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 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갔지만, 그중에 배종혁 의장님은 떠나지 않고 여전히 계셨어요. 그래서 외롭지 않았지요.”
임희자 낙동강네트워크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 30여 년 환경운동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운동과 삶이 일치된 이들은 때때로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가 많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 아니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임희자에게 배종혁 창녕환경연합 공동의장은 ‘키다리 아저씨’이자 ‘동지’였다. 배종혁 의장에게 임희자는 ‘딸 같은 동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0년대 초 창녕 우포늪에서였다. 배종혁 의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경운동 현장을 함께 했다. 자신의 역할이 있건 없건, 궂은일이건 마른일이건 상관없이 환경운동 그 자리를 지켜왔다. 이런 활동 덕분에 그는 201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1938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다섯의 배종혁 의장은 현역 최고령 환경운동가이다. 그런 그를 한 지역 신문에서는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의 환경사랑’이라고 소개하는 기사(『경남도민일보』, 2011. 11. 2.)를 냈다. 어린이 이야기책에도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왜 ‘깡패’라고 불렸을까? 이유는 그의 삶에 있었다.
전쟁 후 ‘야인시대’ 현장 액션 활극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배 의장은 1950년 6·25 전쟁통에 피난 내려왔다. 그는 “비행기 폭격으로 사방에서 와당탕, 꽝꽝 터지는데 완전 아수라장이었지. 그때 이 두 손이 자연히 모여지면서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했어. 당시 상황을 형용을 못 해”라고 회상했다. “전쟁이라는 건 정말 하면 안 되거든.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데, 못된 놈들이야.”라고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배종혁 의장이 피난 올 당시가 열두 살 정도였으니, 분단으로 고향 땅을 못 가본 지 70년이 넘었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 산소는 찾아갈 수 있어”라며 어릴 적 연백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요즘 “아흔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고향에 꼭 가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그는 어릴 적 개성에 놀러 갔을 때 일을 떠올렸다. 개성은 인삼, 정확히는 홍삼 만드는 기술로 조선시대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고, 송악산 만월대 아래 수로로 인삼 세척 과정에서 버려지는 잔뿌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수영하면서 그거 주워 먹었어. 먹을 게 없으니까”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80 중반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어릴 적 떠내려오던 인삼 잔뿌리를 잔뜩 먹었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전쟁은 끝났지만, 서울은 여전히 난리였다. “아침에 뭘 어떻게 입에 딱 집어넣고 몇 시간 지나면 또 집어넣어야 한다는 걸 알거든.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배종혁 눈에 청계천 등지에서 주먹깨나 쓰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 입은 반들반들했다. “입으로 뭔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입술이 반들반들한 거 아냐. 나도 그거 하겠다.”라고 마음먹고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화랑 동지회’,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동대문 이정재 패거리였다. 그때부터 배는 곯지 않게 되면서 “완전 날아다녔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큰 키에 긴 팔다리가 있어 한 싸움했었다. 덕분에 경찰서도 많이 들락날락했다.
당시 종로는 김두한, 명동은 이화룡, 동대문은 이정재 등으로 주먹 세력이 형성돼 있었지만, 배종혁은 자유자재로 다녔다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프리랜서 주먹이라고 할까. 그는 “(화랑 동지회 가입했지만) 밥을 많이 얻어먹은 건 이정재보다 (김)두한이 형이었어.”라며 “두한이 형은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밥 먹었냐?’가 첫 번째 물음이었어. 그래서 애들 데리고 많이 얻어먹었지”라고 말했다. 한번은 명동 이화룡 패거리에 있는 동향이 밥 좀 먹여 달라고 고향 후배 한 명을 그에게 데려왔다. 배 의장은 꾀죄죄한 몰골에 한겨울인데 동복조차 없었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화계장터’로 유명한 가수 조영남이었기 때문이다. “조영남 노래 나오면 그때 생각이 나기도 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망우리 인근 스케이트장에서 사고를 쳤던 일도 잊을 수 없었다. 당시 스케이트장이라고 해봤자 논에 물 대서 얼리고 말뚝에 새끼줄 치운 정도였다. 스케이트화도 일제 강점기에 내려오는 낡은 게 전부였는데, 누군가 고급 스케이트를 타고 와서 거들먹거렸다. 배종혁과 시비가 붙었고, 배종혁은 그를 메다꽂아버렸다. 배종혁이 때려눕힌 이가 자유당 정권 이인자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시절 배종혁은 미군에서 흘러나온 45구경 권총을 갖고 다녔다. 그 이유를 “그땐 의리였어.”라고 말했다. 자기 동료가 당하면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배종혁 의장은 당시를 “내가 악랄했지”라고 회고했다. 배종혁 의장에게 “만약 지금 타임머신 타고 가서 스무 살 무렵 배종혁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라고 질문을 했다. 그는 “착하게 살아라.”라면서 “너무 나쁘게 살았거든. 그게 뇌리에 항상 있어. 그러니까 이야기하고 싶지를 않아.”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입에 풀칠이라고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지금의 배종혁은 젊었을 때 액션 영화 악역 배우 같았던 배종혁을 부끄러워했다. 아니 평생을 성찰하며 살고 있다는 게 어쩌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귀양지’ 창녕에서 자연에 대한 의리를 맺다
1950년대 배종혁 의장은 고향 4년 선배인 민중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함께 ‘자진농촌계몽대’ 활동을 하면서 문맹 퇴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맡은 곳이 화계장터부터 쌍계사 부근 마을이었는데, 전기는커녕 쌀밥 구경도 어려운 동네였다.
