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달래꽃 ⓒ함께사는길 이성수
어려 살던 마을은 분지의 소도시였습니다. 우리 마을은 도심과 먼 도시의 끝자락, 들이 펼쳐지고 산이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이 그 시골에도 서서히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그건 도심 주택가의 일이었고 우리 마을에서는 국민학교 정문과 가까운 몇 이층집들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의 이웃집 창문 밖으로는 대화와 음향효과만으로 만들어진 소리극과 남진과 나훈아의 트로트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올 뿐이었습니다.
눈이 잦고, 오면 장하게 오는 데여서 겨울은 길었습니다. 썰매를 타는 것도 눈싸움을 하는 것도 한 나절을 채우기가 힘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동상 걸린 손의 얼음을 빼기 위해 콩을 넣은 양말을 손에 끼고 잠들었습니다. 고구마를 먹다가 사래가 들려 벌컥벌컥 동치미를 마시고 새벽 찬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만큼 저 멀리 있던 화장실을 가느라 마당을 지나며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그 긴 겨울이 어서 지났으면 했습니다.
겨우내 먹던 맵짠 김장과 지난 가을에 말린 시래기의 누르죽죽한 색으로 채워지던 밥상이 냉이와 쑥 같은 나물로 초록 기운을 머금기 시작할 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습니다. 입이 늘 궁금한 우리들에게 참 좋은 봄날 하루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차갑다 할 만한 날씨였지만, 해가 눈동자처럼 분명해지기만 하면 제법 기온이 올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 좋은 때였습니다.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린 건 할머니가 교회에서 나눠준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산 중턱의 스님이 두 분만 계시는 절집에 예불 다니시던 과수원집 아주머니의 달력에도 같은 날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봄날의 아침에 우리는 늦었다며 유달리 재촉하는 엄니들과 할미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등교를 했고 학교가 파하자마자 산들머리로 내달렸습니다. 누구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 책가방을 맨 채 들을 지나 남산 아랫녘의 산밭 어귀로 갔습니다.
그 들의 끝, 산의 초입 푸른 봄풀들이 융단처럼 깔린 언덕에서 우리 할미들과 엄니들이 차일을 치고 전을 부쳐 막걸리를 드시며 화전놀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반기며 품에 안아 들여 입에 넣어주시던 전에는 분홍보다 진하고 적자주보다는 연한 진달래 꽃잎이 박혀 있었습니다. 눈으로 먼저 먹고 입에 넣으면 요란한 참기름 냄새와 고소한 찹쌀가루가 찐득하게 혀 위에서 풀렸습니다. 술 몇 잔에 흥이 오른 ‘어무니’들의 유행가와 ‘할무니’들의 타령이 길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어째서 그 자리에는 술도 더 잘 잡숫고 놀기도 더 잘 노는 마을 ‘아재’들과 ‘할배’들이 한 분도 안 보이시는가 잠깐 궁금했던 적도 있었지만 궁금증은 꽃부침개를 집어먹는 사이 사라졌습니다. 전 부치는 ‘꼬순’ 냄새가 퍼지는 무쇠솥뚜껑 곁에서 “얼렁 줘요, 얼렁 줘요!” 설피다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좋았습니다. 늘 일에 바쁜 엄니랑 할미들이 세상 그렇게나 즐거울 수 없는 얼굴로 술자시고 노래 부르시며 깔깔깔 웃으셔서 보기 좋았습니다.
그 봄의 화전판 근처에서 동무 계집애들은 봄나물을 뜯거나 음식을 싸온 보자기를 펴고 공기놀이를 했고 사내애들은 막걸리 심부름을 하러 마을로 양철 주전자를 들고 뛰거나 산밭과 숲을 쏘다니며 놀았습니다. 햇발이 좀 약해지면 차일을 접고 가져온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그제야 아부지들이 지게를 지고 올라왔습니다. “어따 장히들 드셨네.” “진천댁 아줌니는 성님이 업어 가시야 것네!” 따위 농을 지껄이면서 아부지들이 차일이며 무쇠솥이며 식기며 남은 음식을 담은 그릇들을 지게에 실어 내려가실 때 우리들 중 누구는 빈 지게에 타고 앉아 가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할미들과 엄니들에게 온전히 허락된 봄의 시간이 그날뿐이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땐. 늘 집과 가족에게 매여 일에 치여 사는 그녀들에게 그 하루의 꽃놀이가 그녀들 인생의 짧고 또 귀한 봄날이었음을 몰랐습니다. 삼월 삼일이었고 아직은 음력의 절기를 따라 삶이 윤회하는 산골의 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건 열 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서울 사람이 되어 양력을 쇠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꽃다운 삼짇날이 지나면 고단한 농사철이 닥치던 그 마을의 기억으로부터 영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매운 추위와 꽃다운 삼짇날의 기억에서 근 사십 년이 더 지난 올 겨울 나는 고향의 그 하루 따뜻한 봄날이 절절히 그리워졌습니다. 겨울이 추워서였습니다.
