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국적으로 빈대가 극성이다. 10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빈대가 출몰하더니 11월 들어서는 매일 새로운 빈대 소식이 메인 뉴스를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등 10개 관계부처 및 지자체와 함께 ‘빈대 정부합동대책본부’를 구성·운영해 빈대 퇴치 총력전을 펼친다고 한다. 서울시도 ‘빈대 제로도시 프로젝트 대책본부’를 꾸리고 인터넷엔 ‘온라인 빈대 신고센터’를 설치해 빈대 관련 교육자료와 빈대 방역업체 명단, 해외 빈대 소식까지 직접 번역해 각종 동영상으로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모든 행정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빈대의 해악과 심각성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러나 빈대 퇴치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정부의 노력을 보며 과연 국가기관의 재량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시민의 눈으로 볼 때 국가기관의 재량은 분명한 기준이 없어 보인다. 국가는 항상 자신들이 ‘법과 원칙’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법과 원칙과 재량’을 통해 움직인다. 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국가의 재량이 이 사건에 어떻게 작용하였고 그 결과 피해자들이 어떤 손해를 보고 있는지 설명해 보려고 한다.
국가 재량권 남용이 불러온 가습기살균제 비극
2023년 10월 26일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인 SK와 애경, 이마트의 2심 형사재판 마지막 공판이 열리는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법원 앞에서 가해기업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살균제 개발 초기 정부의 실책은 잘 알려져 있다. 세계 최초의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 한국에서 개발됐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팔렸다. 다른 나라에선 생물을 죽이는 화학물질을 가습기에 넣어 공기 중에 분사하는 제품은 출시할 수 없다. 1991년 시행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의 안전을 국가가 관리하는 법률이다. 당시 환경처는 법이 시행되자마자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예전부터 유통되던 물질이라는 이유로 장관 재량인 고시를 통해 면제했다. 유해성 심사를 면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지만 면제했으며, 면제 후에도 정부가 다시 자체적으로 위험성을 재평가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공의 ‘가습기메이트’가 세상에 등장했다. 또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만든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의 원료물질은 새롭게 개발한 신규물질이기 때문에 독성자료를 제출해야 했으나 정부는 이 자료의 제출 역시 고시를 근거로 면제했다. 환경부가 거의 본보기로 삼던 미국과 일본의 법률로는 면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국은 면제했다. 만약 처음부터 독성자료를 받아 심사했다면, 옥시싹싹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가 시판되고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질병관리본부는 원인 미상 호흡기환자들의 전국적 발생(78명 발생, 36명 사망)을 확인했지만, 역학조사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1년 다시 환자 7명이 동시에 발생하자 이번에는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같은 상황과 같은 법률을 가지고 3년 만에 역학조사를 안 하기도 하고 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역학조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조기에 참사를 막은 영웅이 되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가 왜 2008년에는 똑같은 의료진과 여러 차례 긴밀히 회의하고도 역학조사를 시작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이 없다. 또한 2011년 가습기살균제의 위해성을 인지하고 국민에게 사용 자제를 발표하기 직전 질병관리본부는 규정에 존재하지 않는 기업과의 비공개 면담을 4일간 3차례나 진행했다. 면담에서 가습기살균제 제조 기업들은 제품명과 구체적인 성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질병관리본부는 이를 수용해 가습기살균제 ‘사용 자제 권고’라는 법령에도 없는 이상한 권고를 발표했다. 「제품안전기본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끼치거나 끼칠 우려가 있을 경우, 제품명을 밝히고 ‘제품의 수거’를 명령 또는 권고하게 되어 있지만 정부는 창의력을 발휘해 어떤 제품이 위험한지는 밝힐 수 없지만 일단 가습기살균제 사용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마트에서 가습기살균제를 계속 구매하고 사용 중이었고 결국, 추가 피해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
피해 확인되자 일제히 발 뺀 국가기관
가습기살균제가 사람을 죽인다는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자, 공산품 안전관리 책임을 맡은 국가기술표준원은 숨을 죽이고 ‘환자와 연관된 문제니까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의 일’이라며 발을 뺐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공산품의 안전을 사전에 점검하는 ‘생활제품안전과’, 제품 결함으로 인한 사고 발생 시 원인을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제품안전조사과’를 설치하고 수십 명의 공무원을 배치해 운영하고 있는데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아도 제품이 위험할 것으로 예상되면 즉시 제품을 수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국가기술표준원은 당시엔 가습기살균제라는 공산품이 유통되는 줄 몰랐으며, 이후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재량을 발휘해 가습기살균제 제품 사고 조사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참사 초기 보건복지부는 제품에 의한 피해 신고는 자신들의 업무가 아니라며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를 받지 않다가 언론을 통해 문제 제기가 이어질 때만 몇 개월씩 제한을 두고 신고를 받았다. 그 수는 점점 불어나 2023년 10월 말 현재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877명에 달하고 사망자는 1835명이 되었다. 보건복지부는 신고를 받지 않을 땐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지만, 신고를 받는 기간에는 법이 없어도 그게 가능해졌다. 정부가 피해신고를 받지 않을 땐 시민단체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신고 상담을 진행했다.
