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지구에 물보다 빙하가 더 많았던 시절에, 서해라는 바다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과 상해는 바다로 단절되지 않았고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 이삼만 년 전의 지구의 자연은 그랬다. 더 거슬러 올라가, 20억~30억 년 전에는, 그쯤에야 일부 세균들이 지구에 산소 기체를 뿜어내면서 산소대폭발사건을 일으켰다. 지구상의 생물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건 그때 이후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사람에게 친숙하고 사람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의 관습 속에서 괜찮다고 느껴지는 풍경에 가깝다.” 그러니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행동이 절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지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종족의 문제 때문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제주 녹색당은 “관광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자연 그대로의 제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녹색 가치를 옹호하는 진영 안에서도 찬반의 논리가 공존했다. 나는 좀 흥미로웠다. 이 선거의 언어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길 바랐다. 최소한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반성적 사고의 기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그런 일은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 관광객을 반으로 줄이면, 확실히 제주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제주도 항공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은 반으로 줄 테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제주에 오지 않는 나머지 절반은 제주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렇다면 탄소발자국은 더 멀리까지로 찍힌다. 그래서 잠시 혼자 고민해 보았다. 다음 선거에서 녹색의 가치는 어떤 언어에 기대야 할까. 더 혁명적인 언어를 벼려야 할까. 삶의 혁명을 원하는 이들이 선거도 혁명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종종 한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정치적 해법을 고안해주길 바란다. 책에서도 기후변화의 시대의 최대 난제는 ‘죄수의 딜레마’ 혹은 ‘공유지의 비극’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상 현 시점에서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옳은 명제, 더 가치 있는 명제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중적 이목을 집중된 많은 이슈들은 곧잘 선악의 문제나 도덕규범의 문제로 취급되곤 하고, 기후 위기 대응책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할 만하다. 빠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일수록 효과적이다. 나 역시 제주의 해수면 상승속도가 전 세계 평균의 두 배 이상이라는 보도를 접하면, 비장해진다. 이렇게 인간의 탐욕이 비극적 엔딩에 처하는구나, 싶어서.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그러지 말자고 하는 거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의와 더불어 더 많은 과학의 언어로, 변화하는 지구환경에 어떻게든 잘 매달려 보자고 한다. 다음의 두 대목을 기록해 두고 싶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재난과 사고로 희생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 기후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 분노한 지구가 인류를 징벌하는 최후의 순간을 피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구름과 바람에 사죄하기 위해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심하게 변화하는 지구에서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동물이다. 그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온실기체 때문에 우리 삶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되면 우리가 온실기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모순을 해결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가령, 일회용품에 반대하여 텀블러를 철저하게 챙기는 A, 날마다 종이컵에 커피를 마시는 B. 이때 A는 선의 가득한 일상의 활동가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러 태평양 어느 섬으로 일주일 휴가를 떠난 A, 집에 남아 일회용품 가득한 배달음식으로 지낸 B. 당연히 A의 탄소발자국은 당연히 B에 비해 압도적이다. 우리는 A이고 동시에 B다. 우리는 때로 옳고 때로 그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문제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일관된, 그러면서 일상에서도 실행가능한 언어를 가질 때면, 곧 그 녹색의 언어가 혁명적인 동시에 정치적이게 될까?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지구에 물보다 빙하가 더 많았던 시절에, 서해라는 바다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과 상해는 바다로 단절되지 않았고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 이삼만 년 전의 지구의 자연은 그랬다. 더 거슬러 올라가, 20억~30억 년 전에는, 그쯤에야 일부 세균들이 지구에 산소 기체를 뿜어내면서 산소대폭발사건을 일으켰다. 지구상의 생물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건 그때 이후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사람에게 친숙하고 사람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의 관습 속에서 괜찮다고 느껴지는 풍경에 가깝다.” 그러니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행동이 절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지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종족의 문제 때문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제주 녹색당은 “관광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자연 그대로의 제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녹색 가치를 옹호하는 진영 안에서도 찬반의 논리가 공존했다. 나는 좀 흥미로웠다. 이 선거의 언어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길 바랐다. 최소한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반성적 사고의 기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그런 일은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 관광객을 반으로 줄이면, 확실히 제주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제주도 항공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은 반으로 줄 테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제주에 오지 않는 나머지 절반은 제주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렇다면 탄소발자국은 더 멀리까지로 찍힌다. 그래서 잠시 혼자 고민해 보았다. 다음 선거에서 녹색의 가치는 어떤 언어에 기대야 할까. 더 혁명적인 언어를 벼려야 할까. 삶의 혁명을 원하는 이들이 선거도 혁명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종종 한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정치적 해법을 고안해주길 바란다. 책에서도 기후변화의 시대의 최대 난제는 ‘죄수의 딜레마’ 혹은 ‘공유지의 비극’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상 현 시점에서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옳은 명제, 더 가치 있는 명제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중적 이목을 집중된 많은 이슈들은 곧잘 선악의 문제나 도덕규범의 문제로 취급되곤 하고, 기후 위기 대응책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할 만하다. 빠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일수록 효과적이다. 나 역시 제주의 해수면 상승속도가 전 세계 평균의 두 배 이상이라는 보도를 접하면, 비장해진다. 이렇게 인간의 탐욕이 비극적 엔딩에 처하는구나, 싶어서.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그러지 말자고 하는 거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의와 더불어 더 많은 과학의 언어로, 변화하는 지구환경에 어떻게든 잘 매달려 보자고 한다. 다음의 두 대목을 기록해 두고 싶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재난과 사고로 희생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 기후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 분노한 지구가 인류를 징벌하는 최후의 순간을 피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구름과 바람에 사죄하기 위해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심하게 변화하는 지구에서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동물이다. 그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온실기체 때문에 우리 삶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되면 우리가 온실기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모순을 해결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가령, 일회용품에 반대하여 텀블러를 철저하게 챙기는 A, 날마다 종이컵에 커피를 마시는 B. 이때 A는 선의 가득한 일상의 활동가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러 태평양 어느 섬으로 일주일 휴가를 떠난 A, 집에 남아 일회용품 가득한 배달음식으로 지낸 B. 당연히 A의 탄소발자국은 당연히 B에 비해 압도적이다. 우리는 A이고 동시에 B다. 우리는 때로 옳고 때로 그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문제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일관된, 그러면서 일상에서도 실행가능한 언어를 가질 때면, 곧 그 녹색의 언어가 혁명적인 동시에 정치적이게 될까?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