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면서 산다. 조금 더 변명조로 말하자면, 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인다. 특히 그것이 ‘녹색’과 관련되어 있을 때 그렇다. 명백히 구원의 색인 녹색을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 일은 제법 까다로운 미션인데, 우리는 덜 나쁜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업이 내세우는 ‘지속가능성’이라는 레테르를 소비하면 ‘미션 컴플리트’가 된다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다.
그에 대한 뜨끔한 일침.
“녹색으로 소비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쾌감은 반계몽주의적일 뿐 아니라, 비정치적이거나 반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쾌감은 우리가 어떻게 지구에서 옳고 정당하게 함께 살 수 있느냐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질문을 순전히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창의적 아이디어 경쟁으로 부패해버리는데, 이러한 경쟁은 많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어내 결국은 모든 게 좋아진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사실 더 뜨끔하다. 일상에 매우 깊숙하게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선 캡슐에 담긴 커피를 머신에 밀어 넣어 버튼을 누르고 쫀쫀한 황금색 크레마가 곁들여진 커피가 추출되는 30초 안팎의 향기로운 시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중에서도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로만. 커피는 알루미늄 캡슐에 담겨 있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소비하는 그 알루미늄 캡슐은 매년 최소 8000톤이다. 알루미늄을 채굴하기 위해서 거대한 열대림을 훼손하고 있으며, 별도의 댐과 수력발전소를 사용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토착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토양에 일으키는 오염 역시 어마어마하고 빈 캡슐은 적잖이 회수될 테지만 우리는 그 중간 과정을 확인할 수 없도록 배제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네스프레소가 말하는 지속가능성의 방향이 공정무역커피 사업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루미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종류의 커피 사업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있으며, 캡슐 커피를 이용하기 위한 액세서리 비용뿐만 아니라 캡슐의 처리 비용까지를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다. 커피를 추출하는 향기로운 시간 30초가 지났다. 우리가 구성한 세계와 일상을 반성하기 빠듯한 30초다.
『위장환경주의』를 속 편하게 읽는 방법은, 책의 부제처럼 ‘그린으로 포장한 기업의 실체’에 분노하고 통탄하는 일이다. 그런데 조금은 솔직하고 또 조금은 괴롭게 읽어 보자. 책과 관련하여 나에 대하여 설명할 것 같으면, 나는 그린으로 포장한 기업을 소비함으로써 나 자신을 그린으로 포장하려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핑계거리로 삼으면 조금 더 손쉽게 뒤로 물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책은 그 대목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두가 나무 위에 있는 집에 살면서 숲의 벌채를 막을 수는 없다. 모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행한 현장을 발견하거나 기후 훼손에 관한 연구를 발표할 수는 없다. 모두가 에콰도르에서 우림을 위해 투쟁하거나 또 다른 곳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각기 할 일이 있다. 대량 사육 시설과 산업화한 농업에 반대하고, 물을 비롯한 공공 자원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시민 행동에 참여할 수 있다. 자동차 없는 도심을 위해 투쟁하고, 시민의 손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기업이 내세우는 광고 이미지에 속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를 통해서 좀 더 녹색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는 있다. 녹색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산다. 그리하여 명백히 구원의 색이 된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면서 산다. 조금 더 변명조로 말하자면, 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인다. 특히 그것이 ‘녹색’과 관련되어 있을 때 그렇다. 명백히 구원의 색인 녹색을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 일은 제법 까다로운 미션인데, 우리는 덜 나쁜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업이 내세우는 ‘지속가능성’이라는 레테르를 소비하면 ‘미션 컴플리트’가 된다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다.
그에 대한 뜨끔한 일침.
“녹색으로 소비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쾌감은 반계몽주의적일 뿐 아니라, 비정치적이거나 반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쾌감은 우리가 어떻게 지구에서 옳고 정당하게 함께 살 수 있느냐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질문을 순전히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창의적 아이디어 경쟁으로 부패해버리는데, 이러한 경쟁은 많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어내 결국은 모든 게 좋아진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사실 더 뜨끔하다. 일상에 매우 깊숙하게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선 캡슐에 담긴 커피를 머신에 밀어 넣어 버튼을 누르고 쫀쫀한 황금색 크레마가 곁들여진 커피가 추출되는 30초 안팎의 향기로운 시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중에서도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로만. 커피는 알루미늄 캡슐에 담겨 있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소비하는 그 알루미늄 캡슐은 매년 최소 8000톤이다. 알루미늄을 채굴하기 위해서 거대한 열대림을 훼손하고 있으며, 별도의 댐과 수력발전소를 사용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토착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토양에 일으키는 오염 역시 어마어마하고 빈 캡슐은 적잖이 회수될 테지만 우리는 그 중간 과정을 확인할 수 없도록 배제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네스프레소가 말하는 지속가능성의 방향이 공정무역커피 사업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루미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종류의 커피 사업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있으며, 캡슐 커피를 이용하기 위한 액세서리 비용뿐만 아니라 캡슐의 처리 비용까지를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다. 커피를 추출하는 향기로운 시간 30초가 지났다. 우리가 구성한 세계와 일상을 반성하기 빠듯한 30초다.
『위장환경주의』를 속 편하게 읽는 방법은, 책의 부제처럼 ‘그린으로 포장한 기업의 실체’에 분노하고 통탄하는 일이다. 그런데 조금은 솔직하고 또 조금은 괴롭게 읽어 보자. 책과 관련하여 나에 대하여 설명할 것 같으면, 나는 그린으로 포장한 기업을 소비함으로써 나 자신을 그린으로 포장하려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핑계거리로 삼으면 조금 더 손쉽게 뒤로 물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책은 그 대목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두가 나무 위에 있는 집에 살면서 숲의 벌채를 막을 수는 없다. 모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행한 현장을 발견하거나 기후 훼손에 관한 연구를 발표할 수는 없다. 모두가 에콰도르에서 우림을 위해 투쟁하거나 또 다른 곳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각기 할 일이 있다. 대량 사육 시설과 산업화한 농업에 반대하고, 물을 비롯한 공공 자원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시민 행동에 참여할 수 있다. 자동차 없는 도심을 위해 투쟁하고, 시민의 손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기업이 내세우는 광고 이미지에 속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를 통해서 좀 더 녹색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는 있다. 녹색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산다. 그리하여 명백히 구원의 색이 된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