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란 에너지시민연대 사무총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환경운동은 내 인생의 귀중함이다.”
홍혜란 에너지시민연대 사무총장(이하 직책 생략)은 환경운동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환경운동은 인생의 소중함 그 자체다. 그는 1980년대 중후반 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 자원 활동을 계기로 1991년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해 환경운동연합, 환경재단, 에너지시민연대를 거치며 35년 넘게 에코인(ECO 人)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삶 속엔 우리나라 굵직한 환경 운동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3년생인 홍혜란은 경기도 시흥에서 2녀 2남의 첫째로 태어났다. 지금은 공단 지역으로 바뀌어 옛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그에게 고향 하면 깊고 시원해서 맛 좋은 우물이 먼저 떠오른다. 여름이면 우물을 둘러쌓고 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재잘거림도 있었다. 또 그는 어릴 적 부친이 저수지가 보이는 땅에 복숭아나무 심으며 딸의 미래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로도 기억한다. 1960년대 개발되지 않았던 그 시절 마을 주변 들판과 논밭엔 이름 모를 풀들이 천지였다. 마을에서 ‘누구네 공주’로 통했던 그는 할머니 따라 밭일하며 나물이며 꽃 이름을 배웠다. 그렇게 삶 속에서 배운 지식은 나중에 그가 환경운동연합에서 환경·생태교육을 담당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던 자산이 됐다. 그 때문에 그는 어릴 적 경험이 환경운동과 괘가 맞았다고 본다. 또 시골에서 자랐기에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훨씬 깊을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그는 “시골에서 자란 게 나는 굉장히 큰 자산이 됐다.”라며 “나를 컨트롤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홍혜란의 경험은 다른 1세대 환경운동가들이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을 현세대가 상실한 공동체의 원형이라 보면서 자신의 뿌리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환경운동연합 창립,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홍혜란이 중고교 때인 1970년대는 주변 친구들이 ‘현모양처’가 꿈이라 스스럼없이 말하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된다’라고 여겼던 때였다. 그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도시 출신 긴 생머리 여자 선생님을 보면서 꿈을 키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의 뜻과 달리 1982년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 때문에 전공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나중에 교육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그 시절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광기를 내뿜던 때였기에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가투(가두 투쟁)에 앞장서진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노동의 역사’ 같은 서적 등을 세미나하며 시대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공부했다. 그는 동료들과 예전 명동 향린교회 부근 골목 골방에서 학습하며 집회 참석 일정을 정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환경운동과의 첫 만남은 친구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그의 친구가 공문연에서 활동할 때 친구 일 도와줬던 게 계기가 됐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회원 발송용 지로용지에 일일이 수기로 성명과 금액을 써서 보내야 했다. 서툰 타자기를 잡고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씩 문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은 그가 공추련에서 총무간사로 상근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시흥이 집이었던 홍혜란은 서울 종로5가 공추련 사무실까지 활동가 중에 가장 먼 거리에서 통근했지만, 항상 출근이 가장 빨랐다. 지금은 전철이 이어졌지만, 당시는 버스로 다녀야 했기에 교통 체증을 피하고자 새벽에 집을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생계비는 15만 원 정도였다. 집에 월급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동생 등 가족에게 받아써야 했다. 그는 “그때 활동가 대부분이 그랬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환경운동을 ‘해야 할 일’로 여겼다. 이런 데는 그의 성격과 관련이 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일을 하면서 욕먹는 건 싫었다. 상황이 안 돼서 못 할 수 있지만, 내가 열심히 안 했거나 우리가 열심히 안 해서 ‘쟤네 봐’ 이러는 건 너무 싫었다.”라며 “이게 성격인 것 같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차분함과 꼼꼼함 역시 그에게서 빼놓기 어렵다. 성실과 신뢰를 인생의 좌우명처럼 여긴 그의 성품은 35년 환경운동에 그대로 투영됐다.