환경부는 ‘환경보건위원회’에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하여 피해자들을 돕자는 안건이 올라오자, 「환경보건법」에 의하면 제품에 의한 피해는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자세히 설명하며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런데, 2013년 국회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국가 예산과 기업의 분담금으로 구제하는 특별법안이 발의되자 환경부는 긴급하게 환경보건위원회를 다시 열어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해 특별법 제정을 방해했다. 그 과정에서 한 환경보건위원이 “왜 지난 회의에선 법률상 안 된다더니 지금은 되는 것이냐?”고 묻자, 환경부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한번은 재량으로 부결시켰고 다른 한 번은 같은 재량으로 앞의 부결을 번복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사건 초기부터 직접, 가해 기업을 고발하고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2011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어야 할 수사는 답보상태에 있다가 2016년 갑자기 검찰이 수사에 속도를 내어 연구 조작한 혐의로 관련 교수들을 구속하고, 이어서 기업 사장들을 구속 수사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검찰이 왜 2016년에 갑자기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옥시싹싹, 롯데마트, 세퓨 등 주요 가습기살균제 제품 판매 책임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SK(구. 유공), 애경, 이마트 등 두 번째로 많이 팔린 cmit/mit 성분 제품 기업들은 위해성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며 기소되지 않았다. 수사를 할지 말지, 누구를 수사하고 누구를 뺄지 검찰의 재량에 의해 좌우된 것이다.
2019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구성되어 독립적인 가습기살균제 기업 조사를 시작하자 검찰은 다시 SK와 애경 수사팀을 구성해 기소했다. 그 결과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기간과 겹치는 형사재판이 시작됐고 조사위원회에 소환된 기업 관계자들은 ‘현재 재판 중인 사안이라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사참위의 기업조사가 잘 될 리 없었다. 그리고 특별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조사 권한이 종료될 때쯤 1심 판결이 나왔다. 무죄였다. 판사는 역학과 임상적인 근거보다는 동물실험에 더 무게를 두고, “추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이라며, 당장은 동물실험적 근거가 부족하니 무죄라고 말했다. 수많은 전문가와 피해자들은 “사람은 쥐가 아니다.”라며 동물실험에만 집착한 재판부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오용되는 국가 재량권 막는 시민의 힘
2023년 8월 31일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피해자 유품전시회에서 가습기살균제로 아내를 잃은 김태종 씨의 SK케미칼 규탄 발언 ⓒ환경보건시민센터
국가와 행정기관의 재량은 많은 힘을 갖고 있다. 그 재량을 움직이는 핵심 요인이 무엇인지는 정치·정책적 판단, 명분, 사명감, 여론, 문화, 로비, 인맥, 전관예우 등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할 것이다. 재량은 흘러가는 대로 두면 더 힘 있는 쪽의 편으로 흐른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있어 국가의 재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운 적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 한 번, 온 세상이 피해자들의 편이었던 듯한 시기가 있다. 2016년 옥시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관계자들이 구속되며 전국에 옥시싹싹 불매운동이 퍼지고 국민적 관심과 여론이 뜨거웠을 때다. 2016년 국회는 국정조사를 열어 청문회를 생중계했고, 정부 부처는 날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 방안을 논의해 발표했으며, 제품에 문제가 없다던 기업들은 수백 명의 피해자들에게 제발 합의해 달라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법원은 옥시, 롯데, 홈플러스 등 책임자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SK, 애경 그리고 이마트를 피고로 한 형사 2심 재판부는 2024년 1월 11일 최종 판결을 예고했다. 법원이 이번에도 기존 동물실험을 중심으로 판단할지, 아니면 새로운 증거들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피해를 판단할지는 판사의 재량에 달렸다. 만약 우리의 여론으로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주자고 주장하면 어떤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돌아보면 과정마다 뜨거운 여론 없이 피해자들에게 납득할 만한 상황이 펼쳐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이 전력을 다해 가습기살균제를 연구하고, 법률가들이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가장 큰 힘은 역시 ‘뜨거운 여론’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뜨겁게 해야 할지 오늘도 고민한다. 함께 뜨거운 눈으로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을 지켜보고 행동하자. 탄원 서명을 하고, 함께 몸부림치고, 응원하자. 그리고 가해 기업의 유죄를 이끌어내자.
클릭해서, 시민의 판결을 재판부에 전해주세요!
- SK·애경·이마트는 유죄다!
