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논』, 빅데이터 시대의 프라이버시
2018년 영화 『아논(ANON)』은 신선한 소재를 바탕에 둔 흥미로운 영화다. SF(Science Fiction) 저예산 영화라고 하지만 스릴러 형식을 잘 버무렸고,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영화적 재미를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 준다. 우리나라에 그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논』의 감독 앤드류 니콜은 전작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앤드류 니콜의 감독 데뷔작은 1997년 SF 영화 『가타카(GATTACA』였다. 니콜이 『아논』처럼 직접 각본도 썼다. 영화의 제목은 DNA의 네 개의 염기서열인 A, T, G, C를 조합한 것으로, 영화는 유전자 조작으로 우성 유전자만이 상류 엘리트층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열성 유전자를 지닌 주인공이 자신의 꿈인 토성 우주탐사에 참여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생존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가타카』는 흥행은 저조했지만, 뒤늦게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독자 1200만 명을 자랑하는 유투버 Watchmojo.com은 이 영화를 1990년대 대표 SF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알쓸신잡’으로 유명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와 같은 국내외 대중 과학저술가들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휴먼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유전자 조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SF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깝거나 먼 미래 발생할 수 있는 허구적 상황’, 즉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미래’는 ‘지금’일 수도 있다. 유전자의 특정 부분을 자르고 붙이는 기술, 즉 ‘유전자 가위’는 이미 1970년대 등장했다. 2012년엔 보다 강력한 크리스토퍼 유전자 가위가 나왔다. 실제 지난 11월 중국 남방과학기술대 허첸쿠이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유전자를 편집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저항성이 있는 쌍둥이 여아 출산에 성공해 논란의 중심이 됐다.
이 연구를 두고 세계 과학계는 ‘다른 유전자에 해를 끼칠 위험 때문에 미국에서 금지된 기술’이라며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결탁된 자본 입장에서 유전자 조작 기술은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다. 암 등 유전 질환 질병이 4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스마트 헬스 케어’를 4차 산업혁명 시대 주력 산업으로 선정한 글로벌 자본에겐 매우 좋은 먹잇감이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노화 세포 제거와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 수명을 100세 이상 늘려 상업적 대박을 꿈꾸는 벤처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최대 150세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선전하고 있다. 『사피엔스』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 유발 하라리는 2017년 『호모 데우스』를 통해 인류가 전쟁, 질병, 죽음을 극복하는 신적 존재 ‘호모 데우스(home deus)’, 즉 유전자 조작에 따른 신인류 등장을 예견했다. 그때가 되면 유전자는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계급이 될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SF 상상력을 통한 현실 비판
앤드류 니콜 감독의 2011년 작 『인 타임(In Time)』도 눈에 띈다. 영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들은 25세 때 31,104,000초, 즉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이 시간으로 ‘커피 4분, 버스요금 2시간’ 등 돈 대신 사용한다. 노화는 멈췄지만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동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시간을 대출 받아야 하는데, 신용 불량자는 이마저도 어려워 범죄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 반면 소수 부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영생을 누리고 있다. 감독은 1대 99의 극심한 빈부격차 문제와 시간마저 거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아논』 역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여기서 아논(Anon)은 익명(Anonymity)을 뜻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된 초연결네트워크 사회에 살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심안’을 심어주고, 사람들이 보는 모든 정보는 중앙 서버 ‘에테르’에 저장된다. 영화에서 표현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뇌에 자리 잡은 나노로봇이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컴퓨터(기계)와 사람이 결합된 형태를 증강인간(Augment Human)이라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선 명함이 필요 없다. 그저 보기만 하면 상대방의 이름과 나이, 직업 등 관련 정보가 눈앞에 펼쳐진다. 별도의 전자장비 없이 영상 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는다. 