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이 집회를 열었다 ⓒ청소년 기후소송단
우리는 청소년이다.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 중 조금 더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당사자다. 기후변화를 알면 알수록 막막하고 불안하며 답답함을 느끼던 우리는 ‘청소년기후소송단’이 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기후 변화에 무책임한 정부 및 기업들에게 제대로 된 기후 위기 대응을 요구하기 위하여 행동과 목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기후 변화를 학습하고 체화하여 현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시스템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통하여 캠프와 포럼, 현장 답사, 청소년기후행동 (School Strike)을 주최하며 사회에 기후 위기를 알리는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모든 세대가 미래가 아니라 당대를 산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사회에 목소리를 낸다.’라는 것은 언뜻 달콤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그 밖의 사회로 나간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수업 때문에 회의는 주말에 진행해야 하고, 시험 기간에는 활동 자체가 중지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기후행동을 만들고자 등교 거부 행동인 ‘스쿨 스트라이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눈치 게임을 해야만 한다. 한편, 사회적 약자 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되던 청소년들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사회참여를 시작하니 일부 어른들은 몇몇의 목적 달성을 위한 촉매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청소년기후소송단과 함께 하는 여러 분야의 마을 주민, 시민단체 활동가, 선생님, 변호사 등등이 있긴 하지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사실은 그들이 우리의 배후가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돌기도 한다. 모두가 현세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함께 하려는 꿈틀거림은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많이 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른들의 대부분은 우리를 단지 ‘학생’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나마 더 나은 경우에는 ‘미래세대’, ‘미래시민’으로 칭하곤 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현재의 어른들보다 미래에 더 긴 시간을 살아갈 존재가 맞다. 그러나 청소년에게는 사회 주체로서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라는 말은 ‘미래에만 살아갈 사람’으로 들릴 뿐이다. 청소년은 미래만을 위한 존재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 같은 우리세대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현세대이며 미래세대이다.
1년간 청소년기후소송단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후위기를 알리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다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기후행동을 하며 우리를 소개할 때면 어른들은 으레 “대단하다.”, “기특하다.”, “미안하다.”, “응원한다.”라는 말들을 해 주곤 했다. 이에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지지나 격려도 좋지만, 그러한 박수 이상의 답이 있어야 한다. 어른들의 호의적인 말들 속에는 ‘함께 행동하겠다.’는 다짐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부정도 회피도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이 주체라는 것만으로 우리 소송단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모두가 전환의 절실함부터 더 느껴야 한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더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후위기에 대한 행동을 함께 할, 우리 세대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 동료들이다.
청소년의 목소리가 모두의 목소리가 돼야
이 세상은 다수, 주류의 목소리에 의해 변하고 움직인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유행일지라도 그 유행이 한 시대를 좌우한다. 이처럼 세상은 주류의 목소리에 예민하다. 현재까지 기후변화는 소수사람들만의 목소리였다. 국가와 정부가 기후변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정부와 국가가 시민들에게 기후변화에 대해 알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근 3년 동안 미세먼지가 정말 심했다. 미세먼지는 현 사회에 정말 큰 이슈로 떠올라 모든 언론사를 휩쓸었다. 하지만 미세먼지에 관한 이슈는 건강의 문제로만 언급되며 그 이상의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기후변화와 연결 짓지 못했다. 미세먼지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미미한 신호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언제 어떻게 재앙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때문에 사전에 대비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맺은 지구를 지키기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법률적인 규정이 필요하며 국가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국가가 이러한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막는 이러한 움직임이 주류가 되길 바란다. 기후위기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고작 특이한 사람 몇몇이 지켜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특별해지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행동을 목소리를 내야하는 이유이다.
글 / 김서경(고2)・오연재(고2) 청소년기후소송단
3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이 집회를 열었다 ⓒ청소년 기후소송단
우리는 청소년이다.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 중 조금 더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당사자다. 기후변화를 알면 알수록 막막하고 불안하며 답답함을 느끼던 우리는 ‘청소년기후소송단’이 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기후 변화에 무책임한 정부 및 기업들에게 제대로 된 기후 위기 대응을 요구하기 위하여 행동과 목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기후 변화를 학습하고 체화하여 현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시스템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통하여 캠프와 포럼, 현장 답사, 청소년기후행동 (School Strike)을 주최하며 사회에 기후 위기를 알리는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모든 세대가 미래가 아니라 당대를 산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사회에 목소리를 낸다.’라는 것은 언뜻 달콤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그 밖의 사회로 나간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수업 때문에 회의는 주말에 진행해야 하고, 시험 기간에는 활동 자체가 중지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기후행동을 만들고자 등교 거부 행동인 ‘스쿨 스트라이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눈치 게임을 해야만 한다. 한편, 사회적 약자 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되던 청소년들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사회참여를 시작하니 일부 어른들은 몇몇의 목적 달성을 위한 촉매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청소년기후소송단과 함께 하는 여러 분야의 마을 주민, 시민단체 활동가, 선생님, 변호사 등등이 있긴 하지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사실은 그들이 우리의 배후가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돌기도 한다. 모두가 현세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함께 하려는 꿈틀거림은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많이 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른들의 대부분은 우리를 단지 ‘학생’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나마 더 나은 경우에는 ‘미래세대’, ‘미래시민’으로 칭하곤 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현재의 어른들보다 미래에 더 긴 시간을 살아갈 존재가 맞다. 그러나 청소년에게는 사회 주체로서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라는 말은 ‘미래에만 살아갈 사람’으로 들릴 뿐이다. 청소년은 미래만을 위한 존재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 같은 우리세대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현세대이며 미래세대이다.
1년간 청소년기후소송단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후위기를 알리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다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기후행동을 하며 우리를 소개할 때면 어른들은 으레 “대단하다.”, “기특하다.”, “미안하다.”, “응원한다.”라는 말들을 해 주곤 했다. 이에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지지나 격려도 좋지만, 그러한 박수 이상의 답이 있어야 한다. 어른들의 호의적인 말들 속에는 ‘함께 행동하겠다.’는 다짐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부정도 회피도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이 주체라는 것만으로 우리 소송단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모두가 전환의 절실함부터 더 느껴야 한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더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후위기에 대한 행동을 함께 할, 우리 세대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 동료들이다.
청소년의 목소리가 모두의 목소리가 돼야
이 세상은 다수, 주류의 목소리에 의해 변하고 움직인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유행일지라도 그 유행이 한 시대를 좌우한다. 이처럼 세상은 주류의 목소리에 예민하다. 현재까지 기후변화는 소수사람들만의 목소리였다. 국가와 정부가 기후변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정부와 국가가 시민들에게 기후변화에 대해 알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근 3년 동안 미세먼지가 정말 심했다. 미세먼지는 현 사회에 정말 큰 이슈로 떠올라 모든 언론사를 휩쓸었다. 하지만 미세먼지에 관한 이슈는 건강의 문제로만 언급되며 그 이상의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기후변화와 연결 짓지 못했다. 미세먼지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미미한 신호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언제 어떻게 재앙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때문에 사전에 대비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맺은 지구를 지키기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법률적인 규정이 필요하며 국가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국가가 이러한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막는 이러한 움직임이 주류가 되길 바란다. 기후위기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고작 특이한 사람 몇몇이 지켜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특별해지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행동을 목소리를 내야하는 이유이다.
글 / 김서경(고2)・오연재(고2) 청소년기후소송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