농촌계몽대도 어렵기 마찬가지였다. 준비한 돈이 떨어져 밥을 굶고 있을 때 배종혁은 자기가 지니고 있던 고급 일제 시계를 팔아서 농촌계몽대원의 먹을거리를 구한 적도 있었다.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연구소를 냈을 때도 그를 찾아가 도와주기도 했고, 백기완 선생과 장준하 선생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현장을 조사하기도 했다. 배종혁 의장의 삶에선 굵직한 현대사 한 장면들이 연이어 나온다.
그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건 누나 때문이었다. 피난 오면서 헤어진 누나를 다시 만났고, 재력 있는 누나 덕분에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가게 됐어도 그는 건달 생활을 버리지 못했다. 군 제대 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사고만 치는 배종혁을 위해 누나는 창녕공업고등학교에 교사 자리를 알아봐 줬다. 배종혁은 1969년 창녕에 내려올 당시를 “누나의 꼬임에 빠져 귀양지에 오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 귀양지에서 그는 마치 2014년 일본 영화 『우드 잡(wood job)』처럼 삶의 방향을 찾았다. 이때부터 배종혁의 삶은 휴먼 드라마가 된다.
1970년 개교한 창녕공고는 재일교포 사업가 손무상 이사장이 고향을 위해 벌인 일이었다. 배종혁 의장이 와서 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좋은 뜻에 사람들이 착실하게 해주면 좋은데 여기저기서 막 빼먹는 사람이 많았어”라고 말했다. 불의를 못 참는 배종혁 의장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기술 교사를 하면서 재단 살림살이까지 관장했다. 양쪽 주머니 가득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비용을 줄여 나갔다. 덕분에 ‘창녕공고 1등 공신은 배종혁’이란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그는 학생 모집을 위해 인근 지역을 자주 다녔다. 그러면서 그의 눈에 들어 온 게 낙동강이었다. “낙동강 라인이 굉장히 좋았었지”라는 게 그의 회고다. 우포늪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포늪은 보면 볼수록 정말 희한한 데거든. 정말 멋있는 곳이야”라고 말했다. 우포늪을 지키기 위한 불법 감시도 빼놓기 어려운 배종혁 의장의 활동이었다. 겨울 철새 불법 사냥과 불법 낚시는 물론 대형 쓰레기까지 싣고 와서 우포늪에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배종혁 의장은 잠복까지 해가면서 온몸으로 불법 행위를 막아섰고, 이 덕분에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란 별명을 얻게 됐다. 그는 우포늪이 있는 창녕이 문화적으로 경주 버금간다고 생각했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배종혁 의장이 1990년대 후반 국립자연사박물관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 이후 경남권 환경연합은 낙동강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우포늪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보전 대책 수립을 위해 매진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과정에서 배종혁 의장과 임희자 위원장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경남지역 환경연합은 1996~1997년 동안 우포늪 보전을 위해 매주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때 지역 행사 준비는 배종혁 의장이 도맡아 했다. 창녕환경연합 창립 전이라 어떤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필요 물품과 장비를 구해왔다. 1997년 창녕환경연합이 만들어졌을 때 월세 등은 배종혁 의장이 책임졌다. 정년퇴직 후에는 전업 운동가로 나서면서 퇴직금도 모두 기부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창녕환경연합은 실무 활동가를 구할 수 없어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사무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임희자 위원장은 “창녕환경연합은 실무자 유무가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배종혁 의장님이라는 분이 서 있으면 있는 것”이라 말했다.
배종혁 의장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돈다고 하는데, 자연 속에 살다가 보면 전염병이 침투를 못 해”라면서 “자연에서 얻는 걸 우리 후손들 역시 그대로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해”라고 강조했다. 젊은 시절 사람에 대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 배종혁 의장은 지금 우포늪과 낙동강에 대한, 자연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는 다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환경운동 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갔지만, 그중에 배종혁 의장님은 떠나지 않고 여전히 계셨어요. 그래서 외롭지 않았지요.”
