 세대에게 알리는 것 등의 큰 틀의 원칙을 법률로 정했다.
이 원칙에 따라 핵폐기물 관리 책임이 핵발전사업자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고, 핵폐기물 처분시설의 운영, 핵발전소 폐로 및 해체를 위한 회사가 1995년 설립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핵폐기장 부지 선정이 추진되어 2000년, 인구 6000여 명의 작은 도시 에우라요키(Eurajoki)시가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높은 신뢰, 독립된 핵에너지 규제기관, 광범위한 정보 공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부지선정 이후 은둔자라는 뜻의 온카로(onkalo)로 명명된 이 핵폐기장은 2004년부터 인허가용 지하연구시설 건설이 시작되었고, 2015년 최종처분장 건설 허가가 발급됨에 따라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어 2023년 운영을 앞두고 있다.

건설중인 핀란드 온카로 핵폐기물 저장소 ⓒIAEA
그러나 핀란드 온카로 고준위 핵폐기장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은 아직 기술적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못했고, 반면 새로운 기술은 계속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대가 만든 핵폐기물에 대한 책임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많은 이들도 현재의 기술이 미래 세대에게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향후 12년간 부지선정 논의, 2053년 처분 시작?
반면 우리나라의 핵폐기장 논의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혼란에 빠져 있다. 1990년 안면도, 1994년 굴업도, 2003년 부안 등 굵직굵직한 핵폐기장 논쟁을 겪으며,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에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만 확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경주에 3000억 원 지원금과 고준위 핵폐기물 관련 시설을 짓지 않는다는 내용을 약속했다.
경주 방폐장 부지 선정 이후 정부는 다양한 포럼이나 위원회를 만들어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에 대해 정부가 논의하고 있다는 모습만 보여줬다. 2013년 출범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었지만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한 ‘그들만의 논의’였다는 비판이 계속 뒤따랐다. 결국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15명의 위원 중 시민단체 추천 2명과 원자력계 인사 1명 등 6명이 사퇴한 반쪽짜리 위원회로 2015년 활동을 마쳤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 7월 25일,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기본계획)’을 확정짓고, 그 계획을 구체화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절차에 관한 법률’을 8월 11일 입법 예고했다. 이번 기본계획과 법률은 작년 발표된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5년 안에 정하기로 했던 핵폐기장 부지는 12년으로 늘어났고, 지하 연구시설(연구용 URL)과 처분장을 한 장소에 두기로 한 것은 필수사항이 아닌 것으로 변경되었다. 기간 변경에 따라 부지선정은 2028년까지 완료하고 이후 고준위 핵폐기물 중간저장시설과 최종처분장 건설이 진행되어 각각 2035년과 2053년 운영이 시작될 것으로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방침에 핵발전소 지역 모두 반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고준위핵폐기물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과의 기본적인 소통은 이뤄지지 않았고, 핵발전소 추가 증설까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은 핵발전소 증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핵발전소 지역 갈등은 ‘임시저장문제’

주민투표를 거쳐 중저준위핵폐기장을 유치한 경주의 초기 민심은 유치가 아니라 ‘결사반대’였다 ⓒ경주환경운동연합
한편 정부와 한수원은 2019년 경주 월성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전국의 핵발전소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가 포화된다며 대책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임시 저장고가 포화되면 핵발전소 가동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포화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계획안에서 이 문제는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냥 각 핵발전소마다 ‘임시저장고’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임시저장고 건설에 7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미 경주에는 이 임시저장고가 건설되고 있고, 영광과 부산은 내년부터 건설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경주의 경우, 2005년 중저준위 핵폐기장 주민투표 당시 고준위 핵폐기물 관련 시설은 짓지 않겠다고 법률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임시저장고가 포화되자, 정부는 법률에서 약속한 시설은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이며, 이번에 지으려는 시설은 ‘핵발전소 관계 시설’이라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 2개의 시설이 설계와 외형, 기능상 같은 시설이라는 것을 정부도 알고 있다.
2024년 임시저장고 포화가 예정되어 있는 영광 핵발전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간 영광 지역주민들은 어떠한 추가 핵시설의 건설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 입장에 따라 공론화위원회의 논의 자체를 거부해왔다. 이는 공론화위원회에 일부 의견을 제출한 고리, 신고리, 울진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설계수명이 40~50년에 이르는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고는 말로는 ‘임시’라고 하지만 사실상 인간의 일생에 버금가는 기간이다.
