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것도 안데스 산맥 같은 높은 산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은 유달리 “발아래 떠오르는 / 보름달”의 실감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땅의 높이”를 실감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깊이를 / 다 보여주었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영국의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작품 『테스』에는 이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하고 테스가 하던 말을 계속 했다. “밤에 풀밭에 누워 크고 밝은 별을 똑바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 별에 정신을 쏟아 붓고 있으면 곧 내가 내 몸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내용을 읽어보면 밤하늘의 별과 달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느낌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인 테스는 높은 곳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더구나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몸을 떠나 별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어째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눈으로 보는 느낌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지금 마음으로, 영혼으로 별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별을 바라보니까 자신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별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현종 시인이 안데스 산맥에서 달을 바라본 것도 영혼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달이 “하늘의 깊이를 다 보여주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달의 영혼을 찾아낸 것입니다. “하늘의 깊이를 다 보여주”는 달은 눈으로 보는 달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는 달입니다. 시인의 영혼과 달의 영혼이 교감하는 순간입니다.
예로부터 인류의 조상들은 모든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애니미즘’, 또는 ‘정령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으로 보는 자연만 살아남고 영혼으로 보는 자연이 사라져버릴 때, 더 이상 자연은 신비로운 생명이나 신성이 깃들어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함부로 다루고 훼손할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자연이 그렇게 되어버릴 때 자연의 영혼과 소통해야할 인간의 영혼도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점점 물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혼이 사라져버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깊이”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깊이
정현종
이경호 문학평론가, 『상처학교의 시인』 저자 leekh724@hanmail.net