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이야기 그림 24] 반성

세수를 마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기 위해 화장품 뚜껑을 열었다. 누군가 바르라고 준 화장품 샘플이라 정품보다 10배 정도 작은 용기에 담겨있다. 앙증맞은 크기 때문인지 자꾸만 손안에서 겉돌기만 하고 뚜껑과 몸체가 잘 맞지 않는다. 피부타입에 맞게 세심하게 화장품을 고르기엔 미용 쪽으로는 좀체 흥미가 없다. 뚜껑이 잘 맞지 않아 반쯤 열려있는 작은 로션용기를 곰지락 거리고 있자니 한심하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손바닥에 톡톡 털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쓰겠다는 심산으로 참았다. 겨우 뚜껑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작은 로션 용기가 오늘 아침 마지막 로션 한 방울을 남기고 바닥났다.

아무리 털어도 나오지 않자 차라리 시원했다. 불량품이라 생각하며 썼던 로션 용기는 이제 재활용 용품으로 분류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뚜껑을 천천히 돌려보니 몸체와 딱 맞아 알맞게 끼워지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제대로 맞지 않아 늘 반쯤 열어두고 썼는데 홈과 홈을 잘 맞춰 천천히 돌리니 쉽게 맞아 들어간다. 심지어 안정감까지 느껴지는 게 아닌가. 

탁상용 달력을 한 장 넘기면 이제 2017년도 달력도 재활용으로 분류되어 버려진다. 마지막 한 달을 남기고 산만한 정신을 가다듬고 올해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계획과 소망은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교묘하게 교차한다. 계획은 절반도 실천하지 못하고 소망으로 남았다는 말이 된다. 아마 소망조차 12월 마지막 날에 용도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신은 비웃는다.”라는 말이 있다. 한치 앞도 모르면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인간을 신은 우습게 여긴다는 뜻인데 신보다 내가 먼저 비웃고 싶은 심정이다.

2017년을 한 달 남기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생각한다. 

쉽게 포기한 일은 없었는지, 상처 받기 전에 포기한 관계는 없었는지, 인내가 싫어 기다려주지 못한 사람은 없었는지. 2018년에도 신이 배꼽잡고 웃을지도 모르는 계획을 잔뜩 세우고 또 한 달을 남기고 오늘처럼 반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나는 누구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만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반성이 되풀이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병아리 눈곱만큼은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를 남기고 자신은 불량품이 아니었음을 알려준 작은 로션 용기 덕분에 오늘 아침 반성이란 걸 한다. 끝에서 다시.


글 · 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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