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대를 위하여[살대를 위하여 93] 존의 사진

1860년대 초 소년 존은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존은 1854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1150달러에 팔린 흑인 아동노예였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북군은 전쟁의 명분을 선전하기 위해 비참한 노예들의 상황을 증명할 사진기록을 만들고 있었다. 존의 사진이 당대에 어떻게 활용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50여 년이 흐른 오늘날 그의 사진은 우리를 가르친다. 굳은 결심을 하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은 야만이다.’ ‘노예제와 같은 반인륜적 제도의 폭력이 다시는 인류사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 150년 전 남부의 백인들은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존의 사진은 북군의 역겨운 심리전이거나, 타인의 정당한 재산에 대한 근거 없는 시비였을 것이다. 오늘의 인류 사회에서 존의 존재를 그렇게 바라보는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백인들과 오늘의 미국인들 사이에는 150년 이상의 까마득한 ‘인식의 거리’가 존재한다. 아득한 ‘인권 감수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2009년 4월 우리 사회는 유아용품인 베이비파우더에 석면이 들어있다는 뉴스로 충격에 휩싸였다. 그해 10월 환경법률센터와 서울환경연합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85명의 시민 원고들과 함께 제조사와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에 돌입했다. 1심과 항소심에서 그들은 패했다. 그로부터 5년만인 지난 2월 13일, 대법원은 ‘석면 베이비파우더를 사용한 아기들과 부모는 어떤 손해도 보지 않았으므로 제조업체들과 국가의 책임 여부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국가는 이미 발생한 위험을 제거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위험을 예방할 책임도 있다거나, 베이비파우더 제조·판매업체들은 이윤추구의 자유 외에 안전한 제품을 공급할 책임도 있으며, 소비자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할 권리가 있다는 ‘시민의 상식’을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석면은 일급발암물질로서 노출량이 적으면 유해하지 않다는 의학적 근거가 없고, 석면 피해는 긴 잠복기 이후에나 확인되므로 지금 발병하지 않았다고 안전하다 볼 수 없으며, 피해자 대부분은 유아로서 피해자 가족은 큰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는 ‘과학적 진실’도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결은 환경성 위험에 대한 시민의 상식, 기업과 국가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의무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그런 판결의 배경에는 비단 석면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 부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연한 환경성 건강피해에 대한 시민의 인식 수준과 감수성에 비해 턱없이 낮은 법과 제도의 감수성과 인식능력 또한 존재한다. 석면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고양에는 150년까지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한 세대 뒤 아니 그보다 더 이른 시간에 노예제에 대한 오늘의 인식처럼 석면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일반화됐을 때 대법원의 석면 베이비파우더 판결은 ‘노예소년 존의 사진’이 될 것이다. 석면, 시멘트, 가습기살균제……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위협하는 환경성 질환 피해가 갈수록 확대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심화가 절실하다.

 

글 | 박현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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