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은 1987년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석면을 유해물질로 처음 인정한 건 1990년 7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다. 1930년 일제가 충남 보령 청소면에 보덕석면광산을 개발한 때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에야 국내법이 석면이 유해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2003년에야 석면함유 건축물 철거가 허가제로 바뀌었고 2006년 2월 석면함유제품의 제조, 수입, 양도, 제공 또는 사용을 금지하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그조차 군수용, 화학설비용 등 대체품 없는 제품은 대체품이 개발될 때까지 적용이 유예됐고 2009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전면적 금지가 시행됐다. 침략전쟁의 군용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일제가 석면광산을 개발한 지 8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석면의 신규 제조와 이용이 금지된 것이다.
누가 피해자의 제비를 뽑을 것인가
석면광산과 석면제품 제조공장의 노동자와 그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석면슬레이트 지붕과 천장 마감용 텍스 등 석면건축재를 사용한 주택, 학교(2015년 교육부 조사에서 전국 초중고교의 70.7%에서 석면 검출) 등 건물과 석면 뿜칠 처리된 지하철 역사와 같은 시설을 이용한, 사실상 전 국민이 석면 노출자이고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1급 발암물질 석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팩트’다.
2020년 이후에도 매년 수백, 수천 명의 석면질환자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피해자 발생 정점은 2030년대 이후로 예상된다. 또한 국내 석면제품 공장들이 강화되는 규제를 피해 1990년대 들어 해외로 줄줄이 이전됐고 2009년 석면 제조 전면 금지 조치가 이뤄졌다는 점과 석면의 질환 잠복기가 최장 40년에 이른다는 사실로 볼 때, 석면제품 제조사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석면 피해(직업성 석면 피해)는 2050년대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반 시민들의 석면 피해(환경성 석면 피해)는 2008년까지 건물과 시설에 사용된 신규 석면제품의 내구한계연도와 석면 질환 잠복기를 더한 2080년대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누가 석면피해자가 될 것인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것이 석면 제비뽑기에 숨겨진 ‘팩트’다.
제비를 뽑은 사람, 이정림
이정림은 1981년 고교에 입학해 1984년 졸업했다. 그 학교는 대전 서구의 석면공장(벽산슬레이트)과 3km 거리에 있었다. 7년 뒤인 1991년 이정림의 신혼집은 그 공장과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그 아파트에서 1년 동안 거주했다. 남편 직장 이전으로 이정림은 1992년 경북 김천으로 이주했다. 14년 뒤인 2006년 4월, 이정림은 삼성서울병원에서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았다. 폐를 둘러싼 이중막 염증이 암으로 발전하는 가장 전형적인 석면암, 그것이 악성중피종이다. 진단 이후 5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며 투병하는 이정림 사례가 2010년 대전시가 실시한 석면피해역학조사에서 알려졌다. 이정림이 다닌 고교와 신혼집 근처의 그 석면공장은 1996년 전북 익산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은 뒤 이정림은 졸업한 고교와 신혼집이었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 아파트에선 이정림과 같은 병으로 이미 2명의 사망자가 나온 상태였다. 자신이 어떤 경위로 악성중피종 환자가 됐는지 알게 된 이정림은 환경성 석면공해 피해자로서 석면추방운동가로 나섰다. 2010년 10월부터 사망 직전인 2011년 말까지 그녀는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악성중피종의 통증과 싸우면서 ‘석면피해특별법’ 서명운동, 전국에서 열린 석면추방집회에 나섰고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국제회의(2010.10.)와 한국에 가장 많은 석면을 수출한 캐나다를 항의방문(2010.12.)했다. 당시 캐나다 정부는 매년 20만t의 석면을 채굴해 아시아로 수출하려는 석면광산의 재가동을 지원하는 재정지원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거리 피케팅에 나서고 기자와 시민들, 현지 석면추방운동가들과 만난 이정림은 “당신들이 수출한 석면이 한국의 공장에서 가공되면서 나 같은 피해자가 생겼다. 그리고 한국의 공장들은 또 다른 아시아 국가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캐나다 시민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이듬해인 2011년 이정림의 병은 악화됐다. 악화된 병세에도 불구하고 이정림은 그해 11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석면추방회의에 참가했다. “인도에서도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이정림의 호소가 회의장을 흔들었다. 귀국한 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이정림은 2011년 12월 21일 눈을 감았다. 그는 환자에서 투사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석면공해의 피해자였지만 더 많은 추가 피해자를 막기 위해 생의 마지막 2년을 자기를 돌보기보다 남을 위해 쓴 공해추방운동가였다.