이번 계획 안에서 정부는 2035년까지는 중간저장 시설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강제하는 법조항은 없다. 설사 법조항이 있다 한들 경주의 사례를 보면 이 임시저장이 진짜 임시인지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포기 않는 헛된 희망, 해외처분장
또 하나 이번 계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부 스스로 해외 처분장 건설계획을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정부 관계자는 기자회견 질의응답을 통해 ‘남호주 주정부의 계획’을 언급했다. 최근 도요타 호주공장 철수와 경기 침체 등을 우려한 남호주 주정부는 우라늄 광산터에 외국의 고준위핵폐기물을 저장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직은 지역의견 수렴 중인 이 계획이 실현될 경우 우리나라 핵폐기물을 보낼 수 있다고 정부가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핵산업계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도덕적 윤리적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해상 운송과정에서 일본이나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반발이 높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를 대안으로 채택한다면 국내 저항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정부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라
그간 탈핵진영 내부에서조차 고준위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어렵거나 당장 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사이 정부와 핵산업계는 자신의 논리를 계속 가다듬고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그 결정체가 이번에 발표된 고준위핵폐기물 관리 계획안이다.
정부는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 문제되는 ‘임시저장고 문제’는 당연한 것처럼 슬쩍 넘기고, 40여년 뒤인 2053년에야 문제가 시작될 것처럼 관심사를 돌렸다. 또한 외국에도 핵폐기물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여지를 남겨두어 자신들이 다양한 해법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는 혜안이다.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는 수십 년 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그리고 향후 12년간 지속된다는 부지선정 과정이 아니라, 현재 경주에 건설되고 있으며, 내년부터 착공에 들어가야 하는 영광과 부산의 임시저장고 문제이다.
정부는 ‘임시’라고 하지만 아무도 언제까지 운영될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 바로 그 저장고 말이다.
글 |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경주핵폐기장 건설 현장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일본의 대표적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는 핵발전소를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고 칭했다. 일본에서 맨션이란 고급 아파트를 일컫는 표현이다. 겉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정작 화장실이 없어 분뇨가 쌓여가는 모습이 핵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핵발전소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화장실 없는 맨션
1950년대 핵무기에 사용되던 핵분열 기술을 이용해 발전소를 만들면서 당시 과학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면 핵폐기물, 특히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할 방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심지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서 끊임없이 사용하게 될 ‘핵연료 싸이클’도 조만간 완성되어 전기요금이 너무 싸서 ‘전기계량기가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유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대표적인 고준위핵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분할 기술은 아직도 개발 중이다. 핀란드에 세계 최초의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장이 건설되고 있으나 10만 년 이상 보관해야 하는 고준위핵폐기물의 특성상, 윤리성, 안전성, 신뢰성뿐만 아니라, 미래 후손들에게 위험성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0만 년간 처분장이 잘 버틸 수있을지도 쟁점이지만, 10만 년 뒤에 지구 상에 살고 있을 생명체(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에게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라는 어려운 문제까지 나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논의 시작한 핀란드
핀란드의 경우,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 논의를 1983년부터 시작했다. 핀란드는 이전에 일부 핵폐기물을 당시 소련에 위탁 처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제정된 핵발전법(Nuclear Power Act)은 핀란드에서 발생한 핵폐기물을 핀란드 내에서 처분한다는 원칙을 명시했다.
이와 함께 미래 세대를 보호하고, 이들에게 전가할 의무를 줄이는 것, 핵폐기장에 대한 정보를 미래 세대에게 알리는 것 등의 큰 틀의 원칙을 법률로 정했다.
이 원칙에 따라 핵폐기물 관리 책임이 핵발전사업자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고, 핵폐기물 처분시설의 운영, 핵발전소 폐로 및 해체를 위한 회사가 1995년 설립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핵폐기장 부지 선정이 추진되어 2000년, 인구 6000여 명의 작은 도시 에우라요키(Eurajoki)시가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높은 신뢰, 독립된 핵에너지 규제기관, 광범위한 정보 공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부지선정 이후 은둔자라는 뜻의 온카로(onkalo)로 명명된 이 핵폐기장은 2004년부터 인허가용 지하연구시설 건설이 시작되었고, 2015년 최종처분장 건설 허가가 발급됨에 따라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어 2023년 운영을 앞두고 있다.
건설중인 핀란드 온카로 핵폐기물 저장소 ⓒIAEA
그러나 핀란드 온카로 고준위 핵폐기장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은 아직 기술적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못했고, 반면 새로운 기술은 계속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대가 만든 핵폐기물에 대한 책임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많은 이들도 현재의 기술이 미래 세대에게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향후 12년간 부지선정 논의, 2053년 처분 시작?
반면 우리나라의 핵폐기장 논의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혼란에 빠져 있다. 1990년 안면도, 1994년 굴업도, 2003년 부안 등 굵직굵직한 핵폐기장 논쟁을 겪으며,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에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만 확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경주에 3000억 원 지원금과 고준위 핵폐기물 관련 시설을 짓지 않는다는 내용을 약속했다.