글 | 김영환 환경보건시민센터 연구위원
요즘 전국적으로 빈대가 극성이다. 10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빈대가 출몰하더니 11월 들어서는 매일 새로운 빈대 소식이 메인 뉴스를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등 10개 관계부처 및 지자체와 함께 ‘빈대 정부합동대책본부’를 구성·운영해 빈대 퇴치 총력전을 펼친다고 한다. 서울시도 ‘빈대 제로도시 프로젝트 대책본부’를 꾸리고 인터넷엔 ‘온라인 빈대 신고센터’를 설치해 빈대 관련 교육자료와 빈대 방역업체 명단, 해외 빈대 소식까지 직접 번역해 각종 동영상으로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모든 행정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빈대의 해악과 심각성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러나 빈대 퇴치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정부의 노력을 보며 과연 국가기관의 재량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시민의 눈으로 볼 때 국가기관의 재량은 분명한 기준이 없어 보인다. 국가는 항상 자신들이 ‘법과 원칙’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법과 원칙과 재량’을 통해 움직인다. 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국가의 재량이 이 사건에 어떻게 작용하였고 그 결과 피해자들이 어떤 손해를 보고 있는지 설명해 보려고 한다.
국가 재량권 남용이 불러온 가습기살균제 비극
2023년 10월 26일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인 SK와 애경, 이마트의 2심 형사재판 마지막 공판이 열리는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법원 앞에서 가해기업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살균제 개발 초기 정부의 실책은 잘 알려져 있다. 세계 최초의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 한국에서 개발됐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팔렸다. 다른 나라에선 생물을 죽이는 화학물질을 가습기에 넣어 공기 중에 분사하는 제품은 출시할 수 없다. 1991년 시행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의 안전을 국가가 관리하는 법률이다. 당시 환경처는 법이 시행되자마자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예전부터 유통되던 물질이라는 이유로 장관 재량인 고시를 통해 면제했다. 유해성 심사를 면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지만 면제했으며, 면제 후에도 정부가 다시 자체적으로 위험성을 재평가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공의 ‘가습기메이트’가 세상에 등장했다. 또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만든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의 원료물질은 새롭게 개발한 신규물질이기 때문에 독성자료를 제출해야 했으나 정부는 이 자료의 제출 역시 고시를 근거로 면제했다. 환경부가 거의 본보기로 삼던 미국과 일본의 법률로는 면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국은 면제했다. 만약 처음부터 독성자료를 받아 심사했다면, 옥시싹싹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가 시판되고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질병관리본부는 원인 미상 호흡기환자들의 전국적 발생(78명 발생, 36명 사망)을 확인했지만, 역학조사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1년 다시 환자 7명이 동시에 발생하자 이번에는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같은 상황과 같은 법률을 가지고 3년 만에 역학조사를 안 하기도 하고 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역학조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조기에 참사를 막은 영웅이 되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가 왜 2008년에는 똑같은 의료진과 여러 차례 긴밀히 회의하고도 역학조사를 시작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이 없다. 또한 2011년 가습기살균제의 위해성을 인지하고 국민에게 사용 자제를 발표하기 직전 질병관리본부는 규정에 존재하지 않는 기업과의 비공개 면담을 4일간 3차례나 진행했다. 면담에서 가습기살균제 제조 기업들은 제품명과 구체적인 성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질병관리본부는 이를 수용해 가습기살균제 ‘사용 자제 권고’라는 법령에도 없는 이상한 권고를 발표했다. 「제품안전기본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끼치거나 끼칠 우려가 있을 경우, 제품명을 밝히고 ‘제품의 수거’를 명령 또는 권고하게 되어 있지만 정부는 창의력을 발휘해 어떤 제품이 위험한지는 밝힐 수 없지만 일단 가습기살균제 사용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마트에서 가습기살균제를 계속 구매하고 사용 중이었고 결국, 추가 피해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
피해 확인되자 일제히 발 뺀 국가기관
가습기살균제가 사람을 죽인다는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자, 공산품 안전관리 책임을 맡은 국가기술표준원은 숨을 죽이고 ‘환자와 연관된 문제니까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의 일’이라며 발을 뺐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공산품의 안전을 사전에 점검하는 ‘생활제품안전과’, 제품 결함으로 인한 사고 발생 시 원인을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제품안전조사과’를 설치하고 수십 명의 공무원을 배치해 운영하고 있는데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아도 제품이 위험할 것으로 예상되면 즉시 제품을 수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국가기술표준원은 당시엔 가습기살균제라는 공산품이 유통되는 줄 몰랐으며, 이후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재량을 발휘해 가습기살균제 제품 사고 조사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참사 초기 보건복지부는 제품에 의한 피해 신고는 자신들의 업무가 아니라며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를 받지 않다가 언론을 통해 문제 제기가 이어질 때만 몇 개월씩 제한을 두고 신고를 받았다. 그 수는 점점 불어나 2023년 10월 말 현재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877명에 달하고 사망자는 1835명이 되었다. 보건복지부는 신고를 받지 않을 땐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지만, 신고를 받는 기간에는 법이 없어도 그게 가능해졌다. 정부가 피해신고를 받지 않을 땐 시민단체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신고 상담을 진행했다.
