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코일처럼 굽어 있고 그 끝이 흉골과 융합되어 매우 큰 소리로 뚜르륵 뚜르륵 우는 새가 있다. 흔히들 학이라고 부르는 새, 두루미다. 두루미를 두고 고대인들은 하늘나라의 전령이 바로 저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대하고 우아한 날갯짓으로 하늘의 전령을 물고와 세상에 전하는 그런 종류의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들의 상상을 자극한 데에는 두루미의 표현력이 남다른 점도 있다. 사랑을 나눌 때, 하늘을 날아오르려 준비할 때, 무리들에게 위험을 알릴 때, 그때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고 한다.
고대의 인간들은 두루미에게서 들려오는 것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아 어떤 그림을 어디에 어떻게 그려두었을까, 그런 한가로운 망상을 하다가, 고대인들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큰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두루미로부터 그 어떤 영향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두루미는 『두루미 하늘길을 두루두루』와 같은 책들로부터 ‘읽어내는’ 새이거나, 그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진으로부터 ‘관람하는’ 새였다. 한심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다. 새들은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무리들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방식으로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러시아의 예술에서도 영적인 존재로 곧잘 등장해왔던 두루미는 이제 현실에서 소멸하는 와중인데, 그것은 분명 신비주의 따위가 아니라 자기의 땅에 대한 분노이거나 원망일 것이다.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따르면 서식지 파괴, 개발, 오염, 화학비료와 살충제 남용, 사냥, 불법 거래 등으로 인해 15종 가운데 11종이 멸종 위기 직전이거나 멸종 위기에 처했다. 최대 월동지였던 우리의 저 낙동강에는 더 이상 흑두루미가 날아들지 않는다. 모두가 다 아는 그 이유 때문이다.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흔하게 발견되었다는 증언들이 매우 낯설게 들린다.
두루미가 사라졌지만, 삽질로 이뤄놓은 것들은 도처에서 압도적이었다. 생활의 편리가 압도적이었고, 파괴되는 자연이 펼쳐놓을 파국에 대한 무지 또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습지가 습지다워지고 생태계가 생태계다워진다면, 습지의 최상위 포식자 두루미는 그 복원과 회복에 답례라도 하듯 돌아오게 되는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장면이야말로 그 모든 것들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것. “겨울이 봄으로 향해 갈 때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가끔 재두루미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암수가 서로 애정을 확인하고 유대감을 높이는 것을 ‘마주울기’라고 한다. 암컷이 짧게 ‘꾸, 꾸’ 소리를 시작하면 수컷은 목을 뒤로 젖히고 부리를 하늘로 향해 날개를 휘도록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과 ‘꾸르르, 꾸르르’ 노래를 반복한다. 암컷도 수컷을 따라 소리와 동작을 맞춰준다. 이런 행동을 통해 서로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새들의 마주울기가 가능한 땅, 우리에게 있었으나 스스로 훼손해 버린 땅, 당신과 내가 발 디딘 그 자리.
전설 속의 학은 천년을 살면 청학이 되고 다시 천년을 살면 현학이 되어 불사한다고 한다. 그 전설은 이렇게 인간의 소망을 담아 해석된다. “천학은 학이 천년을 산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생겨난 ‘천년학’이라는 말의 줄임말 같다. 실제 두루미는 천년을 살지 않지만,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화롭게 그 땅에서 그 어미의 어미가 살았던 것처럼 자식이 살아가고 그 자식의 자식도 똑같이 살아간다면 천년학이라는 말이 맞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두루미류의 대부분이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종들이다. 두루미들은 천년학을 꿈꾼다.”어미가 살았던 자리에서 자식이 살아가 천년의 생을 다하도록 소망하는 것이 두루미들의 꿈이라면, 천년학을 꿈꾸는 것은 모든 것의 이름을 두루미라고 간절하게 불러야겠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잡지 『텍스트』 기자
기도가 코일처럼 굽어 있고 그 끝이 흉골과 융합되어 매우 큰 소리로 뚜르륵 뚜르륵 우는 새가 있다. 흔히들 학이라고 부르는 새, 두루미다. 두루미를 두고 고대인들은 하늘나라의 전령이 바로 저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대하고 우아한 날갯짓으로 하늘의 전령을 물고와 세상에 전하는 그런 종류의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들의 상상을 자극한 데에는 두루미의 표현력이 남다른 점도 있다. 사랑을 나눌 때, 하늘을 날아오르려 준비할 때, 무리들에게 위험을 알릴 때, 그때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고 한다.
고대의 인간들은 두루미에게서 들려오는 것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아 어떤 그림을 어디에 어떻게 그려두었을까, 그런 한가로운 망상을 하다가, 고대인들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큰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두루미로부터 그 어떤 영향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두루미는 『두루미 하늘길을 두루두루』와 같은 책들로부터 ‘읽어내는’ 새이거나, 그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진으로부터 ‘관람하는’ 새였다. 한심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다. 새들은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무리들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방식으로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러시아의 예술에서도 영적인 존재로 곧잘 등장해왔던 두루미는 이제 현실에서 소멸하는 와중인데, 그것은 분명 신비주의 따위가 아니라 자기의 땅에 대한 분노이거나 원망일 것이다.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따르면 서식지 파괴, 개발, 오염, 화학비료와 살충제 남용, 사냥, 불법 거래 등으로 인해 15종 가운데 11종이 멸종 위기 직전이거나 멸종 위기에 처했다. 최대 월동지였던 우리의 저 낙동강에는 더 이상 흑두루미가 날아들지 않는다. 모두가 다 아는 그 이유 때문이다.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흔하게 발견되었다는 증언들이 매우 낯설게 들린다.
두루미가 사라졌지만, 삽질로 이뤄놓은 것들은 도처에서 압도적이었다. 생활의 편리가 압도적이었고, 파괴되는 자연이 펼쳐놓을 파국에 대한 무지 또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습지가 습지다워지고 생태계가 생태계다워진다면, 습지의 최상위 포식자 두루미는 그 복원과 회복에 답례라도 하듯 돌아오게 되는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장면이야말로 그 모든 것들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것. “겨울이 봄으로 향해 갈 때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가끔 재두루미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암수가 서로 애정을 확인하고 유대감을 높이는 것을 ‘마주울기’라고 한다. 암컷이 짧게 ‘꾸, 꾸’ 소리를 시작하면 수컷은 목을 뒤로 젖히고 부리를 하늘로 향해 날개를 휘도록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과 ‘꾸르르, 꾸르르’ 노래를 반복한다. 암컷도 수컷을 따라 소리와 동작을 맞춰준다. 이런 행동을 통해 서로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새들의 마주울기가 가능한 땅, 우리에게 있었으나 스스로 훼손해 버린 땅, 당신과 내가 발 디딘 그 자리.
전설 속의 학은 천년을 살면 청학이 되고 다시 천년을 살면 현학이 되어 불사한다고 한다. 그 전설은 이렇게 인간의 소망을 담아 해석된다. “천학은 학이 천년을 산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생겨난 ‘천년학’이라는 말의 줄임말 같다. 실제 두루미는 천년을 살지 않지만,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화롭게 그 땅에서 그 어미의 어미가 살았던 것처럼 자식이 살아가고 그 자식의 자식도 똑같이 살아간다면 천년학이라는 말이 맞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두루미류의 대부분이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종들이다. 두루미들은 천년학을 꿈꾼다.”어미가 살았던 자리에서 자식이 살아가 천년의 생을 다하도록 소망하는 것이 두루미들의 꿈이라면, 천년학을 꿈꾸는 것은 모든 것의 이름을 두루미라고 간절하게 불러야겠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