경주 방폐장 부지 선정 이후 정부는 다양한 포럼이나 위원회를 만들어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에 대해 정부가 논의하고 있다는 모습만 보여줬다. 2013년 출범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었지만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한 ‘그들만의 논의’였다는 비판이 계속 뒤따랐다. 결국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15명의 위원 중 시민단체 추천 2명과 원자력계 인사 1명 등 6명이 사퇴한 반쪽짜리 위원회로 2015년 활동을 마쳤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 7월 25일,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기본계획)’을 확정짓고, 그 계획을 구체화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절차에 관한 법률’을 8월 11일 입법 예고했다. 이번 기본계획과 법률은 작년 발표된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5년 안에 정하기로 했던 핵폐기장 부지는 12년으로 늘어났고, 지하 연구시설(연구용 URL)과 처분장을 한 장소에 두기로 한 것은 필수사항이 아닌 것으로 변경되었다. 기간 변경에 따라 부지선정은 2028년까지 완료하고 이후 고준위 핵폐기물 중간저장시설과 최종처분장 건설이 진행되어 각각 2035년과 2053년 운영이 시작될 것으로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방침에 핵발전소 지역 모두 반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고준위핵폐기물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과의 기본적인 소통은 이뤄지지 않았고, 핵발전소 추가 증설까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은 핵발전소 증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핵발전소 지역 갈등은 ‘임시저장문제’
주민투표를 거쳐 중저준위핵폐기장을 유치한 경주의 초기 민심은 유치가 아니라 ‘결사반대’였다 ⓒ경주환경운동연합
한편 정부와 한수원은 2019년 경주 월성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전국의 핵발전소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가 포화된다며 대책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임시 저장고가 포화되면 핵발전소 가동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포화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계획안에서 이 문제는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냥 각 핵발전소마다 ‘임시저장고’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임시저장고 건설에 7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미 경주에는 이 임시저장고가 건설되고 있고, 영광과 부산은 내년부터 건설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경주의 경우, 2005년 중저준위 핵폐기장 주민투표 당시 고준위 핵폐기물 관련 시설은 짓지 않겠다고 법률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임시저장고가 포화되자, 정부는 법률에서 약속한 시설은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이며, 이번에 지으려는 시설은 ‘핵발전소 관계 시설’이라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 2개의 시설이 설계와 외형, 기능상 같은 시설이라는 것을 정부도 알고 있다.
2024년 임시저장고 포화가 예정되어 있는 영광 핵발전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간 영광 지역주민들은 어떠한 추가 핵시설의 건설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 입장에 따라 공론화위원회의 논의 자체를 거부해왔다. 이는 공론화위원회에 일부 의견을 제출한 고리, 신고리, 울진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설계수명이 40~50년에 이르는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고는 말로는 ‘임시’라고 하지만 사실상 인간의 일생에 버금가는 기간이다.
이번 계획 안에서 정부는 2035년까지는 중간저장 시설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강제하는 법조항은 없다. 설사 법조항이 있다 한들 경주의 사례를 보면 이 임시저장이 진짜 임시인지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포기 않는 헛된 희망, 해외처분장
또 하나 이번 계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부 스스로 해외 처분장 건설계획을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정부 관계자는 기자회견 질의응답을 통해 ‘남호주 주정부의 계획’을 언급했다. 최근 도요타 호주공장 철수와 경기 침체 등을 우려한 남호주 주정부는 우라늄 광산터에 외국의 고준위핵폐기물을 저장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직은 지역의견 수렴 중인 이 계획이 실현될 경우 우리나라 핵폐기물을 보낼 수 있다고 정부가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핵산업계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도덕적 윤리적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해상 운송과정에서 일본이나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반발이 높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를 대안으로 채택한다면 국내 저항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정부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라
그간 탈핵진영 내부에서조차 고준위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어렵거나 당장 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사이 정부와 핵산업계는 자신의 논리를 계속 가다듬고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그 결정체가 이번에 발표된 고준위핵폐기물 관리 계획안이다.
정부는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 문제되는 ‘임시저장고 문제’는 당연한 것처럼 슬쩍 넘기고, 40여년 뒤인 2053년에야 문제가 시작될 것처럼 관심사를 돌렸다. 또한 외국에도 핵폐기물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여지를 남겨두어 자신들이 다양한 해법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는 혜안이다.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는 수십 년 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그리고 향후 12년간 지속된다는 부지선정 과정이 아니라, 현재 경주에 건설되고 있으며, 내년부터 착공에 들어가야 하는 영광과 부산의 임시저장고 문제이다.
정부는 ‘임시’라고 하지만 아무도 언제까지 운영될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 바로 그 저장고 말이다.
글 |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