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선길의 사랑 27] 나, 걸어간다

운곡서원의 400년 된 은행나무

 

삶이란 한평생 길을 걷다 끝나는 일이다. 나는 용기가 부족한 탓인지 아직 새로운 길을 만들지 못했다. 선배가 닦아놓은 길을 좇았을 뿐인데도 삶은 왜 이리 버거운 것인지? 애당초 남의 길을 걸어온 탓일까? 상념에 잠긴다. 

‘당신의 치유의 공간은 어디인가?’ 질문을 받은 지 하루가 지났어도 딱히 떠오르는 데가 없다. 도시의 안락함에 익숙한 탓일 게다. 대도시의 북적임은 싫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소박한 커피가게의 쉼은 좋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그 한 잔의 시간을 사랑한다. 고단할 땐 동네 작은 목욕탕의 수증기 속에 잠기는 기쁨도 기껍다. 그런 소소한 휴식과 충전의 시간은 온전히 사적인 것. 다른 이와 함께 치유의 시간으로 걸어들어 갈 곳을 찾았다. 경주 남산의 부처바위와 천북면의 운곡서원, 그 두 곳으로 길을 정했다. 그럴 줄 알았다. 쉼을 찾아 그 길을 걸어갔던 선배들의 길을 나는 또 따라간다.

 

부처바위로 불리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부처바위는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신비의 지처다. 20년 전이다. 남산에서 등반대회가 있었고 비가 내렸다. 숲으로 들어갔다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일행은 멀리서 들려오는 도로변의 차량 소리에 의지해 때론 길 아닌 곳을 헤치며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헤매는 걸음 사이 불현듯 안개 속에서 부처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다란 바위가 새롭게 드러나고 여러 모양의 부처와 탑들의 음각이 드러났다. 부처바위였다. 그 아래 작은 암자가 있었다. 부처의 은덕이었을까. 우리는 무사히 귀환했다. 그 뒤로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종종 옥련암의 부처바위로 안내했다. 함께 갔던 분들은 모두 “고맙다!”고 덕담을 했다. 경주에서 치른 2012년 환경연합 전국활동가대회 때도 마지막 날 일정에 이곳을 포함했다. 오늘 부처바위는 가을의 고아한 정취를 안겨주었다. 

2011년의 일이다. 생태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성대 선생님과 함께 마을나무를 조사하러 다녔다. 선생님이 갖고 계시던 지도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린 그 나무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줄자로 둘레를 재고 삼각함수를 이용하여 각도기로 높이를 측정하고 나무의 생육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천북면의 운곡서원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부터 노거수가 내뿜는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수백 년 풍파에도 그는 흐트러짐 없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후로 여러 번 그를 만나러 갔다. 한 번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갔는데 7~8명의 아이들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었다.  

운곡서원은 안동 권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 정조 9년(1785년)에 조성됐다. 신령이 깃든 은행나무는 이보다 100년 앞서 자라났다. 은행나무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 문득 쓸쓸해졌다. 은행은 암수가 따로 있다고 하는데 운곡서원엔 한 그루뿐이다. 긴 세월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하여 푸르름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오직 한 곳에 서있어야만 하는 그에게 길은 무엇일까? 

 

 

직업을 써넣어야 하는 서류에 ‘환경운동가’로 적은 지 벌써 5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생짜인 양 한다. 천성이 게을러서 허명이 두렵다. 이름이 알려지는 만큼 몸은 바빠져야 하고 때론 노력으로 메우기 힘든 골짜기도 만난다. 베짱이로 살아온 삶이 쌓아온 산이 높은 탓이다. 이상홍, 한국 탈핵의 굵직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경주에서 활동하는지라 깜냥 부족에 게으름이 송구하다. 

한 발 내딛지 않고도 350년을 걸어온 은행나무의 길을 생각해 본다. 부처바위도, 은행나무도 단지 서 있을 뿐인데 길은 그곳으로 흘렀다. 머물러 길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삶이라면 나는 끈질기게 길 가는 것으로 내 길을 만들겠다. 이 길은 새로이 펼쳐지고 또 접히며 나의 길이 될 것이다. 나 걸어간다.


글 |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사진 | 이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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