이정림이 참여한 석면피해특별법 제정운동은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의 명칭으로 시행됐다. 이정림이 항의방문해 석면 수출에 무감각했던 사회에 경종을 울린 캐나다에서는 2012년 8월 기존 정부의 석면광산 재가동 계획에 반대한 야당이 집권해 이 계획을 폐기했다. “우리를 일깨운 레이첼(이정림) 덕분”이라고 캐나다 석면추방운동가들은 평가했다. 그 평가에 국제 석면추방운동가들 모두의 동의가 잇따랐다.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와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는 2012년 열린 제2회 환경보건시민대회에서 ‘환경시민상 국제부문상’의 명칭을 ‘레이첼이정림어워드’로 명명하고 향후 이 부문상을 그 명칭으로 시상하기로 했다. 2016년, 캐나다 정부는 ‘2018년까지 전 종류의 석면 사용 금지’를 발표했다. 석면원료 수출-원료 재가공 제품 생산-생산공장 해외 이전으로 이어지는 석면산업 악순환의 첫고리가 끊긴 것이다. 이정림 사후 5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2010년 캐나다를 항의방문해 석면 수출국 캐나다가 어떻게 석면피해자를 만들고 있는지 고발 기자회견을 하는 고 이정림
제비를 뽑은 사람, 정지열
2016년 레이첼이정림어워드는 인도의 뭄바이산업보건안전센터 외에 한 명의 석면추방운동가가 공동수상했다.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가장 먼저 피해자로 인정받았던 석면피해자이자 고 이정림의 동지였던 정지열이 그였다.
정지열은 1943년생이다. 그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38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소재의 광천석면광산이 석면 채굴을 시작했다. 일제는 침략전쟁에 필요한 군수용 석면을 얻기 위해 충남과 충북, 강원도, 경북, 전남, 이북 등 거의 한반도 전역에서 석면광을 개발했다. 그 가운데 최대 규모 석면광산이 광천석면광산이었고 정지열의 고향 마을과의 거리는 200m도 채 되지 않았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일제는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석면광산은 여전히 가동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지열은 그 광산에 취업해 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네 장정들, 숙부를 비롯한 친인척들도 광천석면광산의 노동자였다. 정지열은 석면광산에서 일한 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광산에서 나와 일을 찾아 타향으로 떠났다. 타지에서도 그는 석면과 무관한 삶을 살지 못했다. 1960년대 그는 자동차 운전, 정비 일을 했다. 석면패드가 장착된 브레이크 정비도 그의 일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든 그는 이전의 석면광산이 문을 닫은 지 오래인 고향으로 귀향했다.
2008년 환경부는 충남 보령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조사 대상자의 절반에 육박하는 110명이 이상 증상이 나타났고 그중에 정지열도 있었다. 한국판 구보타 쇼크(2005년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한 대규모 석면암 발생사건)가 일어난 것이다. 충남 보령, 홍성 등은 한국 석면피해의 핫스팟으로 떠올랐다. 이때 그는 그가 앓는 질병이 2급 석면폐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진단을 도운 석방추방운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지열은 자신과 고향 마을의 비극이 일제가 남긴 석면광산과 석면가공산업으로 인한 직업병이자 환경성 피해가 복합된 사건임을 깨달았다. 그는 피해자로서 석면추방운동가로 거듭났다. 2009년 정지열은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석면피해특별법 제정을 위해 전국 곳곳의 서명운동 현장을 뛰어다녔다.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되자 그 법의 피해 인정자가 됐다.