임희자 낙동강네트워크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 30여 년 환경운동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운동과 삶이 일치된 이들은 때때로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가 많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 아니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임희자에게 배종혁 창녕환경연합 공동의장은 ‘키다리 아저씨’이자 ‘동지’였다. 배종혁 의장에게 임희자는 ‘딸 같은 동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0년대 초 창녕 우포늪에서였다. 배종혁 의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경운동 현장을 함께 했다. 자신의 역할이 있건 없건, 궂은일이건 마른일이건 상관없이 환경운동 그 자리를 지켜왔다. 이런 활동 덕분에 그는 201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1938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다섯의 배종혁 의장은 현역 최고령 환경운동가이다. 그런 그를 한 지역 신문에서는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의 환경사랑’이라고 소개하는 기사(『경남도민일보』, 2011. 11. 2.)를 냈다. 어린이 이야기책에도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왜 ‘깡패’라고 불렸을까? 이유는 그의 삶에 있었다.
전쟁 후 ‘야인시대’ 현장 액션 활극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배 의장은 1950년 6·25 전쟁통에 피난 내려왔다. 그는 “비행기 폭격으로 사방에서 와당탕, 꽝꽝 터지는데 완전 아수라장이었지. 그때 이 두 손이 자연히 모여지면서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했어. 당시 상황을 형용을 못 해”라고 회상했다. “전쟁이라는 건 정말 하면 안 되거든.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데, 못된 놈들이야.”라고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배종혁 의장이 피난 올 당시가 열두 살 정도였으니, 분단으로 고향 땅을 못 가본 지 70년이 넘었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 산소는 찾아갈 수 있어”라며 어릴 적 연백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요즘 “아흔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고향에 꼭 가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그는 어릴 적 개성에 놀러 갔을 때 일을 떠올렸다. 개성은 인삼, 정확히는 홍삼 만드는 기술로 조선시대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고, 송악산 만월대 아래 수로로 인삼 세척 과정에서 버려지는 잔뿌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수영하면서 그거 주워 먹었어. 먹을 게 없으니까”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80 중반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어릴 적 떠내려오던 인삼 잔뿌리를 잔뜩 먹었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전쟁은 끝났지만, 서울은 여전히 난리였다. “아침에 뭘 어떻게 입에 딱 집어넣고 몇 시간 지나면 또 집어넣어야 한다는 걸 알거든.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배종혁 눈에 청계천 등지에서 주먹깨나 쓰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 입은 반들반들했다. “입으로 뭔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입술이 반들반들한 거 아냐. 나도 그거 하겠다.”라고 마음먹고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화랑 동지회’,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동대문 이정재 패거리였다. 그때부터 배는 곯지 않게 되면서 “완전 날아다녔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큰 키에 긴 팔다리가 있어 한 싸움했었다. 덕분에 경찰서도 많이 들락날락했다.
당시 종로는 김두한, 명동은 이화룡, 동대문은 이정재 등으로 주먹 세력이 형성돼 있었지만, 배종혁은 자유자재로 다녔다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프리랜서 주먹이라고 할까. 그는 “(화랑 동지회 가입했지만) 밥을 많이 얻어먹은 건 이정재보다 (김)두한이 형이었어.”라며 “두한이 형은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밥 먹었냐?’가 첫 번째 물음이었어. 그래서 애들 데리고 많이 얻어먹었지”라고 말했다. 한번은 명동 이화룡 패거리에 있는 동향이 밥 좀 먹여 달라고 고향 후배 한 명을 그에게 데려왔다. 배 의장은 꾀죄죄한 몰골에 한겨울인데 동복조차 없었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화계장터’로 유명한 가수 조영남이었기 때문이다. “조영남 노래 나오면 그때 생각이 나기도 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망우리 인근 스케이트장에서 사고를 쳤던 일도 잊을 수 없었다. 당시 스케이트장이라고 해봤자 논에 물 대서 얼리고 말뚝에 새끼줄 치운 정도였다. 스케이트화도 일제 강점기에 내려오는 낡은 게 전부였는데, 누군가 고급 스케이트를 타고 와서 거들먹거렸다. 배종혁과 시비가 붙었고, 배종혁은 그를 메다꽂아버렸다. 배종혁이 때려눕힌 이가 자유당 정권 이인자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시절 배종혁은 미군에서 흘러나온 45구경 권총을 갖고 다녔다. 그 이유를 “그땐 의리였어.”라고 말했다. 자기 동료가 당하면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배종혁 의장은 당시를 “내가 악랄했지”라고 회고했다. 배종혁 의장에게 “만약 지금 타임머신 타고 가서 스무 살 무렵 배종혁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라고 질문을 했다. 그는 “착하게 살아라.”라면서 “너무 나쁘게 살았거든. 그게 뇌리에 항상 있어. 그러니까 이야기하고 싶지를 않아.”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입에 풀칠이라고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지금의 배종혁은 젊었을 때 액션 영화 악역 배우 같았던 배종혁을 부끄러워했다. 아니 평생을 성찰하며 살고 있다는 게 어쩌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귀양지’ 창녕에서 자연에 대한 의리를 맺다
1950년대 배종혁 의장은 고향 4년 선배인 민중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함께 ‘자진농촌계몽대’ 활동을 하면서 문맹 퇴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맡은 곳이 화계장터부터 쌍계사 부근 마을이었는데, 전기는커녕 쌀밥 구경도 어려운 동네였다.