음식의 가격과 칼로리 등 관련 정보도 그저 보기만 하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주고받기까지 한다. 경찰 등 정부 권력기관은 타인의 과거 경력 조회 등 더 많은 정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거기에 실시간으로 타인의 심안에 접속해 범죄 현장을 조사하고, 주변 사람들은 물론 죽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기억 데이터를 통해 범인을 색출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가운데,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할 데이터가 조작돼 있다. 어찌된 일인지 사망자의 기억 데이터에는 본인이 아닌 자기를 죽이려 하는 범인의 시각으로 되어 있다. 범인은 사망자의 심안을 해킹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했다. 피살된 이들은 사망 전 불미스러운 기억을 누군가에게 요청해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급 경찰 살 프라이랜드(클라이브 오웬)는 신분을 위장해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는 익명의 그녀(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찾아 나선다. 그녀가 형사의 기억을 조작하는 동안 그녀를 해킹해 살인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려는 것이 경찰의 계획이다. 하지만 경찰이란 것이 탄로 나는데, 익명의 그녀는 프라이랜드의 심안을 해킹해 보이는 걸 보이지 않게 하고, 데이터를 조작해 그를 살해 용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프라이랜드가 “이젠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자, 옆에 있던 동료는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모든 게 취약해”라고 말한다. 영화는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통제사회에서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라이랜드는 궁지에 몰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건의 실체를 밝혀 내 제대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 시대의 사민권
영화 『아논』에서 그려진 사회상은 어떤 모습일가? 이런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정보의 생산자가 되며 저장된 지식을 네트워크를 통해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시각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더욱 촘촘하게 구성되는 장점도 있다. 반면 치명적 단점도 있다. 초연결네트워크 사회는 해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집중돼 있기에 한번 피해가 발생하면 그 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의 닉 보스트롬 교수는 현재의 과학기술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DNA 조작 바이오해킹으로 대규모 질병이 전파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현재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특징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IOT) 등이다. 한 IT 전문 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 사물인터넷 기기는 150억 개였는데, 2020년에는 2천억 개, 2040년에는 1조 개 이상 될 것이라 한다. 2천억 개의 사물인터넷에서 생산되는 데이터 규모만 40제타바이트에 달하는데, 이는 전 세계 해변 모래알 수인 7해 50경개의 57배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엔 사람들이 포털사이트에 올린 검색어와 카드사용 내역 등도 포함된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특징인 빅데이터(Big Data)다. 소비자의 구매 패턴을 학습해 물건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시스템. 이 때문에 빅데이터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이라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부정적 전망이 나온다. 문화평론가 임태훈은 2014년 『검색되지 않을 자유』에서 “빅데이터는 마케팅과 감시가 분리되지 않은 세계, 인간 행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조정할 수 있는 사회로의 재편을 지향한다”고 경고한다. ‘예측 가능한 인간’은 결국 자본이 원하는 인간상이란 지적이다.
영화 『아논』에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도 연상된다. 앤드류 니콜 감독이 각본을 쓴 1998년 작 『트르먼 쇼』는 매스 미디어를 통한 한 개인의 사민권이 무시된 사례를 보여준다.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사회 역시 개인의 프라이버시(privacy)는 철저히 무시된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2001년 ‘디지털 시대의 프라이버스 권리’라는 논문에서 “프라이버시는 우리말로 ‘사생활’로 번역되는데, 흔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보호 또는 은폐의 대상으로만 여겨진다”며 “사생활 권리는 다른 기본 인권에 비해 ‘배부른 자의 인권 타령’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천부적 권리를 지닌 사적 개인(私民)으로서의 권리, 즉 ‘사민권’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헌법에 등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에서의 국민은 통치대상으로서의 국민(citizen)이 아닌 주권자인 사민권을 지닌 국민(people)이라는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가장 중요한 기본 인권이라 말한다.