2012년 생전의 동지였던 이정림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은 그는 더욱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가 고향에 남긴 석면광산의 폐해를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 자비를 들여가며 헌신했다. 그 자신도 석면환자이면서 다른 석면피해자들을 돕는 일에도 헌신했다. 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공동대표, 충남석면광산피해자 대표,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점점 그는 국내외 석면피해자들의 대변인이자 한국 석면추방운동 최전선의 상징이 되었다. 2015년 그의 석면폐 진단급수가 1급으로 나빠졌다. 2019년에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일본으로 인도네시아로 태국으로 네팔로 홍콩으로 석면산업이 피해자를 만들고 있는 아시아 전역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는 사이 그의 건강은 악화됐다.
2022년 1월 28일, 정지열이 영면에 들었다. 생전 정지열은 말했다. “석면피해구제법은 환경성 석면피해자와 직업력 입증이 어려운 피해자들에게 산업재해보험의 석면피해 인정자 수준의 10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의 구제비를 준다. 그런데 환경성 피해자들과 직업병 피해자들이 차별될 근거가 없다. 같은 석면피해자다. 법이 전향적으로 강화돼야 옳다. 더 다양한 석면 관련 질병이 구제 대상이 돼야 하고 더 많은 이들을 피해자로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석면피해구제법은 2021년 말까지 5726명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구제했고 그 가운데 190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정지열은 190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석면피해자들의 대표이자 국제석면추방운동의 대부였던 사람이었다. 석면광산에서 채굴한 석면암을 맨손으로 나르던 소년 노동자는 석면추방운동의 가장 큰 깃발을 우뚝 세운 석면추방운동가로서 영면에 들었다.

고 정지열,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이자 석면 피해자와가족협회 공동대표. 고인은 석면광산 노동자, 석면피해자에서 아시아 석면추방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석면 제비뽑기 판을 엎어라
제비뽑기에 걸린 피해자에서 석면추방운동가로 나아간 고 이정림, 정지열 두 분이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명백하다.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석면피해자를 온 사회가 법과 제도로 돕는 사회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석면 제비뽑기에 걸린 피해자가 홀로 피해를 감당하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
| 박현철 편집주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은 1987년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석면을 유해물질로 처음 인정한 건 1990년 7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다. 1930년 일제가 충남 보령 청소면에 보덕석면광산을 개발한 때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에야 국내법이 석면이 유해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2003년에야 석면함유 건축물 철거가 허가제로 바뀌었고 2006년 2월 석면함유제품의 제조, 수입, 양도, 제공 또는 사용을 금지하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그조차 군수용, 화학설비용 등 대체품 없는 제품은 대체품이 개발될 때까지 적용이 유예됐고 2009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전면적 금지가 시행됐다. 침략전쟁의 군용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일제가 석면광산을 개발한 지 8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석면의 신규 제조와 이용이 금지된 것이다.
누가 피해자의 제비를 뽑을 것인가
석면광산과 석면제품 제조공장의 노동자와 그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석면슬레이트 지붕과 천장 마감용 텍스 등 석면건축재를 사용한 주택, 학교(2015년 교육부 조사에서 전국 초중고교의 70.7%에서 석면 검출) 등 건물과 석면 뿜칠 처리된 지하철 역사와 같은 시설을 이용한, 사실상 전 국민이 석면 노출자이고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1급 발암물질 석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팩트’다.
2020년 이후에도 매년 수백, 수천 명의 석면질환자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피해자 발생 정점은 2030년대 이후로 예상된다. 또한 국내 석면제품 공장들이 강화되는 규제를 피해 1990년대 들어 해외로 줄줄이 이전됐고 2009년 석면 제조 전면 금지 조치가 이뤄졌다는 점과 석면의 질환 잠복기가 최장 40년에 이른다는 사실로 볼 때, 석면제품 제조사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석면 피해(직업성 석면 피해)는 2050년대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반 시민들의 석면 피해(환경성 석면 피해)는 2008년까지 건물과 시설에 사용된 신규 석면제품의 내구한계연도와 석면 질환 잠복기를 더한 2080년대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누가 석면피해자가 될 것인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것이 석면 제비뽑기에 숨겨진 ‘팩트’다.
