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 하네!”
사람의 언어생활이란 흔히 아주 터무니없을 정도로 상스럽다. 그런 탓에 인간 이외의 종들의 생태적 진실이나 능력을 간단하게 무시하곤 한다. 맥락 없는 언어, 거짓과 협잡의 언어를 지칭하는 개소리는 개에 대한 대표적인 인간의 편견을 드러내는 말이다. 개의 언어에는 거짓이 없다는 게 생태적 진실이다. 개는 거짓말이나 협잡, 맥락 없는 발화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소리는 개를 모욕하는 말이다. 개는 감정과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개의 언어와 행동양식 속에서만 개로 존재할 수 있다. 자기를 벗어난 존재는 이미 그 존재가 아니다. 개는 자기 종 아래로 떨어지거나 자기 종 이상으로 높아져 초월하려는 욕망 자체를 갖지 않는다. 개의 소리는 솔직한 자기표현이지 ‘개소리’일 수 없다. 인간만이 개소리를 한다. 개소리는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인간의 소리, 인간의 말이다.
어떤 말을 개소리로 정의할 수 있는가?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프리스턴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도덕철학자)는 개소리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려 시도한 첫 번째 철학자는 아니지만, 개소리에 대한 논구를 책으로 엮어낸 첫 번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지난 2005년 『ON BULLSHIT』를 냈다. 국내에 『개소리에 대하여』(PURUN, 2016)로 번역된 그 책에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를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하는 언어의 조작’으로 정의했다. 이 하나의 정의로 개소리가 완전히 규명되는 건 아니다. 개소리가 발화되는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개소리에 대한 그의 규명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개소리를 개소리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개소리를 발하는 사회역사적 존재, ‘개소리쟁이’이기 때문이다.
개소리쟁이들은 모두 사회와 역사 속에서 실존하는 자들이다. 바로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자들이다.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의 맥락 속에 있는 자인가를 알아보는 건 거의 즉각적으로 가능하다. 찬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실의 규명 따윈 관심 없다면 그는 개소리쟁이다. 책임은 없고 효과는 큰 말을 즐기는 자라면 그는 개소리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자, 개소리쟁이다. 어떤 말이 개소리쟁이의 말인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이런 말들은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개소리다. 인간의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이 나고 불리한 것은 모두 소거되는 방식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고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통해 기원전의 철인은 일갈했다. 저런 말들은 그저 법이 기억 재생 불능을 범죄의 성립요소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개소리들일 뿐이다. 법이 허용한 무책임성의 그늘 아래 개소리는 자유롭다.
“친구를 잘못 만났을 뿐 그는 무죄다.”
“부모를 총탄에 여윈 불쌍한 사람이다.”
“그가 잘못되면 군이 총을 들고 계엄을 해야 한다.”
이런 말들도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개소리다. 친구의 꼬임에 빠진 권력자의 죄는 가중처벌의 대상이지 무죄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할 만한 말도 아니다. 그 전쟁에서 부모를 총탄에 잃었으되 우리 공동체의 건설과 유지에 일조한 수많은 연로한 국민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사회다. 저 말은 죄 지은 자를 변호하기 위해 무고한 자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개소리다. 또한 군사 쿠데타를 권하는 명백한 개소리다. 이런 개소리들은 사적 대화나 광장의 외침으로 발화된다. 사밀한 대화는 처벌하기 어렵고 광장의 외침은 의사표현의 자유와 법적으로 다투기 때문에 처벌이 힘들다. 법이 허용한 무책임성의 그늘 아래 개소리들은 자유롭다.
자유로운 개소리들은 그러나 힘이 있다. 개소리는 전염된다. 듣는 귀가 당대를 이룩해온 역사에 대해, 당대의 사회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고 견해가 없다면 그 귀는 쉽게 개소리의 먹이가 되고 또 다른 개소리를 발하는 입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 온전한 이해를 한 뒤 말하더라도 오류 가능성이 엄존한다. 그것이 말이다. 말의 무게가 온실기체처럼 가벼워진 시대라 내뱉고 나서 제가 한 말도 잊어버리고들 하지만 디지털 월드에서 그 가벼운 말은 0과 1로 변환되어 개소리쟁이가 자연수명을 다한 뒤에도 온라인 네트 속을 떠돌 것이다. 개소리들과 진실에 복무하는 말들의 비중은 너무나도 격차가 커서 종종 진실을 따르려는 말들은 개소리의 거대한 파랑 속에서 침몰한다. 공동체가 최초의 개소리를 온 힘을 다해 공론장에서 내쫓아야 하는 이유다.