환경부는 ‘환경보건위원회’에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하여 피해자들을 돕자는 안건이 올라오자, 「환경보건법」에 의하면 제품에 의한 피해는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자세히 설명하며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런데, 2013년 국회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국가 예산과 기업의 분담금으로 구제하는 특별법안이 발의되자 환경부는 긴급하게 환경보건위원회를 다시 열어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해 특별법 제정을 방해했다. 그 과정에서 한 환경보건위원이 “왜 지난 회의에선 법률상 안 된다더니 지금은 되는 것이냐?”고 묻자, 환경부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한번은 재량으로 부결시켰고 다른 한 번은 같은 재량으로 앞의 부결을 번복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사건 초기부터 직접, 가해 기업을 고발하고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2011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어야 할 수사는 답보상태에 있다가 2016년 갑자기 검찰이 수사에 속도를 내어 연구 조작한 혐의로 관련 교수들을 구속하고, 이어서 기업 사장들을 구속 수사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검찰이 왜 2016년에 갑자기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옥시싹싹, 롯데마트, 세퓨 등 주요 가습기살균제 제품 판매 책임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SK(구. 유공), 애경, 이마트 등 두 번째로 많이 팔린 cmit/mit 성분 제품 기업들은 위해성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며 기소되지 않았다. 수사를 할지 말지, 누구를 수사하고 누구를 뺄지 검찰의 재량에 의해 좌우된 것이다.
2019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구성되어 독립적인 가습기살균제 기업 조사를 시작하자 검찰은 다시 SK와 애경 수사팀을 구성해 기소했다. 그 결과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기간과 겹치는 형사재판이 시작됐고 조사위원회에 소환된 기업 관계자들은 ‘현재 재판 중인 사안이라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사참위의 기업조사가 잘 될 리 없었다. 그리고 특별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조사 권한이 종료될 때쯤 1심 판결이 나왔다. 무죄였다. 판사는 역학과 임상적인 근거보다는 동물실험에 더 무게를 두고, “추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이라며, 당장은 동물실험적 근거가 부족하니 무죄라고 말했다. 수많은 전문가와 피해자들은 “사람은 쥐가 아니다.”라며 동물실험에만 집착한 재판부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오용되는 국가 재량권 막는 시민의 힘
2023년 8월 31일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피해자 유품전시회에서 가습기살균제로 아내를 잃은 김태종 씨의 SK케미칼 규탄 발언 ⓒ환경보건시민센터
국가와 행정기관의 재량은 많은 힘을 갖고 있다. 그 재량을 움직이는 핵심 요인이 무엇인지는 정치·정책적 판단, 명분, 사명감, 여론, 문화, 로비, 인맥, 전관예우 등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할 것이다. 재량은 흘러가는 대로 두면 더 힘 있는 쪽의 편으로 흐른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있어 국가의 재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운 적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 한 번, 온 세상이 피해자들의 편이었던 듯한 시기가 있다. 2016년 옥시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관계자들이 구속되며 전국에 옥시싹싹 불매운동이 퍼지고 국민적 관심과 여론이 뜨거웠을 때다. 2016년 국회는 국정조사를 열어 청문회를 생중계했고, 정부 부처는 날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 방안을 논의해 발표했으며, 제품에 문제가 없다던 기업들은 수백 명의 피해자들에게 제발 합의해 달라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법원은 옥시, 롯데, 홈플러스 등 책임자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SK, 애경 그리고 이마트를 피고로 한 형사 2심 재판부는 2024년 1월 11일 최종 판결을 예고했다. 법원이 이번에도 기존 동물실험을 중심으로 판단할지, 아니면 새로운 증거들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피해를 판단할지는 판사의 재량에 달렸다. 만약 우리의 여론으로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주자고 주장하면 어떤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돌아보면 과정마다 뜨거운 여론 없이 피해자들에게 납득할 만한 상황이 펼쳐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이 전력을 다해 가습기살균제를 연구하고, 법률가들이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가장 큰 힘은 역시 ‘뜨거운 여론’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뜨겁게 해야 할지 오늘도 고민한다. 함께 뜨거운 눈으로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을 지켜보고 행동하자. 탄원 서명을 하고, 함께 몸부림치고, 응원하자. 그리고 가해 기업의 유죄를 이끌어내자.
클릭해서, 시민의 판결을 재판부에 전해주세요!
- SK·애경·이마트는 유죄다!
글 | 김영환 환경보건시민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