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대를 위하여[살대를 위하여 136] 기시감, 그리고 당사자 적격

2003년이었습니다. 1990년 안면도 주민들이 가열한 반대운동으로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는 권위주의 정부의 시도를 무력화시킨 지 십수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새로운 방법으로 방폐장 후보지를 정하게 했습니다. 지역 스스로 후보지가 되도록 지자체가 신청하고 지역민이 찬반 투표하는 유치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부안이 주민공동체의 공감 없이 군수 독단으로 신청했고 부안 주민들은 격렬한 반대운동과 92퍼센트에 가까운 반대투표로 방폐장을 거부했습니다. 2005년이 되자 정부는 다시 유치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신청이 아니라 지역 다수에게 공모를 받고 최고 찬성투표 지역을 공식 후보지로 지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89.5퍼센트의 최고 찬성투표율로 경주가 방폐장이 됐습니다.  

지난 10월 20일 신고리 5·6호기 건설 백지화와 계속 건설에 관한 공론화위원회는 정부에 위원회가 ‘공사 재개’를 결정했다고 알렸습니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건설 재개를 59.5퍼센트, 중단을 40.5퍼센트로 선택해 공사를 재개하도록 정부에 권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과 무관하게 장기적으로 원전 축소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53.2퍼센트로 확대하자는 의견 9.7퍼센트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고도 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신고리 5·6호기 건설하고 탈핵정책은 계속하라는 절묘한 판단’이라며 반색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24일 국무회의를 열어 ‘2022년 원전 28기, 2031년 18기, 2038년 14기’로 축소하는 탈핵 로드맵을 심의 의결했습니다. 

공론화위원회가 활동 전 국민 여론은 신고리 5·6호기 건설과 중단 비율이 반반이었지만 거의 20퍼센트나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 그 자체가 아니라 공론화라는 방식으로 정책 결정의 책임을 시민들에게 넘기고 정치적 명분을 얻는 정부의 정책운용에 있습니다. 경주 방폐장과의 기시감 때문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회피한 것은 촛불시민들에게 약속한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만이 아닙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우리도 국민입니다!” 지난 10월 22일 19명의 미래세대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들이 공론화에 참여할 이른바 ‘당사자 적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외면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핵전기의 편익을 누리는 이들보다 10만 년 이상 방사능 독성을 내뿜는 핵폐기물을 내놓는 원전과 그 핵쓰레기를 보관하는 방폐장을 오래도록 관리할 책임을 지게 될 미래세대야말로 핵문제의 당사자들입니다. 금세기 후반이나 돼야 겨우 탈핵이 가능한 탈핵 정책의 속도에 관해서도 “미래세대의 의견을 물어야 합니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오늘의 어른들에게만 묻는 일이 과연 ‘민주적인가?’ 되묻고 싶습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주간 인기글





03039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23
TEL.02-735-7088 | FAX.02-730-1240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서울 아03915 | 발행일자 1993.07.01
발행·편집인 박현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현철


월간 함께사는길 × 
서울환경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