1990년 공추련을 중심으로 6개 민간 단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4월 22일 지구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10만 명을 목표로 한 남산 껴안기 행사였다. 예산도 1억 원이 넘게 든,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 행사였다. 불행히도 행사 직전 비가 내리면서 참석 인원은 3000명 정도로 그쳤다. 이 때문에 애초 무모한 계획을 추진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을 시도해 보고 환경운동의 역량을 키운 중요한 계기였다는 평가다(신동호. 2007. 『자연의 친구들 2』 도요새). 이 행사 실무 지원에 참여했던 홍혜란은 “‘경제가 먼저지 환경이 뭐냐?’라는 시기였기에 (시민 의식을 바꿀) 굉장히 좋은 시도였다.”라면서 “공추련이 선도적 역할을 한 거다.”라고 평가한다. 1992년 공추련이 주도한 리우환경회의 참석을 두고도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지만, 그는 이 역시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지구적 환경운동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짚었다. 그는 환경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문제이기에 국제적 환경운동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말했다.
1993년 4월 서울의 공추련 등 전국 8개 단체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족했다. 홍혜란은 이날 환경운동연합 창립식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프레스센터 19층에서 8개 단체가 박경리 선생님 모시고 창립식 할 때 너무나 근사했다. 완전히 초가집에서 살다가 기와집(이 된 것 같은) 이런 느낌이었다. 굉장히 멋있는 일을 하겠구나, 하는 그런 설렘, 기대감이 있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공추련에서 환경운동연합으로 되면서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일도 많아졌다. 홍혜란에겐 늘어난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지만, 환경운동 확장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이전에 연대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환경운동이 전국화되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 더 많아졌다. 힘들지만, 함께하는 동지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힘을 얻게 된 부분이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에너지 절약 운동이 세상을 바꾼다
2010년 서울 도심에서 열린 4대강 반대 콘서트에 참석한 홍혜란 사무총장(맨왼쪽) Ⓒ함께사는길 이성수
지난 35년 동안 홍혜란은 수많은 환경운동을 경험했다. 새만금 갯벌 매립 등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파괴하는 대형 국책 사업을 막아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핵폐기장 반대 싸움에 나선 나이 든 어부가 그에게 고맙다고 할 때 정부의 핵 정책을 바꿔내지 못 한 미안함도 있었다. 초창기 어린이 환경 캠프 프로그램 중에 한 아이가 다쳐 네 바늘을 꿰맸어도 끝까지 함께 했던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환경재단에서 임길진 NGO 스쿨 교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시민운동 판에서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지난 시기 지치고 힘든 일이 왜 없었을까? 그때마다 그의 곁엔 환경운동의 동지들이 있었다. 1991년 공추련 동기인 고(故) 최재숙 전 에코생협 상무이사(2020년 작고)는 흉금을 터놓는 친구였다. 한편, 선배들은 그의 활동을 지지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회에서 만났던 사회 각계 인사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홍혜란은 2013년부터 에너지시민연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우리 국민이 에너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 ‘미래 세대한테 우리가 빚을 질 수 없다.’라는 심정으로 환경문제 해결에 동참했다. “근데 지금의 환경문제는 미래세대만이 아닌 내 문제, 현세대의 문제가 됐다.”라고 그는 말한다. 12월 한겨울이지만 반 팔 티셔츠를 입은 이가 있을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열흘 이상 북극 한파가 몰아치는 등 날씨가 요동친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상이변 현상은 또 다른 뉴노멀이 됐다. 화석연료 과다 사용 등 인간 활동이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문제를 완화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에너지 사용을 줄어야 하는데, 여전히 에너지 귀한 줄 모르고 너무 편하게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에너지시민연대는 ‘에너지 절약은 제5의 에너지원’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가정에서부터 에너질 절약을 실천하자는 게 핵심이다. 우리나라 에너지 사용량 중에 가정용은 13%밖에 안 된다. 산업용이 더 많다. 그런데도 개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덴 이유가 있다. 홍혜란은 “중요한 건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거”라 말한다. 우리 국민의 인식이 바뀌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관심을 두게 되고, 정책을 입안할 때 국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혜란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소비자 운동의 중요성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또 기후위기시대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자체 역할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과거에 달리 환경운동의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다. 이전에는 비판이 핵심이었다면 이젠 비판과 함께 정책과 행동이 변할 수 있는 방향, 즉 대안도 함께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끝으로 홍혜란은 『함께 사는 길』에 대한 고마움을 말했다. 그는 “아는 것엔 확인을, 모르는 것엔 배움을 주었다. 늘 밑줄 치며 공부했던 월간지다.”라면서 “적은 인원으로 어렵게 활동했던 후배들에게 고맙고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이들에 대한 기억과 감사, 사실 운동이란 그런 고마운 기억과 감사의 관계를 지키고 확장하는 일이라는 언급으로 들렸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홍혜란 에너지시민연대 사무총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환경운동은 내 인생의 귀중함이다.”
