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선길의 사랑 19] 꽃 피울 날 오리라

석문호를 따라 지난 봄 시민들과 벚꽃나무 200여 그루를 심었다. 이 길에서 봄을 기다린다

석문호를 따라 지난 봄 시민들과 벚꽃나무 200여 그루를 심었다. 이 길에서 봄을 기다린다


온 세상이 누가 더 빠른가를 놓고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하다. TV 광고 속의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등의 첨단제품도 속도를 첫 번째로 내세운다.  

그러나 모두가 빠름에 열광하고 더 빠른 속도를 위해 폭주하고 있는 이 순간에 정작 빨라야  할 것은 너무나 더디고 오히려 느려야 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현실은 내 자신에게 닥친 가장 큰 모순이다. 고향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야트막한 산자락이 도시개발에 밀려 송두리째 사라지는 비극을 맛본 이들에게 빠름은 아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간척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황금갯벌과 어장을 한순간에 잃은 어민에게 빠름은 약탈과 동의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 속에서 도처에 신종 환경난민과 실향민이 넘쳐난다.  

반면 전근대적인 권위주의와 배타주의, 지역주의 등은 느림보 거북이처럼 변할 줄 모른다. 생명, 평화, 생태, 민주, 평등, 자치, 복지 등의 새로운 가치는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 세상이 너무 빠르다고도, 느리다고도 푸념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누군가 말했듯 탈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침범해 들어오는 개발과 인공의 파도에 지쳐갈 무렵, 내게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면천면에 위치한 아미산에 오른다. 해발 349.5미터. 산악지역에서 볼 때는 동네 뒷산일지 모르나 얕은 구릉지가 대부분인 당진에서 아미산은 엄연한 지역의 최고봉이다. 지금은 폐교돼 외국어교육센터로 변모한 구 죽동초등학교를 지나 등산로로 접어든다. 개발 압력으로 온갖 환경 현안이 끊이지 않는 당진에서 그나마 사람의 손길을 덜 타 옛 모습을 간직한 아미산은 생활에 지친 당진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선사한다. 두세 개의 봉우리를 넘으면 평소 운동과 담쌓고 지냈던 사람들은 점차 숨이 가빠온다. 해발 고도만 보고 편하게 나섰던 사람들에게 아미산은 쉬이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침내 도착한 정상. 옅은 안개 속에서 당진의 전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당진 보덕사. 한때 바닷가 절벽에 위치해 그 풍광이 절경이었다는 이야기는 옛이야기로 남았다

당진 보덕사. 한때 바닷가 절벽에 위치해 그 풍광이 절경이었다는 이야기는 옛이야기로 남았다


환경운동가로서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 당진은 우리나라의 축소판이다.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외부에서 자본주의를 주입받아 국가 주도의 급속한 압축 성장을 폭력적으로 추진했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농어촌지역이었던 당진 역시 수도권에 근접한 임해지역이라는 지경학적 위치 때문에 압축 성장을 경험했다.  

잇단 방조제 조성과 간척, 대규모 산업단지, 석탄화력, 제철소 등의 건설은 당진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고용률 전국 2위, 지역내 총생산 증가율 전국 상위권, 인구증가율 도내 1위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뒤따랐다. 그러나 어디 당진사람들의 삶의 질이 그렇게 높았던가. 내 주위에는 왜 이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많은가. 아직도 고달프기만 한 수많은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개발과 성장은 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세상사에 지친 당진사람들에게 작은 휴식의 공간을 제공했던 아미산도 한때 개발의 압력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지난 2009년, 농어촌공사에서 아미산의 한 자락을 절토해 66세대, 2만3000여 평 규모의 전원마을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마을주민들과 당진지역 시민환경단체가 힘을 합해 반대운동을 벌인 끝에 아미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예전에 바다였으나 간척으로 인해 호수가 된 석문호

예전에 바다였으나 간척으로 인해 호수가 된 석문호

 

당진에서 제일 높은 산인 아미산을 내려와 이번에는 낮은 곳으로 향한다. 한때 바닷가에 위치한 사찰로 유명했던 보덕사. 이제는 간척으로 막혀 옛 모습을 잃었지만 아직도 절벽에 위치한 모습이 절경이다. 지난해 간척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 주변 도로 옆으로 벚꽃나무를 심었다. 비록 바다를 잃어 애처롭지만 모진 개발의 광풍에도 싹을 틔우는 벚꽃처럼 패배로 점철된 내 운동도 언젠가는 꽃을 피울 날이 있겠지.

 


글 | 유종준 당진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사진 | 이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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