지난 서른 해 나는 어른이 되어 겨울이면 보일러가 절절 끓는 집과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거나 히터를 틀어주는 찻집과 서점과 영화관을 드나들었습니다. 겨울이 춥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난 가을과 겨울, 촛불이 광장에서 타오르는 동안 온전히 처음과 끝을 보거나 중간에 한 두 시간 나가거나 어찌 됐든 개근하면서 겨울은 춥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추위 속에서 우리가 켜든 불꽃이 봄을 불러올 거야.’ 그리 생각 하면 콧물도 잠시 멈추고 귀도 좀 덜 시린 것 같았습니다. 광장에 나온 나 같은 사람들이 십만이 되고 수십만이 되다가 백만이 되었습니다.
집에 직장에 묶여 광장에는 나올 생각도 못하고, 집 얻을 생각과 직장 안 잘리고 다닐 궁리만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다는 ‘시대의 낡은 계율’을 벗어 버리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우리 공동체의 내일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광장으로 걸어 나온 자부심, 우리가 피운 꽃불들이 봄을 불러올 거라는 확신이 가득합니다.
오는 3월 31일이 음력 3월 3일 삼짇날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 사람들을 보내고, 그들에게 부역한 부패한 관료들과 돈에 눈 먼 장사치들도 보내고 우리의 봄날을 함께 일굴 새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즐거운 논담과 수다로 바빠야 할 것입니다.
진달래가 그 꽃다운 시절 속에 분홍보다 진하고 붉은 자주보다 연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 꽃 따다 찹쌀전을 부치고 좋아하는 술 한 병 챙겨 봄 언덕으로 들놀음 하러 갑시다. 우리가 겨우내 힘써 모신 봄꽃에 둘러싸여 “봄이야!” 서로에게 다정히 말해줍시다. 그 목소리, 서로의 가슴에서 더 큰 응원의 함성이 되어 우리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진달래꽃 ⓒ함께사는길 이성수
어려 살던 마을은 분지의 소도시였습니다. 우리 마을은 도심과 먼 도시의 끝자락, 들이 펼쳐지고 산이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이 그 시골에도 서서히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그건 도심 주택가의 일이었고 우리 마을에서는 국민학교 정문과 가까운 몇 이층집들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의 이웃집 창문 밖으로는 대화와 음향효과만으로 만들어진 소리극과 남진과 나훈아의 트로트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올 뿐이었습니다.
눈이 잦고, 오면 장하게 오는 데여서 겨울은 길었습니다. 썰매를 타는 것도 눈싸움을 하는 것도 한 나절을 채우기가 힘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동상 걸린 손의 얼음을 빼기 위해 콩을 넣은 양말을 손에 끼고 잠들었습니다. 고구마를 먹다가 사래가 들려 벌컥벌컥 동치미를 마시고 새벽 찬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만큼 저 멀리 있던 화장실을 가느라 마당을 지나며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그 긴 겨울이 어서 지났으면 했습니다.
겨우내 먹던 맵짠 김장과 지난 가을에 말린 시래기의 누르죽죽한 색으로 채워지던 밥상이 냉이와 쑥 같은 나물로 초록 기운을 머금기 시작할 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습니다. 입이 늘 궁금한 우리들에게 참 좋은 봄날 하루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차갑다 할 만한 날씨였지만, 해가 눈동자처럼 분명해지기만 하면 제법 기온이 올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 좋은 때였습니다.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린 건 할머니가 교회에서 나눠준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산 중턱의 스님이 두 분만 계시는 절집에 예불 다니시던 과수원집 아주머니의 달력에도 같은 날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봄날의 아침에 우리는 늦었다며 유달리 재촉하는 엄니들과 할미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등교를 했고 학교가 파하자마자 산들머리로 내달렸습니다. 누구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 책가방을 맨 채 들을 지나 남산 아랫녘의 산밭 어귀로 갔습니다.
