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는 발표된 후 관객과 미술 평단을 넘어 미학과 철학, 언어학계에까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이 도발적 작품이 표제와 이미지의 인위적 괴리를 만들며 던진 질문은 100년 가까이 지나서도 연구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관습과 고정관념의 배신이 개인과 사회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미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자본이라는 물적 재화를 움직이는 정책에 대한 리뷰다. 그러나 그냥 건조하게 시작하기에는 환경부와 산업계의 합작품이라 부를 수도 있을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K-Taxonomy, 이하 녹색분류체계)’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녹색분류체계는 무엇인가
녹색분류체계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여러 차례의 국제회의, 몇 편의 결정적 연구 보고서들 속에서 기후위기는 전 세계인의 교양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세계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직접적 기후 행동의 물결과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펼쳐지는 기후재앙을 겪으며 세계 주요국이 모두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
목표엔 필연적으로 계획이 따르고, 계획을 수행하려면 기존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해 온 종래의 시스템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단순히 특정한 연료와 기술에 대한 의존만을 수정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대자연에 대한 정복과 착취에 기반을 둔 성장주의 혹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어쨌건, 녹색분류체계는 비교적 보수적인 전자의 해법을 따른다. 화석연료 등에 의존하는 고탄소 시스템을 전환하려면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기존의 것을 대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존 금융 체계의 논리를 따르는 자본이 움직여야 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이 전환 과정에서 매년 우리 돈 300조 원 정도가 유럽 내에서 신규 투자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전환을 위한 자본이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으려면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EU가 나서서 ‘EU 지속가능분류체계(EU-Taxonomy)’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이유다. 한국도 EU의 작업을 따라 산업계와 투자업계에 시그널을 형성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수립에 착수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녹색분류체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정부의 예산을 통한 직접 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연금, 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같은 공적 금융기관들이 국내 금융계의 큰손이니만큼 정부의 분류체계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겠지만, 녹색분류체계는 본질적으로 정부가 ‘시장’에게 녹색산업에 투자하라고 신호를 주는 참고용 가이드라인에 가깝다.

지난 1월 5일 국내 최대 탈석탄연대인 <석탄을 넘어서>는 주요 대선 후보들의 탈석탄 정책을 비교하는 '석탄 치우기 대회'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날로 심화하는 기후위기에도 미온적인 입장인 대선 후보들에게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 등이 담긴 강력한 기후 공약을 촉구했다 ⓒ환경운동연합
“자, 이것은 녹색입니다!”
녹색산업으로의 투자 유도를 위한 녹색분류체계 수립은, 정부가 무엇이 ‘녹색’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규정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디로 돈이 흘러들게 할 것이냐?’를 넘어 이 작업은 필연적으로 매우 정치적이고 나아가 철학적 논란을 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제 녹색분류체계의 주요 쟁점 내용을 살펴보자.
‘녹색부문’과 ‘전환부문’으로 나뉘어 69개의 경제활동을 ‘녹색경제활동’으로 규정한 정부의 녹색분류체계는 우리의 ‘녹색’에 대한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정부가 고뇌하는 사안이 무엇인지도 엿볼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철강·시멘트·유기화학물질 제조가 모두 녹색경제활동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세 분야는 현재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산업 분야다. 원칙적으로는 ‘녹색’이 될 수 없겠지만 정부는 ‘배출원 단위가 상대적으로 낮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말하자면 기존의 철강·시멘트·유기화학물 제조 방식보다 온실가스를 덜 배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녹색 경제활동으로서 신규 투자를 조달할 수 있다. 산업계가 배출량을 줄이기 어렵다고 생떼를 쓰며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상향을 반대했던 것을 상기하면, 정부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녹색이 안 되는 것들을 녹색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돈으로.