영화 『아논』은 ’나는 신에게조차 잊히길 열망하다’는 19세기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로 시작된다. 자본이 예측 가능한 인간형으로 몰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예측되지 않을 권리도 중요한 인권이 아닐까.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영화 『아논』, 빅데이터 시대의 프라이버시
2018년 영화 『아논(ANON)』은 신선한 소재를 바탕에 둔 흥미로운 영화다. SF(Science Fiction) 저예산 영화라고 하지만 스릴러 형식을 잘 버무렸고,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영화적 재미를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 준다. 우리나라에 그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논』의 감독 앤드류 니콜은 전작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앤드류 니콜의 감독 데뷔작은 1997년 SF 영화 『가타카(GATTACA』였다. 니콜이 『아논』처럼 직접 각본도 썼다. 영화의 제목은 DNA의 네 개의 염기서열인 A, T, G, C를 조합한 것으로, 영화는 유전자 조작으로 우성 유전자만이 상류 엘리트층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열성 유전자를 지닌 주인공이 자신의 꿈인 토성 우주탐사에 참여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생존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가타카』는 흥행은 저조했지만, 뒤늦게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독자 1200만 명을 자랑하는 유투버 Watchmojo.com은 이 영화를 1990년대 대표 SF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알쓸신잡’으로 유명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와 같은 국내외 대중 과학저술가들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휴먼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유전자 조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SF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깝거나 먼 미래 발생할 수 있는 허구적 상황’, 즉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미래’는 ‘지금’일 수도 있다. 유전자의 특정 부분을 자르고 붙이는 기술, 즉 ‘유전자 가위’는 이미 1970년대 등장했다. 2012년엔 보다 강력한 크리스토퍼 유전자 가위가 나왔다. 실제 지난 11월 중국 남방과학기술대 허첸쿠이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유전자를 편집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저항성이 있는 쌍둥이 여아 출산에 성공해 논란의 중심이 됐다.
이 연구를 두고 세계 과학계는 ‘다른 유전자에 해를 끼칠 위험 때문에 미국에서 금지된 기술’이라며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결탁된 자본 입장에서 유전자 조작 기술은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다. 암 등 유전 질환 질병이 4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스마트 헬스 케어’를 4차 산업혁명 시대 주력 산업으로 선정한 글로벌 자본에겐 매우 좋은 먹잇감이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노화 세포 제거와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 수명을 100세 이상 늘려 상업적 대박을 꿈꾸는 벤처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최대 150세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선전하고 있다. 『사피엔스』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 유발 하라리는 2017년 『호모 데우스』를 통해 인류가 전쟁, 질병, 죽음을 극복하는 신적 존재 ‘호모 데우스(home deus)’, 즉 유전자 조작에 따른 신인류 등장을 예견했다. 그때가 되면 유전자는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계급이 될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SF 상상력을 통한 현실 비판
앤드류 니콜 감독의 2011년 작 『인 타임(In Time)』도 눈에 띈다. 영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들은 25세 때 31,104,000초, 즉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이 시간으로 ‘커피 4분, 버스요금 2시간’ 등 돈 대신 사용한다. 노화는 멈췄지만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동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시간을 대출 받아야 하는데, 신용 불량자는 이마저도 어려워 범죄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 반면 소수 부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영생을 누리고 있다. 감독은 1대 99의 극심한 빈부격차 문제와 시간마저 거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아논』 역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여기서 아논(Anon)은 익명(Anonymity)을 뜻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된 초연결네트워크 사회에 살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심안’을 심어주고, 사람들이 보는 모든 정보는 중앙 서버 ‘에테르’에 저장된다. 영화에서 표현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뇌에 자리 잡은 나노로봇이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컴퓨터(기계)와 사람이 결합된 형태를 증강인간(Augment Human)이라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선 명함이 필요 없다. 그저 보기만 하면 상대방의 이름과 나이, 직업 등 관련 정보가 눈앞에 펼쳐진다. 별도의 전자장비 없이 영상 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는다. 