맥락이 없기 때문에 개소리들은 듣는 귀에게 불신을 사지만, 한편 일말의 진실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불러일으킨다. 그게 바로 개소리의 원래 목적이다. 듣는 귀들에게 ‘혹시?’ 하는 의구심을 불러오고 진실의 말까지 ‘혹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소리는 대부분 발화자의 숨겨진 욕망을 위해 봉사할 뿐 진실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실을 훼손해야 한다는 사명감조차 없다. 그래서 개소리는 ‘늘 참이 아니어야 하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때그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맥락이 없어서 개소리는 자유롭다. 텍스트만 존재할 뿐 콘텍스트가 없는 말을 이해하고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는 수고는 도로다. 상대에게 그런 헛일을 시키고 개소리쟁이들은 욕망을 충족한 뒤 손을 턴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나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게 당대의 유행인 프레임론이다.
“언제 적 일인데 이제와 쫀쫀하게 이러는가?”
“그게 왜 내 탓인가, 같이 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무식해 몰랐다. 그런데 너는 왜 그 때 나를 말리지 않았는가?”
‘오류로 판명되면 형벌을 받는 법적 언어’로써 말해야 할 때 ‘도덕의 물렁한 심판을 받는 윤리적 언어’로써 말하고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다시 윤리적 언어와 법적 언어를 바꾸어 발해지는 말들이 바로 개소리다. 4대강사업이 잘못되면 “내가 역사의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환경부 장관이 있었다. 그때 그는 공학적 진실, 생태적 진실, 인간의 진실을 걸며 4대강사업을 말리고 따지는 국회의원들, 학자들, 환경운동가들에게 자신의 윤리적 언어로 답했다. 그 사업 이후 4대강은 녹조가 피고 물고기들이 사라져가는 죽은 강이 됐다. 그리고 오늘 그는 ‘정책을 처벌할 수는 없다.’는 법적 언명 아래 숨어 있다. 개소리로 판명되어도 개소리쟁이들은 무지하거나 뻔뻔하다는 비난만 들으면 될 뿐 책임을 지는 건 아니다. 개소리쟁이들은 그런 비난을 아주 달게, 문자 그대로 감수한다. 아니 사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개소리들의 무책임성은 그렇게 위력적이고 그토록 유용하다!
“4000억 원이면 몰라도 고작 400억 원을 쩨쩨하게 뇌물이라고 줄 리 있겠는가?”
법관이 재벌 총수의 구속을 기각했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과 그의 경제공동체인 비선실세에게 준 400억 원 대의 ‘뇌물’ 공여 혐의를 받고 있었고, 부적절한 절차로 동원된 국민 연기금으로 4000억 원짜리 ‘기업합병’을 성공시켰던 재벌이었다. 법관은 그 재벌의 영장을 기각하고 풀어주며 기각의 변을 저리 토로했다. 법의 언어로만 말해야 하는 공간에서 법관은 품행이나 기질을 판단하는 윤리의 언어로 판결했다. 개소리다.
개소리가 만연해 무엇이 진실을 가리키는 말인지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판단은 더 꼬이다 못해 ‘모두가 도둑놈!’이거나 ‘죄 한 점 없는 자만 그를 돌로 쳐라!’라는 ‘판단 피로’에 빠지고 ‘판단 불능’에 이르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의 말로 그를 판단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행위로 그를 판단하는 게 현명하다. 지금의 말로밖에 그를 판단할 수 없다면 그를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판단하면 된다. 그의 말이 달디 단가? 그렇다면 그는 개소리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땐 그와 그의 말을 판단하기 위해 판단을 중지하고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게 옳다.
왜 귀에 단 말을 의심해야 하는가? 개소리는 자신에게 관대한 인간의 본성에 이런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잖아. 함께 어울리며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자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진실의 맥락은 시들고 개소리는 개소리쟁이를 늘리며 그들의 연대를 키운다. 자신의 과오 가능성을 늘 의식하는 자라야 개소리의 발화자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개소리쟁이로 살면 끝은 개판일 뿐이다.
속일 줄 모르는 순정한 짐승을 모멸의 언어로 사용하는 인간의 말법이 슬프다. 그조차 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제 멋대로 해석한 최초의 인간, 그의 몰이해가 대를 이어 새끼를 친 결과다. 개소리라고 그 아름다운 짐승의 발성에 담긴 의미를 왜곡한 인간의 탓이다. 개는 무죄고 개소리하는 인간에게 죄 있다. 짖는 소리 낭자한 곳에서 사람의 말을 전파하려 애쓰지 말자. 사람의 말이 흐르는 곳에서 흐름을 깊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개소리 하네!”
