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때, 물에 잠겼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앞의 초등학교의 시계는 지금도 멈춰 있었다
후쿠시마를 다녀오고 5년이 지났다. 그 후유증이 오래갔다. 후쿠시마에서 목격했던 하나하나의 참혹했던 모습들로 몸살을 앓았다.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로는 불가능했던 피폭의 현장들은 소름이 돋았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다시 후쿠시마를 방문했다. 낯설었다. 5년 전 모습들은 사라졌다. 새 건물들이 5년 전의 모습을 다 감추고 있었다. 후쿠시마 바다에는 새 방파제가 완공돼 있었다. 항구도 생겼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5킬로미터 앞에는 수산물을 가공해 수출하는 식품공장이 건설돼 있었다. 놀라웠다. 새로 지은 방파제 위에서 후쿠시마 바다를 바라봤다. 쓰나미가 밀려오는 듯한 환각과 환청이 들렸다. 혼란스러웠다. 방파제를 가는 길에 바지에는 흙과 풀잎들이 묻었다. 그것을 모르고 버스를 타려고 하는 순간, 버스 기사가 손을 저었다. 바지에 묻은 풀을 모두 털어내고 타라 한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풀잎들을 맨손으로 하나하나 뜯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신발에 묻은 흙과 옷에 묻은 풀잎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방사능 피폭에 대한 심리적 공포감은 마음속에 뿌리 깊이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위장된 ‘부흥’의 이름으로 핵사고에 대한 공포의 기억들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기억의 해체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센다이시에서 후쿠시마로 진입하는 인터체인지에서는 후쿠시마 부흥의 일환으로 ‘고향 귀환 통행증’을 제시하면 후쿠시마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통행료가 무료였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흙으로부터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후쿠시마의 풀잎들로부터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바다를 보면서 기억하고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마치 집단 치매에 걸린 듯 후쿠시마 핵사고를 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새집을 짓고, 호텔을 짓고, 식당을 짓고, 거대한 전승관을 짓고, 새 역사를 짓고, 사람 없는 기관 청사를 지었다.
후바타역 앞의 후바타정의 관청 모습. 관청 안의 직원들의 무표정한 모습은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후쿠시마 핵사고에 의해 오염된 흙과 낙엽 등을 모아두었던 핵폐기물 흔적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많던 검은 용기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에는 ‘백조의 트럭’이라고 부르던 핵폐기물 운반 트럭들이 5년 전과 다름없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 트럭들은 또 어디로 갈까? 갈 곳은 있을까? 5년 전에는 그 트럭들이 줄을 이어 달리고 있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하루 종일 달리기만 했다. 도달해야 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승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 지은 식당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5년 전과 변함없이 후쿠시마핵발전소 앞 도로 위로 달리고 있는 핵폐기물 운반 트럭들의 모습
후쿠시마는 ‘부흥’과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후쿠시마에 수소단지를 짓고, 학교를 짓고, 젊은 부부들에게 귀환을 촉구하고 있었다. 5년 전에 길을 가면 흔히 보았던 ‘귀환곤란지역’이라는 표지판도 사라지고 없었다. 피폭된 나뭇가지와 낙엽을 모아 태우던 중간저장시설은 방치되고 있었다. 예전의 후쿠시마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쓰나미가 왔을 때, 8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을 피난시키고 물에 잠겼던 우케도초등학교의 시계도 여전히 멈춰 있었다.
핵사고의 현장 지역은 적막했다. 쓰나미에 파괴된 채 방치된 집들과 새 건물들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전승관을 견학 온 차량과 사람들을 제외하면 후쿠시마는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에 오염된 핵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것에 대한 후쿠시마 현민들의 찬반은 반반이었다. 언론은 정부와 도쿄전력의 발표만 보도하고 있었으며,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다.
핵사고가 났던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불과 5킬로미터 내에 수산물 가공 식품회사가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후쿠시마대학의 시바자키 나오아키 교수 등 지질학과 교수들은 “핵오염수가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이 해양 투기의 이유입니다. 2025년까지 하루 평균 100톤을 투기하는 것을 목표로 잡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목표치는 불충분합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광역차수벽과 물빼기 보링 등으로 지하수가 핵발전으로 유입되는 양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오염수 발생을 억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핵오염수의 해양 투기가 아니라 핵오염수를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 육상 보관하면서 사고가 난 핵발전소로 지하수가 유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적 과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통역과 안내를 맡았던 이선희 씨는 “동북부 지방은 일본 안에서도 식민지입니다. 만약, 후쿠시마와 같은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사고가 동북부 지방이 아니라 큐슈와 같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지금과 같이 조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북부 지방은 오랜 식민지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항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선희 씨의 이 말은 일본에 있는 내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곱씹고 있는 말이다. 마치 5년 전에 후쿠시마 임시 피난소에 만났던 할머니가 “값싼 전기를 준다는 말에 속았다”라며 “우리는 과학이 무섭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충격의 여운이 오래갔다.