그 들의 끝, 산의 초입 푸른 봄풀들이 융단처럼 깔린 언덕에서 우리 할미들과 엄니들이 차일을 치고 전을 부쳐 막걸리를 드시며 화전놀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반기며 품에 안아 들여 입에 넣어주시던 전에는 분홍보다 진하고 적자주보다는 연한 진달래 꽃잎이 박혀 있었습니다. 눈으로 먼저 먹고 입에 넣으면 요란한 참기름 냄새와 고소한 찹쌀가루가 찐득하게 혀 위에서 풀렸습니다. 술 몇 잔에 흥이 오른 ‘어무니’들의 유행가와 ‘할무니’들의 타령이 길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어째서 그 자리에는 술도 더 잘 잡숫고 놀기도 더 잘 노는 마을 ‘아재’들과 ‘할배’들이 한 분도 안 보이시는가 잠깐 궁금했던 적도 있었지만 궁금증은 꽃부침개를 집어먹는 사이 사라졌습니다. 전 부치는 ‘꼬순’ 냄새가 퍼지는 무쇠솥뚜껑 곁에서 “얼렁 줘요, 얼렁 줘요!” 설피다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좋았습니다. 늘 일에 바쁜 엄니랑 할미들이 세상 그렇게나 즐거울 수 없는 얼굴로 술자시고 노래 부르시며 깔깔깔 웃으셔서 보기 좋았습니다.
그 봄의 화전판 근처에서 동무 계집애들은 봄나물을 뜯거나 음식을 싸온 보자기를 펴고 공기놀이를 했고 사내애들은 막걸리 심부름을 하러 마을로 양철 주전자를 들고 뛰거나 산밭과 숲을 쏘다니며 놀았습니다. 햇발이 좀 약해지면 차일을 접고 가져온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그제야 아부지들이 지게를 지고 올라왔습니다. “어따 장히들 드셨네.” “진천댁 아줌니는 성님이 업어 가시야 것네!” 따위 농을 지껄이면서 아부지들이 차일이며 무쇠솥이며 식기며 남은 음식을 담은 그릇들을 지게에 실어 내려가실 때 우리들 중 누구는 빈 지게에 타고 앉아 가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할미들과 엄니들에게 온전히 허락된 봄의 시간이 그날뿐이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땐. 늘 집과 가족에게 매여 일에 치여 사는 그녀들에게 그 하루의 꽃놀이가 그녀들 인생의 짧고 또 귀한 봄날이었음을 몰랐습니다. 삼월 삼일이었고 아직은 음력의 절기를 따라 삶이 윤회하는 산골의 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건 열 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서울 사람이 되어 양력을 쇠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꽃다운 삼짇날이 지나면 고단한 농사철이 닥치던 그 마을의 기억으로부터 영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매운 추위와 꽃다운 삼짇날의 기억에서 근 사십 년이 더 지난 올 겨울 나는 고향의 그 하루 따뜻한 봄날이 절절히 그리워졌습니다. 겨울이 추워서였습니다.
지난 서른 해 나는 어른이 되어 겨울이면 보일러가 절절 끓는 집과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거나 히터를 틀어주는 찻집과 서점과 영화관을 드나들었습니다. 겨울이 춥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난 가을과 겨울, 촛불이 광장에서 타오르는 동안 온전히 처음과 끝을 보거나 중간에 한 두 시간 나가거나 어찌 됐든 개근하면서 겨울은 춥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추위 속에서 우리가 켜든 불꽃이 봄을 불러올 거야.’ 그리 생각 하면 콧물도 잠시 멈추고 귀도 좀 덜 시린 것 같았습니다. 광장에 나온 나 같은 사람들이 십만이 되고 수십만이 되다가 백만이 되었습니다.
집에 직장에 묶여 광장에는 나올 생각도 못하고, 집 얻을 생각과 직장 안 잘리고 다닐 궁리만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다는 ‘시대의 낡은 계율’을 벗어 버리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우리 공동체의 내일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광장으로 걸어 나온 자부심, 우리가 피운 꽃불들이 봄을 불러올 거라는 확신이 가득합니다.
오는 3월 31일이 음력 3월 3일 삼짇날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 사람들을 보내고, 그들에게 부역한 부패한 관료들과 돈에 눈 먼 장사치들도 보내고 우리의 봄날을 함께 일굴 새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즐거운 논담과 수다로 바빠야 할 것입니다.
진달래가 그 꽃다운 시절 속에 분홍보다 진하고 붉은 자주보다 연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 꽃 따다 찹쌀전을 부치고 좋아하는 술 한 병 챙겨 봄 언덕으로 들놀음 하러 갑시다. 우리가 겨우내 힘써 모신 봄꽃에 둘러싸여 “봄이야!” 서로에게 다정히 말해줍시다. 그 목소리, 서로의 가슴에서 더 큰 응원의 함성이 되어 우리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