음식의 가격과 칼로리 등 관련 정보도 그저 보기만 하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주고받기까지 한다. 경찰 등 정부 권력기관은 타인의 과거 경력 조회 등 더 많은 정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거기에 실시간으로 타인의 심안에 접속해 범죄 현장을 조사하고, 주변 사람들은 물론 죽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기억 데이터를 통해 범인을 색출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가운데,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할 데이터가 조작돼 있다. 어찌된 일인지 사망자의 기억 데이터에는 본인이 아닌 자기를 죽이려 하는 범인의 시각으로 되어 있다. 범인은 사망자의 심안을 해킹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했다. 피살된 이들은 사망 전 불미스러운 기억을 누군가에게 요청해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급 경찰 살 프라이랜드(클라이브 오웬)는 신분을 위장해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는 익명의 그녀(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찾아 나선다. 그녀가 형사의 기억을 조작하는 동안 그녀를 해킹해 살인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려는 것이 경찰의 계획이다. 하지만 경찰이란 것이 탄로 나는데, 익명의 그녀는 프라이랜드의 심안을 해킹해 보이는 걸 보이지 않게 하고, 데이터를 조작해 그를 살해 용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프라이랜드가 “이젠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자, 옆에 있던 동료는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모든 게 취약해”라고 말한다. 영화는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통제사회에서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라이랜드는 궁지에 몰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건의 실체를 밝혀 내 제대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 시대의 사민권
영화 『아논』에서 그려진 사회상은 어떤 모습일가? 이런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정보의 생산자가 되며 저장된 지식을 네트워크를 통해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시각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더욱 촘촘하게 구성되는 장점도 있다. 반면 치명적 단점도 있다. 초연결네트워크 사회는 해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집중돼 있기에 한번 피해가 발생하면 그 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의 닉 보스트롬 교수는 현재의 과학기술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DNA 조작 바이오해킹으로 대규모 질병이 전파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현재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특징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IOT) 등이다. 한 IT 전문 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 사물인터넷 기기는 150억 개였는데, 2020년에는 2천억 개, 2040년에는 1조 개 이상 될 것이라 한다. 2천억 개의 사물인터넷에서 생산되는 데이터 규모만 40제타바이트에 달하는데, 이는 전 세계 해변 모래알 수인 7해 50경개의 57배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엔 사람들이 포털사이트에 올린 검색어와 카드사용 내역 등도 포함된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특징인 빅데이터(Big Data)다. 소비자의 구매 패턴을 학습해 물건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시스템. 이 때문에 빅데이터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이라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부정적 전망이 나온다. 문화평론가 임태훈은 2014년 『검색되지 않을 자유』에서 “빅데이터는 마케팅과 감시가 분리되지 않은 세계, 인간 행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조정할 수 있는 사회로의 재편을 지향한다”고 경고한다. ‘예측 가능한 인간’은 결국 자본이 원하는 인간상이란 지적이다.
영화 『아논』에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도 연상된다. 앤드류 니콜 감독이 각본을 쓴 1998년 작 『트르먼 쇼』는 매스 미디어를 통한 한 개인의 사민권이 무시된 사례를 보여준다.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사회 역시 개인의 프라이버시(privacy)는 철저히 무시된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2001년 ‘디지털 시대의 프라이버스 권리’라는 논문에서 “프라이버시는 우리말로 ‘사생활’로 번역되는데, 흔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보호 또는 은폐의 대상으로만 여겨진다”며 “사생활 권리는 다른 기본 인권에 비해 ‘배부른 자의 인권 타령’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천부적 권리를 지닌 사적 개인(私民)으로서의 권리, 즉 ‘사민권’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헌법에 등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에서의 국민은 통치대상으로서의 국민(citizen)이 아닌 주권자인 사민권을 지닌 국민(people)이라는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가장 중요한 기본 인권이라 말한다.
영화 『아논』은 ’나는 신에게조차 잊히길 열망하다’는 19세기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로 시작된다. 자본이 예측 가능한 인간형으로 몰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예측되지 않을 권리도 중요한 인권이 아닐까.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