사람의 언어생활이란 흔히 아주 터무니없을 정도로 상스럽다. 그런 탓에 인간 이외의 종들의 생태적 진실이나 능력을 간단하게 무시하곤 한다. 맥락 없는 언어, 거짓과 협잡의 언어를 지칭하는 개소리는 개에 대한 대표적인 인간의 편견을 드러내는 말이다. 개의 언어에는 거짓이 없다는 게 생태적 진실이다. 개는 거짓말이나 협잡, 맥락 없는 발화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소리는 개를 모욕하는 말이다. 개는 감정과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개의 언어와 행동양식 속에서만 개로 존재할 수 있다. 자기를 벗어난 존재는 이미 그 존재가 아니다. 개는 자기 종 아래로 떨어지거나 자기 종 이상으로 높아져 초월하려는 욕망 자체를 갖지 않는다. 개의 소리는 솔직한 자기표현이지 ‘개소리’일 수 없다. 인간만이 개소리를 한다. 개소리는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인간의 소리, 인간의 말이다.
어떤 말을 개소리로 정의할 수 있는가?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프리스턴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도덕철학자)는 개소리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려 시도한 첫 번째 철학자는 아니지만, 개소리에 대한 논구를 책으로 엮어낸 첫 번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지난 2005년 『ON BULLSHIT』를 냈다. 국내에 『개소리에 대하여』(PURUN, 2016)로 번역된 그 책에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를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하는 언어의 조작’으로 정의했다. 이 하나의 정의로 개소리가 완전히 규명되는 건 아니다. 개소리가 발화되는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개소리에 대한 그의 규명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개소리를 개소리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개소리를 발하는 사회역사적 존재, ‘개소리쟁이’이기 때문이다.
개소리쟁이들은 모두 사회와 역사 속에서 실존하는 자들이다. 바로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자들이다.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의 맥락 속에 있는 자인가를 알아보는 건 거의 즉각적으로 가능하다. 찬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실의 규명 따윈 관심 없다면 그는 개소리쟁이다. 책임은 없고 효과는 큰 말을 즐기는 자라면 그는 개소리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자, 개소리쟁이다. 어떤 말이 개소리쟁이의 말인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이런 말들은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개소리다. 인간의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이 나고 불리한 것은 모두 소거되는 방식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고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통해 기원전의 철인은 일갈했다. 저런 말들은 그저 법이 기억 재생 불능을 범죄의 성립요소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개소리들일 뿐이다. 법이 허용한 무책임성의 그늘 아래 개소리는 자유롭다.
“친구를 잘못 만났을 뿐 그는 무죄다.”
“부모를 총탄에 여윈 불쌍한 사람이다.”
“그가 잘못되면 군이 총을 들고 계엄을 해야 한다.”
이런 말들도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개소리다. 친구의 꼬임에 빠진 권력자의 죄는 가중처벌의 대상이지 무죄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할 만한 말도 아니다. 그 전쟁에서 부모를 총탄에 잃었으되 우리 공동체의 건설과 유지에 일조한 수많은 연로한 국민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사회다. 저 말은 죄 지은 자를 변호하기 위해 무고한 자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개소리다. 또한 군사 쿠데타를 권하는 명백한 개소리다. 이런 개소리들은 사적 대화나 광장의 외침으로 발화된다. 사밀한 대화는 처벌하기 어렵고 광장의 외침은 의사표현의 자유와 법적으로 다투기 때문에 처벌이 힘들다. 법이 허용한 무책임성의 그늘 아래 개소리들은 자유롭다.
자유로운 개소리들은 그러나 힘이 있다. 개소리는 전염된다. 듣는 귀가 당대를 이룩해온 역사에 대해, 당대의 사회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고 견해가 없다면 그 귀는 쉽게 개소리의 먹이가 되고 또 다른 개소리를 발하는 입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 온전한 이해를 한 뒤 말하더라도 오류 가능성이 엄존한다. 그것이 말이다. 말의 무게가 온실기체처럼 가벼워진 시대라 내뱉고 나서 제가 한 말도 잊어버리고들 하지만 디지털 월드에서 그 가벼운 말은 0과 1로 변환되어 개소리쟁이가 자연수명을 다한 뒤에도 온라인 네트 속을 떠돌 것이다. 개소리들과 진실에 복무하는 말들의 비중은 너무나도 격차가 커서 종종 진실을 따르려는 말들은 개소리의 거대한 파랑 속에서 침몰한다. 공동체가 최초의 개소리를 온 힘을 다해 공론장에서 내쫓아야 하는 이유다.