제비를 뽑은 사람, 이정림
이정림은 1981년 고교에 입학해 1984년 졸업했다. 그 학교는 대전 서구의 석면공장(벽산슬레이트)과 3km 거리에 있었다. 7년 뒤인 1991년 이정림의 신혼집은 그 공장과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그 아파트에서 1년 동안 거주했다. 남편 직장 이전으로 이정림은 1992년 경북 김천으로 이주했다. 14년 뒤인 2006년 4월, 이정림은 삼성서울병원에서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았다. 폐를 둘러싼 이중막 염증이 암으로 발전하는 가장 전형적인 석면암, 그것이 악성중피종이다. 진단 이후 5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며 투병하는 이정림 사례가 2010년 대전시가 실시한 석면피해역학조사에서 알려졌다. 이정림이 다닌 고교와 신혼집 근처의 그 석면공장은 1996년 전북 익산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은 뒤 이정림은 졸업한 고교와 신혼집이었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 아파트에선 이정림과 같은 병으로 이미 2명의 사망자가 나온 상태였다. 자신이 어떤 경위로 악성중피종 환자가 됐는지 알게 된 이정림은 환경성 석면공해 피해자로서 석면추방운동가로 나섰다. 2010년 10월부터 사망 직전인 2011년 말까지 그녀는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악성중피종의 통증과 싸우면서 ‘석면피해특별법’ 서명운동, 전국에서 열린 석면추방집회에 나섰고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국제회의(2010.10.)와 한국에 가장 많은 석면을 수출한 캐나다를 항의방문(2010.12.)했다. 당시 캐나다 정부는 매년 20만t의 석면을 채굴해 아시아로 수출하려는 석면광산의 재가동을 지원하는 재정지원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거리 피케팅에 나서고 기자와 시민들, 현지 석면추방운동가들과 만난 이정림은 “당신들이 수출한 석면이 한국의 공장에서 가공되면서 나 같은 피해자가 생겼다. 그리고 한국의 공장들은 또 다른 아시아 국가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캐나다 시민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이듬해인 2011년 이정림의 병은 악화됐다. 악화된 병세에도 불구하고 이정림은 그해 11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석면추방회의에 참가했다. “인도에서도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이정림의 호소가 회의장을 흔들었다. 귀국한 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이정림은 2011년 12월 21일 눈을 감았다. 그는 환자에서 투사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석면공해의 피해자였지만 더 많은 추가 피해자를 막기 위해 생의 마지막 2년을 자기를 돌보기보다 남을 위해 쓴 공해추방운동가였다.
이정림이 참여한 석면피해특별법 제정운동은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의 명칭으로 시행됐다. 이정림이 항의방문해 석면 수출에 무감각했던 사회에 경종을 울린 캐나다에서는 2012년 8월 기존 정부의 석면광산 재가동 계획에 반대한 야당이 집권해 이 계획을 폐기했다. “우리를 일깨운 레이첼(이정림) 덕분”이라고 캐나다 석면추방운동가들은 평가했다. 그 평가에 국제 석면추방운동가들 모두의 동의가 잇따랐다.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와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는 2012년 열린 제2회 환경보건시민대회에서 ‘환경시민상 국제부문상’의 명칭을 ‘레이첼이정림어워드’로 명명하고 향후 이 부문상을 그 명칭으로 시상하기로 했다. 2016년, 캐나다 정부는 ‘2018년까지 전 종류의 석면 사용 금지’를 발표했다. 석면원료 수출-원료 재가공 제품 생산-생산공장 해외 이전으로 이어지는 석면산업 악순환의 첫고리가 끊긴 것이다. 이정림 사후 5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2010년 캐나다를 항의방문해 석면 수출국 캐나다가 어떻게 석면피해자를 만들고 있는지 고발 기자회견을 하는 고 이정림
제비를 뽑은 사람, 정지열
2016년 레이첼이정림어워드는 인도의 뭄바이산업보건안전센터 외에 한 명의 석면추방운동가가 공동수상했다.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가장 먼저 피해자로 인정받았던 석면피해자이자 고 이정림의 동지였던 정지열이 그였다.
