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리고 아주 한참이나 이 지구상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생명체가 오직 인간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같은 치명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이 타 생명체에 비해 얼마만큼 우월한 존재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처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멸하는 선택이 비단 인간만의 유별난 선택은 아니라는 점은 ‘과학’의 힘으로 밝혀졌다. 고래도 쥐도 인간처럼 죽을 수 있다! 그 사실에 조금은 놀랐었다. 그러나 마땅히 더 놀라야 할 사실은 따로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의 안식처인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그리고 아주 한참이나!
지구의 위기를 말할 때 늘 따라붙는 논쟁 중의 하나는 과학 혹은 기술의 발달이 지금과 미래의 위기마저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않을까. 과학이 낳은 결과가 문제라면 그 역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과 너무도 커져 버린 위기의 실체가 과학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론 혹은 무용론, 이 둘은 시소의 양 끝에서 서로를 튕겨낸다. 가운데 앉은 우리가 일종의 무게추인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과학을 ‘비판’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게 상식이지 않을까. 물론 그 상식만으로는 시소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쏠리지는 않지만. 달과 화성에 유인기지가 만들어지고, 그곳을 우주선이 오가고 한다면, 달과 화성행 미국 비자가 필요할 것이며, 일론 머스크의 주머니에 억만금을 내야만 가능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상상력 그 어느 부분들을 채우며 환호성을 자아내게끔 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 같지만 이미 익숙한 공포와 소외 또한 당연하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 시소의 딜레마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직면한 문제는 과학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가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과학적 사고’는 어떤 것일까? 수학공식과도 같은 어려운 이론들? 현실에서는 경험하거나 증명해 볼 수 없는 과학적 현상들에 대한 입장들? 아니다. 의외로 소박하고 따뜻하다.
“우리가 타인에게 혹은 다른 생명에게, 그리고 자연에 겸손했던 적이 있을까. 월등한 지능을 보유했다고 파괴할 권리까지 부여된 게 맞는 걸까? 인류 스스로 자신에게 솔직해져 보는 건 어떨까. 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느냐고, 당신은 안녕하냐고, 당신은 행복하냐고, 가고 있는 그 길이 맞는 거냐고.”
마치 윤리 혹은 휴머니즘의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 기분이지 않은가?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듯 달려드는 것은 욕심이다. 과학은 그저 수단이고 과정이며 설명일 뿐이다......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과학이 말하는 숫자로 덮으면 안 된다. 과학이 아니라 사람의 정도로 해결해야 한다. 다른 생명체가 사는 삶의 터전에 사람의 안전 기준이 되는 숫자를 꺼낸다고 용인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바로 그럼으로써 함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몫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격한 이들로서는 그 같은 생각 역시 위험하고 불온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시작해야만 한다. 아마도 그 얼굴의 눈동자는 슬플 것이다. 그 눈동자는 신화 속의 에리식톤을 보는 눈동자다. 신화 속의 존재 에리식톤은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을 느끼는 형벌을 받았다. ‘허기’가 혈관에 뿌려진 에리식톤은 음식을 사는 데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돈이 떨어지자 끝내는 딸을 팔았고,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부터 손까지 잘라내 먹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주류 정신을 ‘에리식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슬픈 눈동자가 읽어내는 것은 경고인가, 예언인가.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기자
오래전 그리고 아주 한참이나 이 지구상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생명체가 오직 인간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같은 치명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이 타 생명체에 비해 얼마만큼 우월한 존재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처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멸하는 선택이 비단 인간만의 유별난 선택은 아니라는 점은 ‘과학’의 힘으로 밝혀졌다. 고래도 쥐도 인간처럼 죽을 수 있다! 그 사실에 조금은 놀랐었다. 그러나 마땅히 더 놀라야 할 사실은 따로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의 안식처인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그리고 아주 한참이나!
지구의 위기를 말할 때 늘 따라붙는 논쟁 중의 하나는 과학 혹은 기술의 발달이 지금과 미래의 위기마저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않을까. 과학이 낳은 결과가 문제라면 그 역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과 너무도 커져 버린 위기의 실체가 과학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론 혹은 무용론, 이 둘은 시소의 양 끝에서 서로를 튕겨낸다. 가운데 앉은 우리가 일종의 무게추인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과학을 ‘비판’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게 상식이지 않을까. 물론 그 상식만으로는 시소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쏠리지는 않지만. 달과 화성에 유인기지가 만들어지고, 그곳을 우주선이 오가고 한다면, 달과 화성행 미국 비자가 필요할 것이며, 일론 머스크의 주머니에 억만금을 내야만 가능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상상력 그 어느 부분들을 채우며 환호성을 자아내게끔 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 같지만 이미 익숙한 공포와 소외 또한 당연하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 시소의 딜레마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직면한 문제는 과학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가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과학적 사고’는 어떤 것일까? 수학공식과도 같은 어려운 이론들? 현실에서는 경험하거나 증명해 볼 수 없는 과학적 현상들에 대한 입장들? 아니다. 의외로 소박하고 따뜻하다.
“우리가 타인에게 혹은 다른 생명에게, 그리고 자연에 겸손했던 적이 있을까. 월등한 지능을 보유했다고 파괴할 권리까지 부여된 게 맞는 걸까? 인류 스스로 자신에게 솔직해져 보는 건 어떨까. 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느냐고, 당신은 안녕하냐고, 당신은 행복하냐고, 가고 있는 그 길이 맞는 거냐고.”
마치 윤리 혹은 휴머니즘의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 기분이지 않은가?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듯 달려드는 것은 욕심이다. 과학은 그저 수단이고 과정이며 설명일 뿐이다......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과학이 말하는 숫자로 덮으면 안 된다. 과학이 아니라 사람의 정도로 해결해야 한다. 다른 생명체가 사는 삶의 터전에 사람의 안전 기준이 되는 숫자를 꺼낸다고 용인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바로 그럼으로써 함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몫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격한 이들로서는 그 같은 생각 역시 위험하고 불온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시작해야만 한다. 아마도 그 얼굴의 눈동자는 슬플 것이다. 그 눈동자는 신화 속의 에리식톤을 보는 눈동자다. 신화 속의 존재 에리식톤은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을 느끼는 형벌을 받았다. ‘허기’가 혈관에 뿌려진 에리식톤은 음식을 사는 데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돈이 떨어지자 끝내는 딸을 팔았고,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부터 손까지 잘라내 먹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주류 정신을 ‘에리식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슬픈 눈동자가 읽어내는 것은 경고인가, 예언인가.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