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대를 위하여[살대를 위하여 152] 욥에게

‘왜 나는 고통스러운가?’ 갈 길도, 살 길도 몰라 영혼이 불가마에서 구워지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답을 찾겠다고 읽던 성서에서 찾아낸 ‘욥’의 서사에 공감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의 고민이 일생을 이끄는 불침의 나침반은 못 됐을지언정 적어도 공익을 해치는 자로 살지 않게 한 삶의 울타리는 됐던 게 틀림없다고 고개 끄덕이게 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죄 없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분명한 까닭을 몰라 괴롭습니다. 사람이 한 터럭의 죄도 없이 살 수 없으니 ‘죄 없는 인간’이란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타박 받을 소리이긴 합니다. 그러나 태중에서 가습기살균제에 희생된 태아는 어떤 죄입니까? 미세먼지 재난으로 기대수명을 깎이는 무수한 인명들은 모두 어떤 죄입니까? 핵발전소의 잠재적 방사능 폭발 위험 속에 내던져진 더 많은 이들은 또 무슨 죄입니까? 오지랖 넓다는 소릴 듣겠지만 적어도 환경운동을 하는 자로 사니 그들의 고통에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별자로서 우리는 모두 신 앞에서는 죄 가운데 살지만, 우리 대부분은 적어도 다른 인간 앞에서는 무죄일 가능성이 많은 삶을 삽니다. 그런데 ‘어떤 이’와 ‘어떤 이들’은 명백히 자기 과오가 아닌 일의 희생양이 되어 고통당하거나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 고통의 이유를 찾아내고자 드린 질문은 아닙니다. 도리어 고통의 이유가 ‘너의 죄에 있다’고 말하는 친구인 척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 질문입니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 온 친구들은 욥에게 죄를 자복하라 강권합니다. 회개를 강제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게 ‘신을 시험하는 자’라 비난합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죄가 무엇이냐?” 묻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핵전기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 노인들에게, 핵 대신 해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석탄화력발전소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호흡기가 약한 아이에게 울며 방진 마스크를 씌우는 부모들에게, ‘사회적 이익을 위해 침묵할 줄 모르는 자들’이라 ‘매도’하는 자들입니다.

 고통당하는 욥에게 죄를 생각해 내라고, 없는 죄를 발명해 내라고 요구하는 존재가 친구일 수 없습니다. ‘엘리후’를 가장하여 ‘사회적 부조리’를 수긍하라고 말하는 존재가 참 선지자일 리도 없습니다. 왜 욥에게 위로하면 안 됩니까? 왜 욥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그의 상처를 닦아주고 그의 목을 축여주면 안 됩니까? 자연과 사람이 만든 재난의 피해자들을 고통에서 건지려는 시도는 신보다 먼저 친구인 인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욥일 수도 있고, 언젠가 욥의 고난이 나의 고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나와 다른 사회적 이해와 정견을 찾아내어 그의 고통을 그것과 연관 짓기’ 전에 먼저 구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잠재적 환경 피해자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욥은 욥을’, ‘우리는 서로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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