‘수소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집착 역시 읽을 수 있다. 수소는 녹색분류체계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수소 제조부터 수소 기반 에너지 생산, 저장, 이송 및 관련 인프라 구축까지 모두 녹색 경제활동이다. 수소야 그 자체로는 온실가스나 오염물질이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국내의 수소가 대부분 ‘그레이 수소’나 ‘블루 수소’라 부르는 화석연료의 사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생·추출 수소라는 점이다. 이런 수소는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배출량 전 과정 평가를 하면 그다지 친환경적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수소 제조’ 항목에서는 재생에너지를 통해 생산한 ‘그린 수소’ 제조만이 녹색 경제활동이라고 분류하면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그레이·블루’라도 수소를 활용하는 경제활동이라면 ‘녹색’으로 분류하는 타협을 택했다. 국내에 아직 그린 수소가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 생산·저장·이송 등의 활동에까지 ‘그린 수소 활용’이라는 인정기준을 적용하면, 누구도 녹색분류체계로 투자 유치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레이·블루 수소 활용으로 투자를 유치한 인프라가 우후죽순 생기고 나면, 향후에 그린수소를 위한 인프라로도 활용될 수 있을까? 뭘로 만들었건 같은 수소니까 기술적으로는 가능하겠으나 비싼 에너지원인 그린수소가 인프라의 수요만큼 공급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단 「수소경제법」까지 만든 우리 정부는 일단 ‘수소’자만 들어가면 다 녹색으로 인정해줬다.
화석연료도 녹색
녹색분류체계 수립 과정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LNG 발전의 녹색분류체계 포함 여부였다. 화석연료 설비가 녹색경제활동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여기엔 오랜 논변이 있다. 석탄발전소는 온실가스·대기오염물질 모두 최대의 단일 배출원이다. 말하자면 ‘주적’이다. 그런데 현재 석탄발전소는 발전 비중이 무려 40%에 이른다. 이 거대한 적을 쫓아내려면 잠시 가스발전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니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LNG를 ‘브릿지 에너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러모로 검토해봐야 하겠지만 에너지전환 측면에서 기술적으로는 일견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녹색분류체계’에 LNG를 포함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화석연료가 녹색일 수 없다는 원칙을 차치하더라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서 LNG 발전이 브릿지 에너지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니다. 녹색분류체계는 녹색산업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을 위한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LNG 발전을 메뉴로 제시하는 건 매우 무책임하다. ‘브릿지 에너지’라면 제한적 조건 안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할 텐데 여기에 녹색 금융의 막대한 투자는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말 그대로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는 LNG 발전의 퇴출 시점도 곧 가시화되어야 한다. 즉, 언제 좌초자산이 될지 모르는 산업을 ‘녹색’이라고 투자를 권유하는 것인데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녹색분류체계가 ‘녹색부문’과 ‘전환부문’으로 조악하게 세부 부문을 나눈 건 이 때문이다. LNG 발전은 ‘전환부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전환 과정에서 한시적으로만 녹색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이상한 가이드라인은 LNG 업계 등의 반발에 정치적 굴복을 한 모양새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탈석탄연대 활동가가 2030 탈석탄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이것은 녹색이 아니다
녹색분류체계는 마그리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금융시장와 산업계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 이것은 녹색입니다. 여기에 투자하세요.’ 그러나 미술 평단이 그랬던 것처럼 재계도 이 녹색의 규정에 대해 질문과 사유를 할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녹색이란 무엇인지, 분류체계의 항목들이 정말 녹색인지 따져보는 것이 아니다. 정부로부터 녹색이라고 인증된 것에 투자했다는 ‘결과물’만이 그들의 관심사다.
정부 역시 메시지 혹은 사회적 학습효과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는 마찬가지다. 녹색분류체계는 전반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 자연히, 온실가스 배출이 적다는 것을 논리로 슬그머니 원자력계가 녹색의 판에 끼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안전문제, 핵폐기물, 주민피해와 같은 원자력 발전의 고질적 문제는 원자력이 녹색의 축에 드는데 결격사유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기후위기 대응은 당면한 지상의 과제다. 그러나 언제부터 ‘녹색’이 온실가스 배출량만으로 그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색이었던가. 생명의 철학, 공존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성찰 없이 ‘녹색’을 규정할 수는 없다. 녹색분류체계의 수립으로 당장 여기에 포함된 산업계가 돈 잔치를 벌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온 산업계가 ‘녹색’의 이름을 얻고 싶어 했을까.
이는 정치적이고 철학적 투쟁의 한 장면이었다. 생태적 절멸의 위기 앞에서 전환을 부정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면 전환 사회는 무엇인가. 그 전환의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녹색이라 이름 붙일 수 있고, 그 호명은 누가 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제 이 모든 것이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다.