농촌계몽대도 어렵기 마찬가지였다. 준비한 돈이 떨어져 밥을 굶고 있을 때 배종혁은 자기가 지니고 있던 고급 일제 시계를 팔아서 농촌계몽대원의 먹을거리를 구한 적도 있었다.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연구소를 냈을 때도 그를 찾아가 도와주기도 했고, 백기완 선생과 장준하 선생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현장을 조사하기도 했다. 배종혁 의장의 삶에선 굵직한 현대사 한 장면들이 연이어 나온다.
그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건 누나 때문이었다. 피난 오면서 헤어진 누나를 다시 만났고, 재력 있는 누나 덕분에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가게 됐어도 그는 건달 생활을 버리지 못했다. 군 제대 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사고만 치는 배종혁을 위해 누나는 창녕공업고등학교에 교사 자리를 알아봐 줬다. 배종혁은 1969년 창녕에 내려올 당시를 “누나의 꼬임에 빠져 귀양지에 오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 귀양지에서 그는 마치 2014년 일본 영화 『우드 잡(wood job)』처럼 삶의 방향을 찾았다. 이때부터 배종혁의 삶은 휴먼 드라마가 된다.
1970년 개교한 창녕공고는 재일교포 사업가 손무상 이사장이 고향을 위해 벌인 일이었다. 배종혁 의장이 와서 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좋은 뜻에 사람들이 착실하게 해주면 좋은데 여기저기서 막 빼먹는 사람이 많았어”라고 말했다. 불의를 못 참는 배종혁 의장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기술 교사를 하면서 재단 살림살이까지 관장했다. 양쪽 주머니 가득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비용을 줄여 나갔다. 덕분에 ‘창녕공고 1등 공신은 배종혁’이란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그는 학생 모집을 위해 인근 지역을 자주 다녔다. 그러면서 그의 눈에 들어 온 게 낙동강이었다. “낙동강 라인이 굉장히 좋았었지”라는 게 그의 회고다. 우포늪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포늪은 보면 볼수록 정말 희한한 데거든. 정말 멋있는 곳이야”라고 말했다. 우포늪을 지키기 위한 불법 감시도 빼놓기 어려운 배종혁 의장의 활동이었다. 겨울 철새 불법 사냥과 불법 낚시는 물론 대형 쓰레기까지 싣고 와서 우포늪에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배종혁 의장은 잠복까지 해가면서 온몸으로 불법 행위를 막아섰고, 이 덕분에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란 별명을 얻게 됐다. 그는 우포늪이 있는 창녕이 문화적으로 경주 버금간다고 생각했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배종혁 의장이 1990년대 후반 국립자연사박물관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 이후 경남권 환경연합은 낙동강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우포늪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보전 대책 수립을 위해 매진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과정에서 배종혁 의장과 임희자 위원장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경남지역 환경연합은 1996~1997년 동안 우포늪 보전을 위해 매주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때 지역 행사 준비는 배종혁 의장이 도맡아 했다. 창녕환경연합 창립 전이라 어떤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필요 물품과 장비를 구해왔다. 1997년 창녕환경연합이 만들어졌을 때 월세 등은 배종혁 의장이 책임졌다. 정년퇴직 후에는 전업 운동가로 나서면서 퇴직금도 모두 기부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창녕환경연합은 실무 활동가를 구할 수 없어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사무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임희자 위원장은 “창녕환경연합은 실무자 유무가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배종혁 의장님이라는 분이 서 있으면 있는 것”이라 말했다.
배종혁 의장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돈다고 하는데, 자연 속에 살다가 보면 전염병이 침투를 못 해”라면서 “자연에서 얻는 걸 우리 후손들 역시 그대로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해”라고 강조했다. 젊은 시절 사람에 대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 배종혁 의장은 지금 우포늪과 낙동강에 대한, 자연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는 다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