홍혜란 에너지시민연대 사무총장(이하 직책 생략)은 환경운동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환경운동은 인생의 소중함 그 자체다. 그는 1980년대 중후반 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 자원 활동을 계기로 1991년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해 환경운동연합, 환경재단, 에너지시민연대를 거치며 35년 넘게 에코인(ECO 人)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삶 속엔 우리나라 굵직한 환경 운동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3년생인 홍혜란은 경기도 시흥에서 2녀 2남의 첫째로 태어났다. 지금은 공단 지역으로 바뀌어 옛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그에게 고향 하면 깊고 시원해서 맛 좋은 우물이 먼저 떠오른다. 여름이면 우물을 둘러쌓고 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재잘거림도 있었다. 또 그는 어릴 적 부친이 저수지가 보이는 땅에 복숭아나무 심으며 딸의 미래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로도 기억한다. 1960년대 개발되지 않았던 그 시절 마을 주변 들판과 논밭엔 이름 모를 풀들이 천지였다. 마을에서 ‘누구네 공주’로 통했던 그는 할머니 따라 밭일하며 나물이며 꽃 이름을 배웠다. 그렇게 삶 속에서 배운 지식은 나중에 그가 환경운동연합에서 환경·생태교육을 담당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던 자산이 됐다. 그 때문에 그는 어릴 적 경험이 환경운동과 괘가 맞았다고 본다. 또 시골에서 자랐기에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훨씬 깊을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그는 “시골에서 자란 게 나는 굉장히 큰 자산이 됐다.”라며 “나를 컨트롤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홍혜란의 경험은 다른 1세대 환경운동가들이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을 현세대가 상실한 공동체의 원형이라 보면서 자신의 뿌리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환경운동연합 창립,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홍혜란이 중고교 때인 1970년대는 주변 친구들이 ‘현모양처’가 꿈이라 스스럼없이 말하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된다’라고 여겼던 때였다. 그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도시 출신 긴 생머리 여자 선생님을 보면서 꿈을 키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의 뜻과 달리 1982년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 때문에 전공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나중에 교육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그 시절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광기를 내뿜던 때였기에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가투(가두 투쟁)에 앞장서진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노동의 역사’ 같은 서적 등을 세미나하며 시대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공부했다. 그는 동료들과 예전 명동 향린교회 부근 골목 골방에서 학습하며 집회 참석 일정을 정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환경운동과의 첫 만남은 친구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그의 친구가 공문연에서 활동할 때 친구 일 도와줬던 게 계기가 됐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회원 발송용 지로용지에 일일이 수기로 성명과 금액을 써서 보내야 했다. 서툰 타자기를 잡고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씩 문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은 그가 공추련에서 총무간사로 상근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시흥이 집이었던 홍혜란은 서울 종로5가 공추련 사무실까지 활동가 중에 가장 먼 거리에서 통근했지만, 항상 출근이 가장 빨랐다. 지금은 전철이 이어졌지만, 당시는 버스로 다녀야 했기에 교통 체증을 피하고자 새벽에 집을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생계비는 15만 원 정도였다. 집에 월급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동생 등 가족에게 받아써야 했다. 그는 “그때 활동가 대부분이 그랬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환경운동을 ‘해야 할 일’로 여겼다. 이런 데는 그의 성격과 관련이 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일을 하면서 욕먹는 건 싫었다. 상황이 안 돼서 못 할 수 있지만, 내가 열심히 안 했거나 우리가 열심히 안 해서 ‘쟤네 봐’ 이러는 건 너무 싫었다.”라며 “이게 성격인 것 같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차분함과 꼼꼼함 역시 그에게서 빼놓기 어렵다. 성실과 신뢰를 인생의 좌우명처럼 여긴 그의 성품은 35년 환경운동에 그대로 투영됐다.
