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에코텍스트 90] 도시의 정원을 말하다

제니퍼 코크럴킹 지음, 이창우 옮김, 삼천리, 2만4000원

 

“내가 했던 여행과 인터뷰, 발견이 언제나 직선 경로를 따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간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적어도 주제로서 의미가 있도록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소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내 속에 있는 정원사 기질 탓이다. 여러분이 내 정원을 본다면 질서정연한 줄을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어쩌면 저 ‘정원사 기질’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정원사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 그는 다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정원사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정원 일은 농업이 아니다. 그의 경작지는 농경지가 아니다. 심지어 그가 정성을 쏟는 마당에는 이른바 ‘텃밭’이 없다. 그는 그저 꽃과 나무를 키우고 싶을 따름이다. 즐기고 싶은 일, 그것을 그는 다음 생의 노동이라고 부른다. 실제의 삶에서 피와 땀을 자양분 삼아 타인이 흘린 그것들의 결과물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폐쇄회로 속에서 정원은 홀로 빛난다. 그의 정원은 그래서 생산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목적이 있다면 정원을 가꾸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꽃이 피거나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것은 차라리 자족적인 취미에 더 가깝다. 그는 자신의 정원이 문득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라지만, 타인을 스스럼없이 초대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나는 그렇게 가꿔진 정원을 당연한 듯 무심하게 누리는 가장 나쁜 종류의 관람자이다.  

이제 정반대의 사례. 정원사도 농부도 꿈꾸지 않지만, 마치 농부인 듯, 정원사인 듯 사는 지인 부부가 있다. 그들은 자주 이용하는 생협 매장 인근의 자그마한 텃밭에 열댓 종류의 씨를 뿌렸고, 수확하느라 비지땀을 쏟고 있다. 상추를 따는 동시에 바로 옆에서는 고기 구울 준비도 함께한다. 길러진 것들을 그렇게 먹을 때 스스로 기른 것에 대한 만족감이 포화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결핍된 정원의 게으른 관람자인 나는 그들에게 다음 해의 고구마를 예약해 놓았다. 허리가 구부러진 동네 할머니들이 지나다니며 뭘 줬기에 그렇게 잘 키웠느냐, 칭찬도 듣는단다. 그저 볕이 충분히 들었을 뿐인 그들의 텃밭은 포만한 정원이다. 

『푸드 앤 더 시티』의 저자가 말하는 정원은 말하자면 저 지인 부부의 텃밭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의 정원은 타인과 더불어 나누고 일구고 함께할 수 있는 정원이다. 말하자면, 삶의 태도이자 방식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자라난 것들을 거둬들여 식탁에 올리는, 그리고 타인의 식탁에도 함께 건네는 그런 일. 가령 식량보장이라는 개념을 보자.  

“1996년 유엔 세계식량정상회의에서 정의한 것처럼, 식량보장은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충분하고 안전하며 영양이 풍부한 먹거리에 언제나 접근할 수 있을 때 존재한다. 대개 식량보장은 좋은 먹거리를 획득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과 경제적 능력 모두를 나타낸다. 이러한 조건의 한 가지나 둘 모두가 충족되지 않을 때 개인, 집단, 전체 국가는 식량이 불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정원은 바로 이런 차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아주 심각하게 왜곡된 먹을거리 생태계의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도시 안에서의 먹을거리 생산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와 같은 정원들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보라.  

“뒷마당에서는 닭 몇 마리를 치는 사람들(토론토에서처럼 가끔은 불법적으로), 도시의 콘크리트 정글 속 건물 옥상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농원(뉴욕과 런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과수원 사업(캐나다 캘거리), 사회변화의 도구로 이용되는 공동체텃밭(벤쿠버의 다문화 공동체텃밭 사업), 온 나라가 도시농업을 국가 식량 체계의 주춧돌로 받아들인 쿠바.” 

책에는 각 장 맨 앞에 에피그램을 하나씩 쓰고 있는데 그중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볼테르의 말이 다시금 ‘그의 정원’을 울린다. 나의 불안한 기억으로는 아마도 볼테르의 철학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마지막 문장일 텐데, 그가 가꾸고 내가 누리는 그 정원은 도덕적으로 충분한 토양으로 채워진 것일까?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개인의 미학은 가능한 것일까? 생태적으로 옳지 않은 개인의 욕망은 과연 도덕적일 수 있을까? 우리의 정원은 정녕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 몹시도 아픈 지구에서!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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