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식물 동행기


사람은 보살피는 것이 있어야 살아갈 의미를 잃지 않는다. 이건 어느 금언집의 말이 아니라 순전히 내 혼잣말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삶의 가장 큰 의미가 된다. 충실한 개, 시크한 고양이, 따라쟁이 앵무새, 긴 혀를 가진 파충류까지 반려동물들과 말 없는 초록 잎을 가진 갖가지 반려식물들을 기르는 일도 삶의 이유가 되어준다.

생명이 자라는 일은 그 과정을 미리 겪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것은 또 삶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제공하는 기회도 된다. 이런 반듯한 생각대로 모든 반려와 그의 동행들이 꼭 아름다운 관계만 만들어가는 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반려동식물을 내다버리는 이들과 만난다. 휴가지의 유기 반려동물들, 도심을 배회하는 비루한 누군가의 반려였을 동물들을 본다. 반려식물들의 경우는 부당하고 몰인정한 대우에 대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그들의 특성상 더욱 쉽게 버려진다. 그런 유기는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해서 오감이 느낀다 해서 반드시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다.

서로 오래 돌보는 관계를 만드는 여러 유형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서로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적당한 무관심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내 책장 위에 앉아있는 ‘장미허브’는 만 3년을 나와 동행하고 있다. ‘향이 좋군!’ 정도가 내가 이 아이를 서촌 골목의 꽃가게에서 데려온 이유의 전부다. 보통 컵케이크 사이즈의 허브를 들이면 한 달 또는 길어야 두 달 안에 노랗게 말라 바스러뜨리는 것이 이전의 경험들이었다. 그렇게 이 아이를 들이고 서너 달 뒤 나는 달빛 속에서 이 아이를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발견’했다.

‘어, 쟤가 아직도 안 죽고 살았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날 후배들에게 물었다. “니들이 물을 좀 줬던 게지?!” “언젠가 준 거도 같은데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니 챙겼다고 하긴 좀 그래요.”가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장미허브는 참 튼튼한 녀석이다 싶어 찾아보니 과연 그랬다. 줄기만 살아있으면 다른 데 옮겨 꽂아만 두면 뿌리를 내릴 정도로 잘 크고, 병충해에도 저항력이 강했다. 햇빛 못 보고 실내에서만 키워도 너끈히 버티고 살아가는 제 튼튼한 생명력 덕분에 내게 재발견될 때까지 살았던 것이지만 나는 내게 와서 3달 이상 버텨준 이 최초의 식물에게 ‘매우 고맙고 그만큼 뒤늦은 발견이 미안’해졌다.

‘존재’를 재발견한 뒤 나는 내 장미허브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려 노력했다. 그런데 한 달 뒤 이 녀석이 노랗게 뜨더니 바스스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나 같은 반려식물 무식자가 이렇게나 애정을 가지고 매일 만져주고 주일마다 물을 주는데 니가 왜…?’ 알고 보니 이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물을 덜 줘야 했고 화분의 흙이 굳으면 뿌리가 썩기 쉬워 공극이 좀 있는 부드러운 흙에 심어줘야 했다. 말하자면 무심한 애정과 적절한 시기의 관심이 필요한 아이였는데, ‘재발견’ 이후 내 별스런 애정행각에 아이가 그만 놀라고 만 것이었다. 그걸 안 순간, 나는 어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했다.

곧 더 큰 부끄러움이 나를 덮쳤지만! 나는 내 감정이 사랑에 배신당한 느낌에 가깝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존재 특성, 그의 성격, 그의 바람과 무관한 혼자만의 애정은 파괴적인 결과를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로 뒷걸음질 쳐서 원래 이 아이를 보던 거리로 되돌아갔다. 그 거리에서 나는 다시 내 반려식물에게 올바른 관심을 표하는 방법을 찾았다.

우선 이전의 작은 화분을 깨고 뿌리 끝을 잘라주고 좀 더 큰 화분에 옮겨 주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아이를 바람 쐬라고 밖에 내놓지 않았던 걸 반성하고 창 밖에 받침대를 만들었다. 빈 페트병을 여러 개 묶어 창 밖에 세워두고 출근해서 생각이 나면 애를 거기 놓아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끔 가벼이 어루만져 이 아이가 풍기는 향기를 맡는다. 수십 개의 허브 분들을 가진 이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말이겠지만 나는 그 향기에 ‘찌릿!’ 하고 감전된 듯이 기쁘다. 그때마다 저 오랜 옛날 우리 집 마당에서 죽은 흰 털을 가졌던 그 커다란 개가 생각난다. 그 순간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는 나를 향해 “컹컹” 목젖이 보이도록 짖으며 달려와 긴 혀로 내 얼굴을 핥고 꼬리치던 날의 기쁨이 다시 내게 돌아온다. 어쩌다가는 그렇게 창 밖에 두고 나는 또 잊는다. 며칠 한뎃잠을 재우고 ‘아차!’ 싶어 다시 실내로 들인다. 어제 아랫녘에 온 태풍 탓에 비가 많이 내렸다. 창 밖에 아이를 내두었다는 생각이 잠자리에서 생각났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그 밤에 일어났다. 사무실에 도착해 창을 열자 아이가 흠뻑 젖어 비를 맞고 있었다. 안에 들여서 밑 접시를 빼고 물이 빠지도록 두었다.

서로에게 충실한 방법을 아직 나는 다 모른다. 삶의 불가해한 바다를 동행하는 이여. 그 이름이 사랑일 수도, 동지일 수도, 반려일 수도 있겠다. 수삼 년,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물리적으로 나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 하는 너를 나는 그냥 ‘다육이’라고 부른다.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아직 너를 다 모르고 너는 견인불발하는 삶의 의지로 내 곁에서 살아간다. 언젠가 내가 삶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너에게 ‘사랑아’라고 부르마.


글 | 박현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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