1990년 공추련을 중심으로 6개 민간 단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4월 22일 지구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10만 명을 목표로 한 남산 껴안기 행사였다. 예산도 1억 원이 넘게 든,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 행사였다. 불행히도 행사 직전 비가 내리면서 참석 인원은 3000명 정도로 그쳤다. 이 때문에 애초 무모한 계획을 추진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을 시도해 보고 환경운동의 역량을 키운 중요한 계기였다는 평가다(신동호. 2007. 『자연의 친구들 2』 도요새). 이 행사 실무 지원에 참여했던 홍혜란은 “‘경제가 먼저지 환경이 뭐냐?’라는 시기였기에 (시민 의식을 바꿀) 굉장히 좋은 시도였다.”라면서 “공추련이 선도적 역할을 한 거다.”라고 평가한다. 1992년 공추련이 주도한 리우환경회의 참석을 두고도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지만, 그는 이 역시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지구적 환경운동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짚었다. 그는 환경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문제이기에 국제적 환경운동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말했다.
1993년 4월 서울의 공추련 등 전국 8개 단체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족했다. 홍혜란은 이날 환경운동연합 창립식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프레스센터 19층에서 8개 단체가 박경리 선생님 모시고 창립식 할 때 너무나 근사했다. 완전히 초가집에서 살다가 기와집(이 된 것 같은) 이런 느낌이었다. 굉장히 멋있는 일을 하겠구나, 하는 그런 설렘, 기대감이 있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공추련에서 환경운동연합으로 되면서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일도 많아졌다. 홍혜란에겐 늘어난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지만, 환경운동 확장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이전에 연대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환경운동이 전국화되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 더 많아졌다. 힘들지만, 함께하는 동지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힘을 얻게 된 부분이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에너지 절약 운동이 세상을 바꾼다
2010년 서울 도심에서 열린 4대강 반대 콘서트에 참석한 홍혜란 사무총장(맨왼쪽) Ⓒ함께사는길 이성수
지난 35년 동안 홍혜란은 수많은 환경운동을 경험했다. 새만금 갯벌 매립 등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파괴하는 대형 국책 사업을 막아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핵폐기장 반대 싸움에 나선 나이 든 어부가 그에게 고맙다고 할 때 정부의 핵 정책을 바꿔내지 못 한 미안함도 있었다. 초창기 어린이 환경 캠프 프로그램 중에 한 아이가 다쳐 네 바늘을 꿰맸어도 끝까지 함께 했던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환경재단에서 임길진 NGO 스쿨 교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시민운동 판에서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지난 시기 지치고 힘든 일이 왜 없었을까? 그때마다 그의 곁엔 환경운동의 동지들이 있었다. 1991년 공추련 동기인 고(故) 최재숙 전 에코생협 상무이사(2020년 작고)는 흉금을 터놓는 친구였다. 한편, 선배들은 그의 활동을 지지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회에서 만났던 사회 각계 인사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홍혜란은 2013년부터 에너지시민연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우리 국민이 에너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 ‘미래 세대한테 우리가 빚을 질 수 없다.’라는 심정으로 환경문제 해결에 동참했다. “근데 지금의 환경문제는 미래세대만이 아닌 내 문제, 현세대의 문제가 됐다.”라고 그는 말한다. 12월 한겨울이지만 반 팔 티셔츠를 입은 이가 있을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열흘 이상 북극 한파가 몰아치는 등 날씨가 요동친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상이변 현상은 또 다른 뉴노멀이 됐다. 화석연료 과다 사용 등 인간 활동이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문제를 완화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에너지 사용을 줄어야 하는데, 여전히 에너지 귀한 줄 모르고 너무 편하게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에너지시민연대는 ‘에너지 절약은 제5의 에너지원’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가정에서부터 에너질 절약을 실천하자는 게 핵심이다. 우리나라 에너지 사용량 중에 가정용은 13%밖에 안 된다. 산업용이 더 많다. 그런데도 개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덴 이유가 있다. 홍혜란은 “중요한 건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거”라 말한다. 우리 국민의 인식이 바뀌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관심을 두게 되고, 정책을 입안할 때 국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혜란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소비자 운동의 중요성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또 기후위기시대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자체 역할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과거에 달리 환경운동의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다. 이전에는 비판이 핵심이었다면 이젠 비판과 함께 정책과 행동이 변할 수 있는 방향, 즉 대안도 함께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끝으로 홍혜란은 『함께 사는 길』에 대한 고마움을 말했다. 그는 “아는 것엔 확인을, 모르는 것엔 배움을 주었다. 늘 밑줄 치며 공부했던 월간지다.”라면서 “적은 인원으로 어렵게 활동했던 후배들에게 고맙고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이들에 대한 기억과 감사, 사실 운동이란 그런 고마운 기억과 감사의 관계를 지키고 확장하는 일이라는 언급으로 들렸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