그럼 스스로 녹색의 진영에 있다고 믿던 이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본이 어디로, 얼마나 흘러 들어가는지 어떤 기술이 개발·도입되는지 쫓아다니는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길, 녹색의 원칙을 재확인해야 할 때다.
| 권우현 환경운동연합 기후에너지국 활동가
20세기 초,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는 발표된 후 관객과 미술 평단을 넘어 미학과 철학, 언어학계에까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이 도발적 작품이 표제와 이미지의 인위적 괴리를 만들며 던진 질문은 100년 가까이 지나서도 연구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관습과 고정관념의 배신이 개인과 사회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미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자본이라는 물적 재화를 움직이는 정책에 대한 리뷰다. 그러나 그냥 건조하게 시작하기에는 환경부와 산업계의 합작품이라 부를 수도 있을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K-Taxonomy, 이하 녹색분류체계)’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녹색분류체계는 무엇인가
녹색분류체계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여러 차례의 국제회의, 몇 편의 결정적 연구 보고서들 속에서 기후위기는 전 세계인의 교양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세계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직접적 기후 행동의 물결과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펼쳐지는 기후재앙을 겪으며 세계 주요국이 모두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
목표엔 필연적으로 계획이 따르고, 계획을 수행하려면 기존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해 온 종래의 시스템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단순히 특정한 연료와 기술에 대한 의존만을 수정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대자연에 대한 정복과 착취에 기반을 둔 성장주의 혹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어쨌건, 녹색분류체계는 비교적 보수적인 전자의 해법을 따른다. 화석연료 등에 의존하는 고탄소 시스템을 전환하려면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기존의 것을 대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존 금융 체계의 논리를 따르는 자본이 움직여야 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이 전환 과정에서 매년 우리 돈 300조 원 정도가 유럽 내에서 신규 투자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전환을 위한 자본이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으려면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EU가 나서서 ‘EU 지속가능분류체계(EU-Taxonomy)’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이유다. 한국도 EU의 작업을 따라 산업계와 투자업계에 시그널을 형성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수립에 착수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녹색분류체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정부의 예산을 통한 직접 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연금, 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같은 공적 금융기관들이 국내 금융계의 큰손이니만큼 정부의 분류체계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겠지만, 녹색분류체계는 본질적으로 정부가 ‘시장’에게 녹색산업에 투자하라고 신호를 주는 참고용 가이드라인에 가깝다.
지난 1월 5일 국내 최대 탈석탄연대인 <석탄을 넘어서>는 주요 대선 후보들의 탈석탄 정책을 비교하는 '석탄 치우기 대회'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날로 심화하는 기후위기에도 미온적인 입장인 대선 후보들에게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 등이 담긴 강력한 기후 공약을 촉구했다 ⓒ환경운동연합
“자, 이것은 녹색입니다!”
녹색산업으로의 투자 유도를 위한 녹색분류체계 수립은, 정부가 무엇이 ‘녹색’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규정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디로 돈이 흘러들게 할 것이냐?’를 넘어 이 작업은 필연적으로 매우 정치적이고 나아가 철학적 논란을 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제 녹색분류체계의 주요 쟁점 내용을 살펴보자.
‘녹색부문’과 ‘전환부문’으로 나뉘어 69개의 경제활동을 ‘녹색경제활동’으로 규정한 정부의 녹색분류체계는 우리의 ‘녹색’에 대한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정부가 고뇌하는 사안이 무엇인지도 엿볼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철강·시멘트·유기화학물질 제조가 모두 녹색경제활동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세 분야는 현재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산업 분야다. 원칙적으로는 ‘녹색’이 될 수 없겠지만 정부는 ‘배출원 단위가 상대적으로 낮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말하자면 기존의 철강·시멘트·유기화학물 제조 방식보다 온실가스를 덜 배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녹색 경제활동으로서 신규 투자를 조달할 수 있다. 산업계가 배출량을 줄이기 어렵다고 생떼를 쓰며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상향을 반대했던 것을 상기하면, 정부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녹색이 안 되는 것들을 녹색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돈으로.