글∙사진 | 장영식 포토그래퍼
쓰나미 때, 물에 잠겼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앞의 초등학교의 시계는 지금도 멈춰 있었다
후쿠시마를 다녀오고 5년이 지났다. 그 후유증이 오래갔다. 후쿠시마에서 목격했던 하나하나의 참혹했던 모습들로 몸살을 앓았다.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로는 불가능했던 피폭의 현장들은 소름이 돋았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다시 후쿠시마를 방문했다. 낯설었다. 5년 전 모습들은 사라졌다. 새 건물들이 5년 전의 모습을 다 감추고 있었다. 후쿠시마 바다에는 새 방파제가 완공돼 있었다. 항구도 생겼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5킬로미터 앞에는 수산물을 가공해 수출하는 식품공장이 건설돼 있었다. 놀라웠다. 새로 지은 방파제 위에서 후쿠시마 바다를 바라봤다. 쓰나미가 밀려오는 듯한 환각과 환청이 들렸다. 혼란스러웠다. 방파제를 가는 길에 바지에는 흙과 풀잎들이 묻었다. 그것을 모르고 버스를 타려고 하는 순간, 버스 기사가 손을 저었다. 바지에 묻은 풀을 모두 털어내고 타라 한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풀잎들을 맨손으로 하나하나 뜯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신발에 묻은 흙과 옷에 묻은 풀잎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방사능 피폭에 대한 심리적 공포감은 마음속에 뿌리 깊이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위장된 ‘부흥’의 이름으로 핵사고에 대한 공포의 기억들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기억의 해체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센다이시에서 후쿠시마로 진입하는 인터체인지에서는 후쿠시마 부흥의 일환으로 ‘고향 귀환 통행증’을 제시하면 후쿠시마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통행료가 무료였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흙으로부터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후쿠시마의 풀잎들로부터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바다를 보면서 기억하고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마치 집단 치매에 걸린 듯 후쿠시마 핵사고를 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새집을 짓고, 호텔을 짓고, 식당을 짓고, 거대한 전승관을 짓고, 새 역사를 짓고, 사람 없는 기관 청사를 지었다.
후바타역 앞의 후바타정의 관청 모습. 관청 안의 직원들의 무표정한 모습은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후쿠시마 핵사고에 의해 오염된 흙과 낙엽 등을 모아두었던 핵폐기물 흔적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많던 검은 용기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에는 ‘백조의 트럭’이라고 부르던 핵폐기물 운반 트럭들이 5년 전과 다름없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 트럭들은 또 어디로 갈까? 갈 곳은 있을까? 5년 전에는 그 트럭들이 줄을 이어 달리고 있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하루 종일 달리기만 했다. 도달해야 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승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 지은 식당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5년 전과 변함없이 후쿠시마핵발전소 앞 도로 위로 달리고 있는 핵폐기물 운반 트럭들의 모습
후쿠시마는 ‘부흥’과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후쿠시마에 수소단지를 짓고, 학교를 짓고, 젊은 부부들에게 귀환을 촉구하고 있었다. 5년 전에 길을 가면 흔히 보았던 ‘귀환곤란지역’이라는 표지판도 사라지고 없었다. 피폭된 나뭇가지와 낙엽을 모아 태우던 중간저장시설은 방치되고 있었다. 예전의 후쿠시마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쓰나미가 왔을 때, 8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을 피난시키고 물에 잠겼던 우케도초등학교의 시계도 여전히 멈춰 있었다.
핵사고의 현장 지역은 적막했다. 쓰나미에 파괴된 채 방치된 집들과 새 건물들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전승관을 견학 온 차량과 사람들을 제외하면 후쿠시마는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에 오염된 핵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것에 대한 후쿠시마 현민들의 찬반은 반반이었다. 언론은 정부와 도쿄전력의 발표만 보도하고 있었으며,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다.
핵사고가 났던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불과 5킬로미터 내에 수산물 가공 식품회사가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후쿠시마대학의 시바자키 나오아키 교수 등 지질학과 교수들은 “핵오염수가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이 해양 투기의 이유입니다. 2025년까지 하루 평균 100톤을 투기하는 것을 목표로 잡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목표치는 불충분합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광역차수벽과 물빼기 보링 등으로 지하수가 핵발전으로 유입되는 양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오염수 발생을 억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핵오염수의 해양 투기가 아니라 핵오염수를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 육상 보관하면서 사고가 난 핵발전소로 지하수가 유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적 과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통역과 안내를 맡았던 이선희 씨는 “동북부 지방은 일본 안에서도 식민지입니다. 만약, 후쿠시마와 같은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사고가 동북부 지방이 아니라 큐슈와 같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지금과 같이 조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북부 지방은 오랜 식민지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항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선희 씨의 이 말은 일본에 있는 내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곱씹고 있는 말이다. 마치 5년 전에 후쿠시마 임시 피난소에 만났던 할머니가 “값싼 전기를 준다는 말에 속았다”라며 “우리는 과학이 무섭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충격의 여운이 오래갔다.
글∙사진 | 장영식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