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과 동물을 유사하게 보는 관점이 개방적으로 바뀔수록 생물학자는 살기 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생물학이 인간 사회를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알아보기로 했다. 만약 이것이 곧장 정치적인 논쟁으로 뛰어드는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생물학은 애초부터 그것에 관여되어 있다.”
프란스 드 발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는 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사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프란스 드 발에게 있어 생물학의 담론은 그 본질상 분명한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따라서 그의 글에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사건 사고들, 정치와 관련된 인물과 그 주장, 그와 더불어 예술이나 문화적인 목록들이 등장한다. 생물학이 과학이나 자연과학 영역의 특별한 지식을 요하는 학문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충분히 즐길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그것은 『공감의 시대』는 아무 페이지나 들춰 읽어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조금 길지만, 다음 두 인용을 통해 프란스 드 발의 면모를 눈치 챌 수도 있을 것이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활용되는가에 대한 대목이다.
“진화 이론은 보수주의파 사이에 두드러지게 인기가 높지만 생물학자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다. (중략)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 의해 발목 잡히고 지체되지 말아야 하는 투쟁으로 삶이 묘사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자연의 법칙을 비즈니스 언어로 옮기며 ‘적자생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정치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생겨났다. 스펜서는 사회 경쟁의 장을 허물고 평등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매도했다. 그에게는 ‘적자’가 ‘비적자’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비생산적인 것이었다. (중략) 미국은 이를 경청했다. 세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완벽하게 수용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경쟁을 생물학의 법칙이라 부르며, 사회적 다윈주의가 인간 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존 D 록펠러는 심지어 종교와 사회적 다원주의를 연결해 대형 비즈니스의 성장은 ‘그저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른바 기독교 우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이런 종교적인 시각으로 인해 두 번째의 중대한 모순이 형성된다.”
“인간의 본성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것으로 볼 때와 우리의 밑바탕에는 협동과 유대 의식이 있다고 볼 때 세우는 사회의 경계선은 분명히 다르다. 다윈은 스펜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론에서 ‘가장 강한 자의 권리’라는 교훈을 뽑아내려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물학자로서 진화론이 사회의 처방전으로 회자되는 것을 듣는 데 지친 이유이다. 그들은 이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론이 뭘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짧게 말하면, 다윈에 의해 촉발된 진화론 역시 사회적으로 ‘진화’됐다는 것인데, 그 진화의 방향은 어긋나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달을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았다는 것. 과학의 세계는 ‘협동과 유대 의식’인 데 반해 ‘강한 자의 권리’에 따라 구축된 인간 생태계는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비추어보면 아주 근본적으로 잘못된 진화의 결과인 셈이다. 프란스 드 발이 말하고자 하는 진화의 핵심은 “탐욕의 시대는 가고 공감의 시대가 왔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책을 옮긴 최재천은 서문에서 ‘세월호’를 언급한다. “저는 대통령이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추궁하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그 시간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내 아이가 죽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프란스 드 발의 진화론과 최재천의 세월호 비판. 요즘 표현을 따르면, 적폐는 탐욕의 결과이며, 우리 안에 이미 내재돼 있는 ‘공감’이라는 본성을 해친, 비인간적인 생태계 속에 우리를 가둬뒀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 잘 살아야 할 때에 이른 것은 아닌가.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인간과 동물을 유사하게 보는 관점이 개방적으로 바뀔수록 생물학자는 살기 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생물학이 인간 사회를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알아보기로 했다. 만약 이것이 곧장 정치적인 논쟁으로 뛰어드는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생물학은 애초부터 그것에 관여되어 있다.”
프란스 드 발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는 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사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프란스 드 발에게 있어 생물학의 담론은 그 본질상 분명한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따라서 그의 글에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사건 사고들, 정치와 관련된 인물과 그 주장, 그와 더불어 예술이나 문화적인 목록들이 등장한다. 생물학이 과학이나 자연과학 영역의 특별한 지식을 요하는 학문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충분히 즐길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그것은 『공감의 시대』는 아무 페이지나 들춰 읽어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조금 길지만, 다음 두 인용을 통해 프란스 드 발의 면모를 눈치 챌 수도 있을 것이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활용되는가에 대한 대목이다.
“진화 이론은 보수주의파 사이에 두드러지게 인기가 높지만 생물학자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다. (중략)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 의해 발목 잡히고 지체되지 말아야 하는 투쟁으로 삶이 묘사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자연의 법칙을 비즈니스 언어로 옮기며 ‘적자생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정치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생겨났다. 스펜서는 사회 경쟁의 장을 허물고 평등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매도했다. 그에게는 ‘적자’가 ‘비적자’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비생산적인 것이었다. (중략) 미국은 이를 경청했다. 세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완벽하게 수용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경쟁을 생물학의 법칙이라 부르며, 사회적 다윈주의가 인간 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존 D 록펠러는 심지어 종교와 사회적 다원주의를 연결해 대형 비즈니스의 성장은 ‘그저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른바 기독교 우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이런 종교적인 시각으로 인해 두 번째의 중대한 모순이 형성된다.”
“인간의 본성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것으로 볼 때와 우리의 밑바탕에는 협동과 유대 의식이 있다고 볼 때 세우는 사회의 경계선은 분명히 다르다. 다윈은 스펜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론에서 ‘가장 강한 자의 권리’라는 교훈을 뽑아내려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물학자로서 진화론이 사회의 처방전으로 회자되는 것을 듣는 데 지친 이유이다. 그들은 이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론이 뭘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짧게 말하면, 다윈에 의해 촉발된 진화론 역시 사회적으로 ‘진화’됐다는 것인데, 그 진화의 방향은 어긋나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달을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았다는 것. 과학의 세계는 ‘협동과 유대 의식’인 데 반해 ‘강한 자의 권리’에 따라 구축된 인간 생태계는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비추어보면 아주 근본적으로 잘못된 진화의 결과인 셈이다. 프란스 드 발이 말하고자 하는 진화의 핵심은 “탐욕의 시대는 가고 공감의 시대가 왔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책을 옮긴 최재천은 서문에서 ‘세월호’를 언급한다. “저는 대통령이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추궁하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그 시간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내 아이가 죽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프란스 드 발의 진화론과 최재천의 세월호 비판. 요즘 표현을 따르면, 적폐는 탐욕의 결과이며, 우리 안에 이미 내재돼 있는 ‘공감’이라는 본성을 해친, 비인간적인 생태계 속에 우리를 가둬뒀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 잘 살아야 할 때에 이른 것은 아닌가.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