‘수소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집착 역시 읽을 수 있다. 수소는 녹색분류체계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수소 제조부터 수소 기반 에너지 생산, 저장, 이송 및 관련 인프라 구축까지 모두 녹색 경제활동이다. 수소야 그 자체로는 온실가스나 오염물질이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국내의 수소가 대부분 ‘그레이 수소’나 ‘블루 수소’라 부르는 화석연료의 사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생·추출 수소라는 점이다. 이런 수소는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배출량 전 과정 평가를 하면 그다지 친환경적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수소 제조’ 항목에서는 재생에너지를 통해 생산한 ‘그린 수소’ 제조만이 녹색 경제활동이라고 분류하면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그레이·블루’라도 수소를 활용하는 경제활동이라면 ‘녹색’으로 분류하는 타협을 택했다. 국내에 아직 그린 수소가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 생산·저장·이송 등의 활동에까지 ‘그린 수소 활용’이라는 인정기준을 적용하면, 누구도 녹색분류체계로 투자 유치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레이·블루 수소 활용으로 투자를 유치한 인프라가 우후죽순 생기고 나면, 향후에 그린수소를 위한 인프라로도 활용될 수 있을까? 뭘로 만들었건 같은 수소니까 기술적으로는 가능하겠으나 비싼 에너지원인 그린수소가 인프라의 수요만큼 공급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단 「수소경제법」까지 만든 우리 정부는 일단 ‘수소’자만 들어가면 다 녹색으로 인정해줬다.
화석연료도 녹색
녹색분류체계 수립 과정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LNG 발전의 녹색분류체계 포함 여부였다. 화석연료 설비가 녹색경제활동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여기엔 오랜 논변이 있다. 석탄발전소는 온실가스·대기오염물질 모두 최대의 단일 배출원이다. 말하자면 ‘주적’이다. 그런데 현재 석탄발전소는 발전 비중이 무려 40%에 이른다. 이 거대한 적을 쫓아내려면 잠시 가스발전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니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LNG를 ‘브릿지 에너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러모로 검토해봐야 하겠지만 에너지전환 측면에서 기술적으로는 일견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녹색분류체계’에 LNG를 포함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화석연료가 녹색일 수 없다는 원칙을 차치하더라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서 LNG 발전이 브릿지 에너지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니다. 녹색분류체계는 녹색산업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을 위한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LNG 발전을 메뉴로 제시하는 건 매우 무책임하다. ‘브릿지 에너지’라면 제한적 조건 안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할 텐데 여기에 녹색 금융의 막대한 투자는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말 그대로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는 LNG 발전의 퇴출 시점도 곧 가시화되어야 한다. 즉, 언제 좌초자산이 될지 모르는 산업을 ‘녹색’이라고 투자를 권유하는 것인데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녹색분류체계가 ‘녹색부문’과 ‘전환부문’으로 조악하게 세부 부문을 나눈 건 이 때문이다. LNG 발전은 ‘전환부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전환 과정에서 한시적으로만 녹색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이상한 가이드라인은 LNG 업계 등의 반발에 정치적 굴복을 한 모양새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탈석탄연대 활동가가 2030 탈석탄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이것은 녹색이 아니다
녹색분류체계는 마그리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금융시장와 산업계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 이것은 녹색입니다. 여기에 투자하세요.’ 그러나 미술 평단이 그랬던 것처럼 재계도 이 녹색의 규정에 대해 질문과 사유를 할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녹색이란 무엇인지, 분류체계의 항목들이 정말 녹색인지 따져보는 것이 아니다. 정부로부터 녹색이라고 인증된 것에 투자했다는 ‘결과물’만이 그들의 관심사다.
정부 역시 메시지 혹은 사회적 학습효과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는 마찬가지다. 녹색분류체계는 전반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 자연히, 온실가스 배출이 적다는 것을 논리로 슬그머니 원자력계가 녹색의 판에 끼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안전문제, 핵폐기물, 주민피해와 같은 원자력 발전의 고질적 문제는 원자력이 녹색의 축에 드는데 결격사유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기후위기 대응은 당면한 지상의 과제다. 그러나 언제부터 ‘녹색’이 온실가스 배출량만으로 그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색이었던가. 생명의 철학, 공존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성찰 없이 ‘녹색’을 규정할 수는 없다. 녹색분류체계의 수립으로 당장 여기에 포함된 산업계가 돈 잔치를 벌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온 산업계가 ‘녹색’의 이름을 얻고 싶어 했을까.
이는 정치적이고 철학적 투쟁의 한 장면이었다. 생태적 절멸의 위기 앞에서 전환을 부정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면 전환 사회는 무엇인가. 그 전환의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녹색이라 이름 붙일 수 있고, 그 호명은 누가 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제 이 모든 것이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다.
그럼 스스로 녹색의 진영에 있다고 믿던 이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본이 어디로, 얼마나 흘러 들어가는지 어떤 기술이 개발·도입되는지 쫓아다니는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길, 녹색의 원칙을 재확인해야 할 때다.
| 권우현 환경운동연합 기후에너지국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