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새미로[사진이 있는 엽서] 나에게는 아름다움이 쌓이지 않았다

밤새 모진 바람이 불었다. 그가 혼자 오기 뭣했는지 눈을 데리고 왔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걷고 싶은 욕심에 들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나섰다. 하지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람에 떠밀린 눈이 사정없이 얼굴로 달려든 탓이다. 고개를 숙이거나 외로 튼 채 걷다가 아예 뒷걸음질로 걸어보기도 했지만 무릎까지 쌓인 눈길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 아침,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눈을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나 밖에 없는 듯 했다. 길섶이나 하얗게 눈을 덮어 쓴 먼 산의 정경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미동도 않은 채 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세게 바람이 불어오면 그저 흔들릴 따름이었고 바람과 함께 눈이 들이닥쳐도 조금도 성가시게 생각지 않는 듯 했다. 이미 쌓인 눈은 바람을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가 하면 이내 다시 수북하게 쌓이곤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처럼 바람이나 눈에게 나를 맡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잠 못 드는 밤, 연이어 몸을 뒤채며 몸부림을 치듯 눈이 나에게로 들이닥치는 것을 마다했으며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잠시 다리쉼을 하느라 앉았다가 일어설 양이면 어느새 어깨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기 바빴다.

그 탓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름다움이 쌓이지 않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눈길을 걷고 나서도 나에게는 쌀 한 톨 만큼의 아름다움조차도 없는 듯 싶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는 생고생을 하며 걸었건만 소담한 눈송이들이 겨울나무들과 함께 빚어낸 그것처럼 나는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다. 자연에서 보고 배우는 것 수도 없이 많지만 그를 닮아간다는 것은 오늘 힘겹게 걸은 눈길보다 수만 배나 어려운 일이지 싶다.


글 | 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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