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기후 위기 시대를 사는 당신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전복적이고 진보적인 내일의 풍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모터의 힘을 빌려 앞으로 전진하던 시대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가 뒤늦게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인간 공동체뿐만 아니라 생태 공동체와 공존하는 삶의 방식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창백한 얼굴로 깃발을 휘두르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야생 쪽으로’ 느린 걸음을 한 발짝씩 떼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한꺼번에 세계를 전복시키듯 땅을 뒤집는 이들이 있다. 『야생 쪽으로』는 심혈을 기울여 경작지를 가꾸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 농사를 짓던 영국인 부부가 그 땅에서 쟁기를 놓아버린 사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쟁기를 놓는 일은 가장 크고 무거운 깃발을 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 땅은 곧 야생이 된다. 다 갈아엎어 야생이 되는 것, 그것 이상의 전복이 또 있겠는가.
“테드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가 말끔하게 정리하는 데 심하게 집착하게 된 것은 그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쇠퇴가 시작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쇠퇴가 시작되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나무와 죽어가는 나무들은 자연의 순환과정의 일부로 생물다양성을 자극하지만 현재 우리 풍경에서는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 테드는 우리가 자신이 나이 들고 죽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적 쇠퇴와 부패과정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쇠퇴를 용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 경작농업과 낙농업의 실패를 눈앞에 두고서야 농장 부부는 이 문제에 대답을 하게 됐는데, 실은 우리 모두 그 답을 준비해야만 한다. 부부는 땅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친환경적인 방식의 쇠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농장에서 쟁기질을 멈추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동식물들이 자기 생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과정까지를 모두 농장의 일로 받아들였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테면, 농장 부부는 동물 사체를 수레로 옮겨서 태우지 않고 땅에 그대로 두기를 바랐다. 그것은 물론 유럽의 법령이 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물이 부패하는 과정 또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의 과정까지 모두 자연의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애초부터 경작을 포기할 땅이 없다고 해도 이건 고민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이런 것들이다. 붉은어깨검정새, 회색머리지빠귀, 레서 레드폴 등 새들의 귀환…. 겨울에는 호수에서 알락오리가 첨벙거리고, 봄이 되면 큰까마귀 한 쌍이 침실 밖 거대한 레바논 삼목에 둥지를 트는 일…. 그러니까 쇠퇴 이후에 시작되는 회복의 풍경들을 우리는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야생 쪽으로』의 전복적이고 실험적인 재야생화 작업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질문들이 얽혀있다. 영국 정부는 이 농장에 대해서 제약 없는 실험으로서 지원해왔다. 농장 부부는 땅을 팔 수 있는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풍을 지켜왔다. 재야생화로 이룰 수 있는 관광성과는 기존의 경제논리와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논의들은 골치가 아프다. 땅에서 집약적인 농사를 짓고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땅의 야생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지속가능성을 꿈꿀 것인가. 이런 문제는 단지 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물은 지금까지처럼 댐에 가두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에너지 생산은 과연 이대로가 좋은지, 다시 따져 물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야생 쪽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적 과정들로 시스템을 재구축하며 결과만큼 기능을 평가한다면 땅과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꿀 수 있다. 또한 그러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토지에서 세계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을 공급하는 과학기술 시대의 발전을 칭송하는 한편 ‘남성적’ 과학, 즉 신기술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고 전통적 시스템의 오래된 기술로 돌아가는 것이나 자연을 따르는 것이 퇴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실패를 해결하도록 우리를 독려할 수 있다.” 자연과 우리 사이의 관계 재설정이란 이를 테면 물벼룩과 개미의 생태도 함께 지키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연자본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가장 급진적인 삶의 태도인 셈이다. 야생이라 어려운 삶이 아니라 이상이라 어렵다.
글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기후 위기 시대를 사는 당신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전복적이고 진보적인 내일의 풍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모터의 힘을 빌려 앞으로 전진하던 시대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가 뒤늦게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인간 공동체뿐만 아니라 생태 공동체와 공존하는 삶의 방식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창백한 얼굴로 깃발을 휘두르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야생 쪽으로’ 느린 걸음을 한 발짝씩 떼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한꺼번에 세계를 전복시키듯 땅을 뒤집는 이들이 있다. 『야생 쪽으로』는 심혈을 기울여 경작지를 가꾸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 농사를 짓던 영국인 부부가 그 땅에서 쟁기를 놓아버린 사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쟁기를 놓는 일은 가장 크고 무거운 깃발을 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 땅은 곧 야생이 된다. 다 갈아엎어 야생이 되는 것, 그것 이상의 전복이 또 있겠는가.
“테드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가 말끔하게 정리하는 데 심하게 집착하게 된 것은 그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쇠퇴가 시작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쇠퇴가 시작되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나무와 죽어가는 나무들은 자연의 순환과정의 일부로 생물다양성을 자극하지만 현재 우리 풍경에서는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 테드는 우리가 자신이 나이 들고 죽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적 쇠퇴와 부패과정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쇠퇴를 용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 경작농업과 낙농업의 실패를 눈앞에 두고서야 농장 부부는 이 문제에 대답을 하게 됐는데, 실은 우리 모두 그 답을 준비해야만 한다. 부부는 땅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친환경적인 방식의 쇠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농장에서 쟁기질을 멈추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동식물들이 자기 생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과정까지를 모두 농장의 일로 받아들였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테면, 농장 부부는 동물 사체를 수레로 옮겨서 태우지 않고 땅에 그대로 두기를 바랐다. 그것은 물론 유럽의 법령이 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물이 부패하는 과정 또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의 과정까지 모두 자연의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애초부터 경작을 포기할 땅이 없다고 해도 이건 고민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이런 것들이다. 붉은어깨검정새, 회색머리지빠귀, 레서 레드폴 등 새들의 귀환…. 겨울에는 호수에서 알락오리가 첨벙거리고, 봄이 되면 큰까마귀 한 쌍이 침실 밖 거대한 레바논 삼목에 둥지를 트는 일…. 그러니까 쇠퇴 이후에 시작되는 회복의 풍경들을 우리는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야생 쪽으로』의 전복적이고 실험적인 재야생화 작업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질문들이 얽혀있다. 영국 정부는 이 농장에 대해서 제약 없는 실험으로서 지원해왔다. 농장 부부는 땅을 팔 수 있는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풍을 지켜왔다. 재야생화로 이룰 수 있는 관광성과는 기존의 경제논리와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논의들은 골치가 아프다. 땅에서 집약적인 농사를 짓고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땅의 야생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지속가능성을 꿈꿀 것인가. 이런 문제는 단지 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물은 지금까지처럼 댐에 가두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에너지 생산은 과연 이대로가 좋은지, 다시 따져 물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야생 쪽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적 과정들로 시스템을 재구축하며 결과만큼 기능을 평가한다면 땅과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꿀 수 있다. 또한 그러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토지에서 세계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을 공급하는 과학기술 시대의 발전을 칭송하는 한편 ‘남성적’ 과학, 즉 신기술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고 전통적 시스템의 오래된 기술로 돌아가는 것이나 자연을 따르는 것이 퇴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실패를 해결하도록 우리를 독려할 수 있다.” 자연과 우리 사이의 관계 재설정이란 이를 테면 물벼룩과 개미의 생태도 함께 지키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연자본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가장 급진적인 삶의 태도인 셈이다. 야생이라 어려운 삶이 아니라 이상이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