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뭔데 그리 난리야?’라는 심정으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이내 열혈 시청자가 됐습니다.
보라가 시위를 나갔다가 사회와 가정의 저항에 부딪혀 끝내 고시원으로 가는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그럴 듯하지만, 사실적이진 않아!’ 하는 생각이 들 때만 해도 그저 현실을 드라마로 만드는 일이 ‘꼭 그리 사실적이기만 하겠어.’ 하고 두둔하게 될 정도가 됐습니다. 정팔이가 택이를 생각해 덕선이를 놓아주는 데에선, ‘저런 바보가!’하고 안타까운 분노를 터뜨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간혹 ‘시대를 너무 희화화하는 거 아냐. 이러면 값싼 추억팔이로 끝나고 말텐데!’ 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제가 그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 게 된 건 마지막 회 끝부분에서 판교로 이사 가는 덕선이 아버지와 이삿짐센터 기사가 주고받는 장면에서였습니다.
판교로 이사 간다는 덕선 아버지의 말에 기사가 말합니다. “농사지으러 가시나 봐요. 거기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 말에 고생 고생해 이제 겨우 늙은 아내에게 아파트의 편한 삶을 선물하게 된 덕선 아버지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집니다. 그리고 기사는 ‘아이쿠 괜한 말로 이 사람 자존심 긁었네!’ 하는 표정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엔딩까지 이르는 추억을 금빛으로 칠하는 내레이션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저 응팔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아프게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업을 고향의 어리석은 친지들이나 하는 일로, 적어도 서울 같은 도회지의 물을 먹은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집단적인 산업화 미신에 사로잡혀 응팔 이후 한 세대 이상을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쌀 전면 개방시대가 열렸고 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인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율과 자립율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가들 중 최하위입니다. 쌀 개방에 항의하던 노인을 물대포로 쏘아 혼수상태로 만들고도 응팔을 본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와 저항’이 조직되지 않습니다.
판교로 이사 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중산층의 자산을 가지게 된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건 사실은 ‘스스로의 밥을 스스로 지어 먹는 자급의 힘’이 응팔의 시대보다 아주 참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하필 응팔에는 ‘왜 그리 식사를 같이 하는 장면’이 많았는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 밥들이 진짜 우리가 잃은 게 아닐까’ 싶어 먹먹합니다. 잃어버린 사랑의 연대를 추억하기보다 새로운 연대를 조직하겠다는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처음엔 ‘뭔데 그리 난리야?’라는 심정으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이내 열혈 시청자가 됐습니다.
보라가 시위를 나갔다가 사회와 가정의 저항에 부딪혀 끝내 고시원으로 가는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그럴 듯하지만, 사실적이진 않아!’ 하는 생각이 들 때만 해도 그저 현실을 드라마로 만드는 일이 ‘꼭 그리 사실적이기만 하겠어.’ 하고 두둔하게 될 정도가 됐습니다. 정팔이가 택이를 생각해 덕선이를 놓아주는 데에선, ‘저런 바보가!’하고 안타까운 분노를 터뜨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간혹 ‘시대를 너무 희화화하는 거 아냐. 이러면 값싼 추억팔이로 끝나고 말텐데!’ 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제가 그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 게 된 건 마지막 회 끝부분에서 판교로 이사 가는 덕선이 아버지와 이삿짐센터 기사가 주고받는 장면에서였습니다.
판교로 이사 간다는 덕선 아버지의 말에 기사가 말합니다. “농사지으러 가시나 봐요. 거기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 말에 고생 고생해 이제 겨우 늙은 아내에게 아파트의 편한 삶을 선물하게 된 덕선 아버지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집니다. 그리고 기사는 ‘아이쿠 괜한 말로 이 사람 자존심 긁었네!’ 하는 표정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엔딩까지 이르는 추억을 금빛으로 칠하는 내레이션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저 응팔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아프게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업을 고향의 어리석은 친지들이나 하는 일로, 적어도 서울 같은 도회지의 물을 먹은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집단적인 산업화 미신에 사로잡혀 응팔 이후 한 세대 이상을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쌀 전면 개방시대가 열렸고 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인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율과 자립율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가들 중 최하위입니다. 쌀 개방에 항의하던 노인을 물대포로 쏘아 혼수상태로 만들고도 응팔을 본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와 저항’이 조직되지 않습니다.
판교로 이사 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중산층의 자산을 가지게 된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건 사실은 ‘스스로의 밥을 스스로 지어 먹는 자급의 힘’이 응팔의 시대보다 아주 참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하필 응팔에는 ‘왜 그리 식사를 같이 하는 장면’이 많았는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 밥들이 진짜 우리가 잃은 게 아닐까’ 싶어 먹먹합니다. 잃어버린 사랑의 연대를 추억하기보다 새로운 연대를 조직하겠다는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