맥락이 없기 때문에 개소리들은 듣는 귀에게 불신을 사지만, 한편 일말의 진실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불러일으킨다. 그게 바로 개소리의 원래 목적이다. 듣는 귀들에게 ‘혹시?’ 하는 의구심을 불러오고 진실의 말까지 ‘혹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소리는 대부분 발화자의 숨겨진 욕망을 위해 봉사할 뿐 진실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실을 훼손해야 한다는 사명감조차 없다. 그래서 개소리는 ‘늘 참이 아니어야 하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때그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맥락이 없어서 개소리는 자유롭다. 텍스트만 존재할 뿐 콘텍스트가 없는 말을 이해하고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는 수고는 도로다. 상대에게 그런 헛일을 시키고 개소리쟁이들은 욕망을 충족한 뒤 손을 턴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나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게 당대의 유행인 프레임론이다.
“언제 적 일인데 이제와 쫀쫀하게 이러는가?”
“그게 왜 내 탓인가, 같이 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무식해 몰랐다. 그런데 너는 왜 그 때 나를 말리지 않았는가?”
‘오류로 판명되면 형벌을 받는 법적 언어’로써 말해야 할 때 ‘도덕의 물렁한 심판을 받는 윤리적 언어’로써 말하고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다시 윤리적 언어와 법적 언어를 바꾸어 발해지는 말들이 바로 개소리다. 4대강사업이 잘못되면 “내가 역사의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환경부 장관이 있었다. 그때 그는 공학적 진실, 생태적 진실, 인간의 진실을 걸며 4대강사업을 말리고 따지는 국회의원들, 학자들, 환경운동가들에게 자신의 윤리적 언어로 답했다. 그 사업 이후 4대강은 녹조가 피고 물고기들이 사라져가는 죽은 강이 됐다. 그리고 오늘 그는 ‘정책을 처벌할 수는 없다.’는 법적 언명 아래 숨어 있다. 개소리로 판명되어도 개소리쟁이들은 무지하거나 뻔뻔하다는 비난만 들으면 될 뿐 책임을 지는 건 아니다. 개소리쟁이들은 그런 비난을 아주 달게, 문자 그대로 감수한다. 아니 사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개소리들의 무책임성은 그렇게 위력적이고 그토록 유용하다!
“4000억 원이면 몰라도 고작 400억 원을 쩨쩨하게 뇌물이라고 줄 리 있겠는가?”
법관이 재벌 총수의 구속을 기각했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과 그의 경제공동체인 비선실세에게 준 400억 원 대의 ‘뇌물’ 공여 혐의를 받고 있었고, 부적절한 절차로 동원된 국민 연기금으로 4000억 원짜리 ‘기업합병’을 성공시켰던 재벌이었다. 법관은 그 재벌의 영장을 기각하고 풀어주며 기각의 변을 저리 토로했다. 법의 언어로만 말해야 하는 공간에서 법관은 품행이나 기질을 판단하는 윤리의 언어로 판결했다. 개소리다.
개소리가 만연해 무엇이 진실을 가리키는 말인지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판단은 더 꼬이다 못해 ‘모두가 도둑놈!’이거나 ‘죄 한 점 없는 자만 그를 돌로 쳐라!’라는 ‘판단 피로’에 빠지고 ‘판단 불능’에 이르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의 말로 그를 판단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행위로 그를 판단하는 게 현명하다. 지금의 말로밖에 그를 판단할 수 없다면 그를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판단하면 된다. 그의 말이 달디 단가? 그렇다면 그는 개소리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땐 그와 그의 말을 판단하기 위해 판단을 중지하고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게 옳다.
왜 귀에 단 말을 의심해야 하는가? 개소리는 자신에게 관대한 인간의 본성에 이런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잖아. 함께 어울리며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자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진실의 맥락은 시들고 개소리는 개소리쟁이를 늘리며 그들의 연대를 키운다. 자신의 과오 가능성을 늘 의식하는 자라야 개소리의 발화자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개소리쟁이로 살면 끝은 개판일 뿐이다.
속일 줄 모르는 순정한 짐승을 모멸의 언어로 사용하는 인간의 말법이 슬프다. 그조차 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제 멋대로 해석한 최초의 인간, 그의 몰이해가 대를 이어 새끼를 친 결과다. 개소리라고 그 아름다운 짐승의 발성에 담긴 의미를 왜곡한 인간의 탓이다. 개는 무죄고 개소리하는 인간에게 죄 있다. 짖는 소리 낭자한 곳에서 사람의 말을 전파하려 애쓰지 말자. 사람의 말이 흐르는 곳에서 흐름을 깊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