정지열은 1943년생이다. 그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38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소재의 광천석면광산이 석면 채굴을 시작했다. 일제는 침략전쟁에 필요한 군수용 석면을 얻기 위해 충남과 충북, 강원도, 경북, 전남, 이북 등 거의 한반도 전역에서 석면광을 개발했다. 그 가운데 최대 규모 석면광산이 광천석면광산이었고 정지열의 고향 마을과의 거리는 200m도 채 되지 않았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일제는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석면광산은 여전히 가동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지열은 그 광산에 취업해 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네 장정들, 숙부를 비롯한 친인척들도 광천석면광산의 노동자였다. 정지열은 석면광산에서 일한 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광산에서 나와 일을 찾아 타향으로 떠났다. 타지에서도 그는 석면과 무관한 삶을 살지 못했다. 1960년대 그는 자동차 운전, 정비 일을 했다. 석면패드가 장착된 브레이크 정비도 그의 일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든 그는 이전의 석면광산이 문을 닫은 지 오래인 고향으로 귀향했다.
2008년 환경부는 충남 보령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조사 대상자의 절반에 육박하는 110명이 이상 증상이 나타났고 그중에 정지열도 있었다. 한국판 구보타 쇼크(2005년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한 대규모 석면암 발생사건)가 일어난 것이다. 충남 보령, 홍성 등은 한국 석면피해의 핫스팟으로 떠올랐다. 이때 그는 그가 앓는 질병이 2급 석면폐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진단을 도운 석방추방운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지열은 자신과 고향 마을의 비극이 일제가 남긴 석면광산과 석면가공산업으로 인한 직업병이자 환경성 피해가 복합된 사건임을 깨달았다. 그는 피해자로서 석면추방운동가로 거듭났다. 2009년 정지열은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석면피해특별법 제정을 위해 전국 곳곳의 서명운동 현장을 뛰어다녔다.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되자 그 법의 피해 인정자가 됐다.
2012년 생전의 동지였던 이정림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은 그는 더욱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가 고향에 남긴 석면광산의 폐해를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 자비를 들여가며 헌신했다. 그 자신도 석면환자이면서 다른 석면피해자들을 돕는 일에도 헌신했다. 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공동대표, 충남석면광산피해자 대표,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점점 그는 국내외 석면피해자들의 대변인이자 한국 석면추방운동 최전선의 상징이 되었다. 2015년 그의 석면폐 진단급수가 1급으로 나빠졌다. 2019년에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일본으로 인도네시아로 태국으로 네팔로 홍콩으로 석면산업이 피해자를 만들고 있는 아시아 전역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는 사이 그의 건강은 악화됐다.
2022년 1월 28일, 정지열이 영면에 들었다. 생전 정지열은 말했다. “석면피해구제법은 환경성 석면피해자와 직업력 입증이 어려운 피해자들에게 산업재해보험의 석면피해 인정자 수준의 10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의 구제비를 준다. 그런데 환경성 피해자들과 직업병 피해자들이 차별될 근거가 없다. 같은 석면피해자다. 법이 전향적으로 강화돼야 옳다. 더 다양한 석면 관련 질병이 구제 대상이 돼야 하고 더 많은 이들을 피해자로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석면피해구제법은 2021년 말까지 5726명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구제했고 그 가운데 190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정지열은 190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석면피해자들의 대표이자 국제석면추방운동의 대부였던 사람이었다. 석면광산에서 채굴한 석면암을 맨손으로 나르던 소년 노동자는 석면추방운동의 가장 큰 깃발을 우뚝 세운 석면추방운동가로서 영면에 들었다.
고 정지열,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이자 석면 피해자와가족협회 공동대표. 고인은 석면광산 노동자, 석면피해자에서 아시아 석면추방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석면 제비뽑기 판을 엎어라
제비뽑기에 걸린 피해자에서 석면추방운동가로 나아간 고 이정림, 정지열 두 분이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명백하다.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석면피해자를 온 사회가 법과 제도로 돕는 사회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석면 제비뽑기에 걸린 피해자가 홀로 피해를 감당하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
| 박현철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